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3 회: 13권 - 2장. 재상 카록 -->
***
휴가가 끝나고 다음날 오전, 나는 궁정회의에 참석해서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예정된 일이었기에 특별한 반응 없이 덤덤하게 임명식이 치러졌다.
“축하합니다, 재상 각하.”
궁정회의가 끝나고 루이가 다가와 가장 먼저 축하 인사를 해주었다.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재정부는 재상 각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아, 아니, 충성은 폐하께 해야 하는 거고…….”
이미 카록 리간드 라인(?)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루이는 나에게 맹렬한 호의를 보였다. 내 추천으로 출셋길에 올랐고, 내 후계자로도 지목되고 있음을 본인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리간드 백작 각하, 재상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레던의 현자께서 재상이 되셨으니 왕실의 미래에 광명을 밝힌 격입니다.”
궁정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되는 고위 관리들이 대거 나에게 몰려와 한마디씩 덕담을 했다.
말이 덕담이지 거의 아부와 찬양이었다. 뭐랄까, ‘저 좀 잘 봐주세요!’ 하는 느낌이 대놓고 드러나 있어서 딱히 달갑지는 않았다.
루이와 달리 그들은 아직 능력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에게 접근해봐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고맙소.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래도 웃는 얼굴에 침 뱉지는 못한다고, 나는 좋게 대응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관리들은 대부분 30대 초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로 평균연령이 상당히 젊었다. 개혁의 여파로 고위 관리 태반이 정리되면서 그 아래의 젊은 신진들이 대거 승진한 탓이다.
이미 제론과 루이가 내 덕에 출세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뭐, 결국 중요한 건 실력이다.
앞으로 나는 이들을 지켜보고, 그중 재능과 실력이 있는 인재를 가려 뽑아 왕실의 요직에 올려놓을 것이다. 성품이야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안다면 제론처럼 불량스러운 녀석이라도 봐줄 만하지.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 재상부로 향했다.
레던 왕실은 오리엔 왕실의 편제를 모방한 6부 제도를 따르고 있다. 왕실의 여섯 부서는 각기 왕궁 내에 배정된 건물이 따로 있다. 소속 관리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상부는 다르다.
재상부 소속의 관리는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업무상 국왕과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 때문에 국왕의 집무실이 있는 왕궁 본전의 3층에 재상부가 위치하는 것이다.
재상부에 들어서자, 안에 있던 열 명의 관리가 날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재상 각하!”
일제히 나에게 인사하는 관리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듀론 후작의 휘하에서 일하던 이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나의 부하가 되었다.
안쪽에는 앞으로 내가 일한 재상 집무실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집무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탈한 듀론 후작답게 책상과 의자, 서류들이 쌓인 책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창밖으로 왕궁의 정경이 내려다보여서 삭막한 방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게 듀론 후작 각하께서 늘 보던 풍경인가…….”
어쩐지 가슴이 찡했다.
전생 때는 왕실이 멸망한 순간까지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한 뒤 자결로 지조를 지킨 명재상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듀론 후작.
이제 그런 사람의 자리에 내가 앉게 되었다.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매한 인품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내가 이런 높은 위치에 오를 자격이 있는 걸까?
“뭐, 어때. 아무래도 좋잖아, 그런 거.”
이미 재상에 등극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고민 해봐야 쓸데없다. 그저 잠시 감상에 젖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관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보기 드물게도 젊은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젊은. 아니, 성인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된 듯한 앳된 용모를 보니 젊다 못해 너무 어리지 싶었다.
“재상부 소속 9급 관리, 에바 이젤린입니다. 재상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이젤린? 아, 이젤린 남작가로군. 얼마 전에 한 북부대로 보수공사와도 연관이 있었지?”
분명 북부대로 보수공사 비용에 약간의 지참금을 낸 북부의 가문 중 하나였을 거다.
에바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북부대로의 보수공사가 완료된 후로 저희 이젤린 영지의 상황이 호전되었습니다.”
“호오, 그래?”
“네. 북부대로의 치안 회복에 나선 왕실군 덕분에 몬스터 토벌을 해야 하는 부담이 줄었고, 영지를 통행하는 인구수도 부쩍 증가했습니다. 악화일로였던 재정 상황에 다소 여유가 생겨 한숨 돌렸답니다. 가문을 대신해 재상 각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는 무슨. 그런데 이젤린 양.”
“에바라 불러주십시오, 재상 각하.”
“어, 에바. 근데 난 널 오늘 처음 보는데 이번에 새로 임관한 거야?”
“네. 보름 전에 임관했고, 사흘 전에 운이 좋아서 재상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래? 나이는 어떻게 되지?”
“올해로 열아홉 살입니다.”
헐. 아직 스무 살도 안 됐구나.
“거의 성인식 치르자마자 입관했네. 고생이 많겠어.”
“아, 아닙니다. 아직 딱히 주어진 일이 없어서요. 일단은 재상 각하를 수행하며 잡무를 처리하는 역할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음, 신입은 원래 뭘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기 마련이지. 근데 신입치고는 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은 안 보인다. 에바는 제법 야무진 성격으로 보였다.
잘 가르치면 중요한 업무도 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한 번 시험해볼까?
“그럼 간단한 심부름 하나 시킬게, 에바.”
“네, 재상 각하!”
반드시 잘 해내겠다는 각오로 눈을 반짝거리는 에바였다. 귀엽구나, 열아홉 살짜리 여자는. (무, 물론 불순한 뜻은 아니다!)
“북부대로 확장공사의 진척을 파악하고, 빠른 진행을 가로막는 요소를 조사해와.”
내 말에 에바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거 간단한 심부름인가요?”
“어라?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잖아. 아닌가?”
물론 신입 말단 관리에게 시킬 만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루이는 같은 신출내기 말단 관리 때 흑혈병 발발 여부까지 조사했었다고.
“미안. 너무 어려운 일을 시켰나보네.”
“아닙니다. 시켜주십시오, 재상 각하!”
에바는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황급히 대답했다.
나는 재상으로서의 첫 업무로 북부대로 건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물론 보수공사는 마무리되었지만, 바덴 강 유역까지 확장하는 공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단시일 내에 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니까.
아직 진행 중인 현재도 남부지역에서 상인들이 북부로 많이 유입되고 있었다. 북부대로가 보수되고 치안이 회복되어서 안전성이 확보되었고, 혼트 제국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북부대로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북부대로가 바덴 강 유역까지 확장된다면 상인들의 통행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
결국 에바는 내 심부름을 받고 확장공사 현장까지 다녀와야 는데, 보름 만에 돌아왔다.
“재상 각하, 북부대로 확장 공사는 공사비 유입과 인력 공급은 차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래?”
“네. 다만, 확장 루트에 산발적으로 몬스터 집단이 발견되고 있어서 지연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왕실군은?”
“그게, 왕실군 각 군단은 각자 맡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어서 병력을 확장 공사 현장으로 차출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문에 왕실군 지원 병력이 지원을 하러 올 때까지 공사가 중단되고 모든 인력이 대기 상태에 들어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공사가 지연되는 원인은 이 점에 있는 듯합니다.”
뭐, 그렇겠지.
왕실군 전 군단이 동원되고 있다 해도, 이 나라의 모든 몬스터를 박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일이 쉬웠으면 애당초 몬스터 따윈 옛날에 멸종했겠지.
전생 때, 카르스 황제가 대륙의 절반을 휩쓸었을 때도 몬스터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었다고. 그 강한 대군이 전부 휩쓸었는데도 말이지.
아무튼 신입치고 에바는 심부름을 아주 잘 해주었다. 잘 키우면 최초의 여성 상서까지 바라볼 수 있겠어.
“수고 많았어. 일을 아주 잘 했네.”
“감사합니다.”
에바는 칭찬 받아서 기쁜지 활짝 웃었다. 역시 귀엽다니까.
“그나저나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한다?”
공사가 지연될수록 쓸데없는 공사비 낭비가 많아진다.
물론 확장 공사비는 란즈헬 백작가를 포함한 바덴 강의 네 가문이 전액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자금 낭비가 커지면 그들도 불만의 목소리를 낼 터. 게다가 빨리 완공될수록 왕실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콘돌 기병대!
전원 유목민족 전사들로 이루어진 그들이 현재 쿤트 영지에서 놀고 있다. 대장인 패트릭의 지휘 하에 매일 훈련을 받긴 하지만, 그 좋은 전력을 그냥 놀게 놔둬서야 낭비였다.
오랜만에 실전에 투입하면 그들도 좋아할 것이다. 성취에 따라서 성과급도 지급해줄 테니 동기부여도 충분.
생각난 김에 나는 패트릭에게 서신을 작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