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12화 (312/529)

<-- 312 회: 13권 - 6장. 세대교체 -->

***

“에엑?”

나는 서신을 받고 화들짝 놀랐다.

「나 은퇴한다.

6월 첫날부터 사흘간 내 은퇴식 겸 아서의 취임식 파티를 하니 참석하여라. 시끄러운 건 싫으니 손님 몰고 오지 말았으면 싶구나.

추신1: 빈손으로 오지 마라.

추신2: 분명 귀찮다고 오지 않을 릭을 네가 끌고 오려무나.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 모습을 보고 싶다.」

아버지가 작위와 가주 직책을 모두 내려놓고 은퇴하시겠다니? 이럴 수가. 그럼 여태껏 은퇴생활을 하던 게 아니었단 말이야? 아하하.

이제 와서 공식은퇴라니……. 정말 새삼스러운 일을 생각하셨군, 아버지도. 아마도 아서 형님의 입장을 고려하신 거겠지.

뭐, 지금도 이미 가주나 다름없는 아서 형님이었지만, 공식적으로 백작의 작위와 쿤트 가문 주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대외활동에 있어 더욱 유리해진다.

그리고 삼형제가 모두 백작이 되는 진귀한 상황이 되니, 이것도 우리의 명성을 높여줄 화젯거리가 되겠지.

물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오랜만의 가족 모임은 좋은 일이지.

거기다가 휴가를 얻을 수 있는 멋진 핑계이기도 하고!

짝짝.

나는 박수를 두 번 쳤다.

“부, 부르셨습니까, 재상 각하!”

후다닥거리며 9급 말단 관리이자 나의 잡무 담당인 에바 이젤린이 들어왔다.

“응, 불렀고말고. 왕실 관리에게 허가된 휴가 규정이 어떻게 되는지 아니?”

“3급 이상의 고위 관리에게 허가된 휴가는 1년에 50일 이하입니다.”

“내 휴가가 며칠이나 남았지?”

“하루도 남지 않으셨습니다.”

“뭐, 뭣?!”

놀란 내게 에바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드님께서 말문이 트셨다고 10일, 줄리아 리간드 백작 부인의 생신이시라며 15일, 아드님께서 걸음마를 시도하다가 넘어지셨다고 10일, 아드님께서 걸음마에 성공하셨다며 15일의 휴가를 사용하셨습니다.”

“아직 5월 중순인데 1년 치 휴가를 전부 써버렸다고?”

“예, 재상 각하.”

“이건 부조리해!”

“예……?”

“너는 내 담당 관리가 되었으면서 내 휴가 관리도 제대로 못하고 뭘 한 거야?”

내 억지에 에바는 당황했다.

“그, 그게…… 전 분명히 말렸지만 재상 각하께서는 ‘나의 길을 막지 말라’며…….”

“근무태만이야 근무태만. 연말 평가에 등재해야겠다.”

“그, 그, 그러니까…….”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에바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좋아, 오늘의 장난은 여기까지. 한센이 울상을 지으면 재미있었는데, 여자의 눈물은 내 마음을 약하게 하는군.

“실책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이 돈으로 간단한 점심거리를 사오고 남은 돈은 가져.”

그러면서 나는 1레디나를 에바에게 건넸다.

반짝이는 금화에 언제 울었냐는 듯이 에바의 표정이 해맑아졌다.

왕실파 귀족가문인 이젤린 가문의 영애인 에바였지만, 집에서 독립해 나와 왕실에서 지급하는 봉급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늘 돈이 궁하다고 했다.

물론 왕실 관리의 급여는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박하지는 않다. 그리고 본가인 이젤린 가문에서도 용돈을 보내주겠지. 시집 대신 왕실에 입관하며 독립한 딸이라도 자식은 자식이니까.

다만 에바는 성격은 얌전한 주제에 고급스러운 옷과 구두만 골라 입는다. 보나마나 정신 줄 놓고 쇼핑하다가 뒤늦게 안색이 창백해지는 대책 없는 성격일 테지. 아마 내가 가끔 심부름시키면서 던져주는 용돈이 아니면 굶어 죽을 걸?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아, 그리고 내가 왕실 규정을 피해 휴가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봐. 아버지 은퇴식 때문에 본가(本家)에 가봐야 하거든.”

“네!”

에바는 힘차게 대답한 뒤 쏜살같이 나갔다.

푼수이긴 하지만 저래 봬도 머리는 꽤 똑똑한 편이었다. 무슨 일을 시켜도 이상하게 척척 해낸다니까.

점심 경에 이르자 에바는 안심 스테이크와 토마토를 곁들인 샌드위치와 함께 돌아왔다.

“알아냈습니다!”

“오, 빠르네. 읊어봐.”

“네. 외교부 소속 4급 이상의 관리 및 상서 이상의 최고위 관리의 경우 ‘왕실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사교활동을 위해’ 특별유급휴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휴가를 검토 및 승인하는 분은 바로…….”

“바로?”

“국왕 폐하와 재상 각하이십니다.”

‘나 잘했죠?’ 하는 눈빛을 반짝거리는 에바.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훌륭하구나. 휴가 제한은?”

“지역마다 휴가기간에 제한이 있습니다.”

“난 먼저 릭 형님을 만나러 왕실특별군의 주둔지를 방문할 거야. 그 뒤에 쿤트 백작령에 방문해서 아버지 은퇴식 파티에 참석하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에바는 옆구리에 낀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대답했다.

“최장 20일의 특별유급휴가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거밖에 안 돼?”

“쿤트 백작령에서 복귀하시는 경로를 약간 수정하면 30일까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에바야.”

“네, 재상 각하.”

“넌 루이 콘체른을 능가하는 진정한 나의 오른팔이구나.”

“헤헤헤.”

순진하게 웃는 에바.

그런데 말이지. 넌 자칫 법을 악용하는 간신배가 될 소지가 있으니 승진해도 필시 내가 데리고 있어야겠다. 위험한 아이 같으니.

「쿤트 가문과 레던 왕실 간의 관계 개선 및 공신(功臣) 바스크 쿤트 백작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하여, 레던 왕국 재상 카록 리간드 백작의 30일 간의 특별유급휴가를 승인함.

-레던 왕국 재상 카록 리간드 백작.」

나는 나 자신의 특별유급휴가 신청 서류에 재상 직인을 쾅 찍었다. 야호!

***

귀가하니 내 사랑스런 가족들의 단란한 풍경이 보였다.

하녀에게 배운 뜨개질을 시도하는 시스, 장부를 뒤적거리며 리간드 가문의 지출내역을 확인하는 줄리아, 잠든 지스를 안고 있는 운디네.

참고로 운디네는 저택에 상주하며 지스의 유모 역할을 맡게 했다. 지스와 놀아주고 대소변을 보았을 때 기저귀를 깔끔하게 씻겨주는 역할을 운디네처럼 잘 하는 유모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스가 처음 말을 했던 날이 떠오르는군. 지스의 첫 ‘엄마’ 소릴 들은 장본인은 시스도 줄리아도 아닌 운디네였지.

“나 내일부터 휴가야.”

내 말에 줄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요?”

“남편이 일을 쉬고 집에 있어주면 좋아해야 하지 않니?”

“작작 좀 집에 있으시지 그래요? 얘기를 들으니까 요즘 레던 왕실은 업무량이 늘어나고 분위기도 엄격해져서 관리들이 쓸 수 있는 휴가도 제대로 못 쓴다던데, 최고위의 관리인 당신은 무슨 휴가를 시도 때도 없이 써요? 직권남용 아니에요?”

“아, 아냐! 직권남용이라니.”

“앗? 방금 말 더듬었죠! 정말로 직권 남용 한 거예요? 세상에나.”

“그런 게 아니래도.”

난 아버지의 은퇴식 파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아버님이요? 잘됐네요!”

“응, 잘됐지. 나도 아버님이 부러울 지경이라고.”

“당신은 아직 멀었어요. 마흔 이전에 은퇴했다간 알아서 하세요.”

“쳇.”

“그래서 특별유급휴가가 내일부터라고 했죠?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을게요.”

“응, 부탁해.”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 가족은 내가 만든 커다란 흙집을 타고 하늘을 비행했다.

시스가 수유(授乳)한 지 얼마 안 된 지스는 배가 불러서 그런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잠든 지스를 품에 안은 나는 행복감에 젖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저 통통한 볼 살과 콩콩 뛰는 심박만으로도 날 이렇게 들뜨게 만든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아서 형님, 릭 형님, 그리고 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네 식구밖에 없는 삭막한 가문이었는데, 이젠 가족이 이렇게나 많아졌다. 전생 때는 상상도 못했던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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