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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조짐
레던 왕국 서부.
북부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한 론가 상단은 이윽고 혼트 제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에 도달하였다.
국경검문소에는 레던 왕국의 왕실군 병사들이 삼엄하게 출국자들을 상대로 검문을 하고 있었다. 병장기나 마법서, 기타 금지 물품을 반출하려는지, 그리고 범죄자가 아닌지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다.
30년째 상행을 해온 상단주 론가는 태연하게 순서를 기다렸다. 법에 어긋나는 물건은 하나도 없으니 불안해 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검문서 병사들이 소리쳤다.
론가 상당 일행이 앞으로 나아갔다.
론가가 나서서 말했다.
“수고들 하시는군요. 저희는 론가 상단입니다.”
“어떤 물건을 팔러 가십니까?”
“밀 200포대와 정령석 5개, 사파이어 10개, 그밖에 고급의류 등입니다.”
“확인해라!”
“옛!”
병사들이 론가 상단 일행의 짐마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금지된 밀수품은 없었기 때문에 론가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점점 삼엄해진 국경검문수준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양국 간의 관계가 좋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조장님, 이걸 보십시오!”
한 병사가 책 한 권을 들고 검문조장에게 달려왔다. 오후 검문의 책임자인 검문조장은 그 책을 보고는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플레임 버스터? 이런, 5서클의 마법서로군.”
예비적인 적국인 혼트 제국에 전술적 가치가 높은 5서클 마법서를 파는 일은 반역 수준의 중죄였다.
이에 론가는 크게 당황하였다.
“그, 그게 무슨?! 그건 저희의 것이 아닙니다!”
“체포하라! 반항하면 죽여라!”
“옛!”
병사들이 론가 상단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런 얘긴 없었잖소, 상단주.”
“우린 고용된 용병일 뿐이오.”
“저항하지 않겠소.”
론가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다. 론가는 억울해서 소리쳤다.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억울합니다!”
“하지만 네 마차에서 이게 나왔다.”
“그건 누군가가 함정을……!”
“변명은 심문하면서 듣도록 하겠다. 끌고 가라!”
검문조장의 호령에 병사들은 론가 상단 일행을 빠짐없이 압송했다.
끌려가면서 론가는 혼란을 느꼈다.
‘대체 누가?’
함정이었다.
마법서라니. 마법길드에서도 철저히 관리하는 물품을 손에 넣을 재주는 그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이 검문조장이 개인적으로 벌인 일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론가는 압송되면서 검문조장에게 은근히 말했다.
“이보십시오.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합시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론가는 대답대신 허리춤에 달린 돈주머니를 눈으로 가리켰다. 검문조장의 만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누굴 부패한 군인으로 보는 것이냐!”
검문조장의 분노에 론가는 당황했다.
‘아, 아니었나?! 그런데 왜…….’
돈을 뜯기 위해 일부러 죄를 씌운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영문이란 말인가. 론가는 이러다 정말 사형선고라도 받는 게 아닌지 두려워졌다.
‘설마!’
그는 국경검문소의 심문실로 끌려왔다.
어두침침한 지하실. 낡은 탁자에 놓은 촛불 하나만 음산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를 홀로 남겨놓고 사라졌다. 홀로 포박된 채 심문실에 앉은 론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젊은 남자였다.
“론가. 바덴 강 유역 태생의 상인. 상단 경영 30년차. 결혼을 하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
남자는 대뜸 론가에 대한 사항을 줄줄이 읊었다. 론가는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날 노리고 있었구나.’
젊은 남자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반역세력인 안타레스 백작가의 끄나풀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
론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그건……!”
“닥쳐라.”
그 바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론가에게 젊은 남자가 계속 말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지. 하지만 대신 훨씬 좋은 것을 갖고 있다. 권력 말이야. 이 나라 최고의 공권력을 가진 분을 주군으로 섬기고 있으면 일처리가 여러 모로 편리하지. 국경검문소의 협조를 얻어내는데 5분도 안 걸리거든.”
이 나라 최고의 공권력을 가진 주군.
론가는 레던 왕실의 젊은 국왕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에, 에반 테일러 남작님이십니까?”
“그렇다.”
에반은 히죽 웃었다.
카록 리간드 백작이 ‘레던의 현자’라 불리며 엄청난 명성을 날리자 그 심복인 에반 또한 널리 알려졌다. 본래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오른팔이었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증 같은 건 필요 없다. 넌 안타레스 백작가의 하수인이고 금지품목인 마법서를 혼트 제국에 밀매하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내가 그렇게 마음먹은 이상 넌 사형이다.”
횡포에 가까운 엄포였다. 론가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덜덜 떨렸다.
에반은 론가의 등 뒤로 걸어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그러니 주제넘게 나와 진실게임이라도 할 생각은 버려. 네가 날 납득시킬 방법은 딱 두 가지다. 내가 원하는 말을 실토하고 죄를 감면받던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받던가.”
“대체 무, 무슨 말을 원하시는 겁니까?”
“안타레스 백작이 네게 뭘 시켰지? 넌 안타레스 백작가가 린델 백작가와 함께 레던 왕실에 등 돌린 시기를 기점으로 혼트 제국에 상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금지된 품목은 거래하지 않았을 뿐더러, 거래량도 소규모더군. 그렇다면 단순 밀무역이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한 심부름을 한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는 등의 일을 말이지.”
론가는 자신이 이 자리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있다면 딱 하나, 에반을 납득시키고 아량을 바라는 것뿐이었다.
론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틀리신 부분이 두 가지 있습니다.”
“말해봐.”
“먼저, 저는 안전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상단을 꾸려왔습니다. 위험한 품목을 손대지 않았기 때문에 큰 폭의 이익은 못 내도 적자도 내지 않았지요. 전 사람의 말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안타레스 백작가의 하수인 같은 게 아닙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그 정도로 연관이 깊은 관계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연루된 일이 있다는 뜻이군.”
“예. 그들은 제게 한 가지 부탁만을 했습니다. 큰 이익도 볼 수 있고, 그다지 국법에 어긋날 만한 일도 아니라서 쾌히 승낙했지요.”
“무슨 부탁이냐.”
“두 배의 가격으로 쳐줄 테니 한 가지 물건을 계속 조달해달라고 하더군요. 금지품목으로 지정되지도 않은 것을 말입니다. 저 외에도 여러 상인이 같은 부탁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무슨 품목이지?”
에반이 재촉했다.
론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정령석입니다.”
그 말에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정령석?
금지품목도 아닌데 은밀하게 수입한다?
에반은 곧바로 혼트 제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정령’이란 단어가 연상시키는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바로 그의 주군, 카록 리간드 백작이었다. 전쟁을 앞두고 상급 정령술에 대한 모종의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저, 전 단지 그 부탁을 받아서 물건을 판매해온 것뿐입니다. 그 이상 어떤 연관도 없습니다!”
론가가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에반은 그런 그를 스윽 보며 물었다.
“그 외에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라.”
“물건은 혼트 황실에서 나온 사람에게 넘겼습니다. 이름도 직책도 모르지만 혼트 황실의 사람인 건 분명했습니다. 그리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 말해봐라.”
“저 외에도 저와 같은 소규모 상단을 운영하는 상인들에게 정령석을 소량씩 구매했습니다. 반드시 소량씩만 거래했고, 되도록 오리엔 왕국까지 가서 정령석을 구해오라고 요구했었습니다.”
‘한 번에 많이 거래하면 시세도 오르고 눈에 띄지. 레던 왕실의 감시를 피하려면 오리엔 왕국까지 가서 정령석을 구하는 게 바람직할 테고.’
에반은 확신이 들었다.
“이, 이게 끝입니다만, 이제 전 어떻게…….”
“무혐의로 풀어줄 수 있다. 나에게 협력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말이지.”
론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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