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02화 (30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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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재상 카록

피 같은 내 휴가도 마지막 날이 임박했다. 나는 지스를 볼 때마다 실실 웃다가도, 내일부터 다시 출근할 걸 생각하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꼼짝없이 내일부터는 재상이었다. 재상부를 휘하에 두고 왕을 도와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 자리이니 일거리를 더욱 많아질 터.

아무튼 오늘은 듀론 후작이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집사인 니벨 영감을 시켜서 귀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뒀다.

포도주는 특별히 린델 백작가의 와인저장고에서 훔쳤던 쓰론 블루를 꺼냈다. 에릭 국왕도 없어서 못 먹는 명주이니 듀론 후작과의 작별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해질 무렵이 되자 예고했던 대로 듀론 후작의 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4층 테라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마차는 올라오지 않고 동산의 입구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내린 듀론 후작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200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동산이었지만 그래도 나이든 듀론 후작이 무리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걱정이 되었다. 나는 즉시 날아올라 듀론 후작에게 다가갔다.

“후작 각하.”

“허허, 리간드 백작. 득남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힘들게 걸어서 올라오십니까?”

“자네 저택이 소문대로 아름다워서 천천히 오르며 구경하려고 하네. 자네도 함께 걷겠나?”

“그러지요.”

우리는 천천히 동산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함께 걸으면서도 운디네를 시켜서 듀론 후작에게 치유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 덕분인지 듀론 후작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군.”

예, 아주 기분이 좋으시겠죠. 마침내 은퇴할 수 있으니까. 나도 은퇴하고 싶어…….

듀론 후작은 날 보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부럽다는 표정 짓지 말게. 아직 한창 젊은 사람이 말일세.”

“너무 티 났나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듀론 후작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일흔이 넘어서야 겨우 은퇴했네만, 폐하께서 자네를 마흔까지 붙잡아두기만 해도 용하겠군.”

“에이, 무슨 말씀을. 저는 길어야 30대 중반까지입니다. 그 뒤에는 유유자적하게 살아야지요.”

“쯧쯧,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좀 더 가져봄이 어떤가? 요즘 젊은 친구들은 헌신성이 없어.”

“하하하, 루이가 들으면 섭섭해 할 말씀을.”

“물론 그는 예외지. 개인적으로 콘체른 남작에게는 기대를 걸고 있네. 기량은 더할 나위 없고 열정과 야망도 있어. 아마 자네의 뒤를 이어 왕실의 2인자 자리에 오르겠지. 그 친구는 능히 재상 직책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니까.”

아무렴요. 전생 땐 총독이 되어서 레던 왕국령을 통치까지 했는걸요. 재상이라고 못 할 것 없겠지. 나도 루이에게 잔뜩 기대하고 있다고. 녀석은 내 조기 은퇴 플랜의 핵심이니까.

“뭐, 그런 얘기는 그만하세. 이제 난 완전히 떠나는 몸인데 레던 왕실의 미래에 대해 왈가불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죠. 그럼, 후작 각하. 은퇴하면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책을 쓰려고 하네.”

“책이요?”

놀란 내게 듀론 후작은 웃었다.

“그렇다네. 내가 지금껏 살면서 겪었던 정치적 경험을 상세하게 엮고 싶네. 이 늙은이가 젊은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라고는 경험밖에 없는데, 그걸 책으로 후학에게 전해줄 수 있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아, 그렇겠군요.”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역사서로 집필하고 싶군. 국가의 흥망성쇠에 내 나름의 식견으로 평론하는 것이지. 이것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해서일세.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지.”

“정말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격의 성숙이란 반드시 살아온 나이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듀론 후작을 통해 깨닫곤 한다. 전생을 포함하면 분명 내가 그보다 더 오래 살았는데도, 그 같은 훌륭한 성품을 지니지는 못했다.

인격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라는 것을 듀론 후작은 내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 책에 저도 등장하는 거겠죠?”

“물론일세. 내 인생이나 레던 왕국의 역사에나 자네의 이름이 빠질 수야 없지.”

“그럼 모쪼록 잘 좀 써주십시오. 모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건데 제가 멋없게 나오면 곤란하잖습니까.”

“허허헛. 그럼 제발 미치광이 정령사 소리 좀 안 듣도록 행실을 올바로 하게.”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저택의 정원을 다 둘러보았다. 뭐, 200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동산이니까.

“이제 슬슬 식사 때로군. 과연 어떤 포도주를 준비했을지 기대해보겠네.”

“오늘 듀론 후작 각하의 미각이 호강할 겁니다.”

“허허, 그런가?”

이윽고 식당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즐겼다. 줄리아, 시스, 지스도 함께 듀론 후작과 어울렸다. 듀론 후작은 지스를 안아보고는 그 우량함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식사가 끝나고서 줄리아와 시스는 지스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단 둘이 남자, 비로소 나는 비장의 쓰론 블루를 꺼냈다.

“오, 그것은!”

듀론 후작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법 처리로 푸른 색깔을 띤 환상의 포도주는 운디네의 능력으로 더더욱 맑고 진한 맛을 띠었다. 한 잔 음미해본 듀론 후작은 눈을 감고 그 여운을 즐겼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축복이로군.”

“하핫, 시적인 표현이시군요.”

“늙은이를 시인으로 만드는 맛일세, 리간드 백작. 감사를 표하지.”

“이 정도 가지고요. 후작 각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허허, 내가 자네에게 은혜라고 할 만한 걸 베푼 적이 있었던가?”

“물론입니다. 제게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십니까? 실패해도 괜찮다고, 실패를 허락해주시겠다고요.”

듀론 후작은 피식 웃었다.

“그랬었지.”

“그 말씀 덕분에 저는 마음껏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세운 공적들, 듀론 후작 각하가 아니었으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을 테죠.”

“내가 자네의 활약에 일조했다니 영광일세.”

“에이, 부끄러우니까 자꾸 그런 낯간지러운 말씀은 그만 하시고요. 자, 한 잔 더 받으시죠.”

“좋네.”

우리는 쓰론 블루를 다시 한 잔 따라 마셨다.

듀론 후작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책임져줄 수 없네. 실패는 이제 자네의 책임이야.”

“네.”

“자네는 이제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이 되었네. 전보다 더 자신감이 넘치고, 자신의 길을 확신하게 되었지. 그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은퇴할 결심을 한 걸세.”

“…….”

점점 책임이 무거워지는 말씀을 하시네.

재상이라는 직책이 얼마나 막중한 임무인지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국왕 다음으로 이 나라에서 가장 막중한 책임을 가진 사람이 바로 재상이다.

내가 재상이라니. 전생 땐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듀론 후작은 이만 떠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을 나서는 듀론 후작은 마차에 오르며 내게 말했다.

“이 나라를 부탁하네. 폐하를 잘 보필해주게.”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허헛, 또 그 질문인가? 그럼 나도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해줘야겠군. 실패할까봐 두려워하지 말게.”

“설사 자네가 능력 부족으로 일을 그르쳐서 세간의 비난을 받거든 이렇게 말하게. 이 필립 듀론에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았다고 말일세.”

예전에 그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 실패를 책임지는 사람은 나다. 나는 그런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나는 듀론 후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안녕히…….”

“한가해지거든 듀론 후작가로 놀러오게. 아마 한가하지 않겠지만, 허허허.”

듀론 후작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천천히 리간드 저택에서 멀어졌다. 나는 짠한 마음으로 떠나는 마차를 바라보아야 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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