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회: 12권 - 9장.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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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로의 보수공사가 진행될수록, 시스의 배도 점점 불러왔다.
이제 아기의 성별도 정령의 감각으로 판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줄리아가 급구 나를 말렸다.
“그건 태어날 때까지 비밀로 하기로 해요.”
“어째서?”
“그래야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감동이 두 배가 되죠!”
레이라 형수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요즘은 그게 유행이니? 아마 궁금해서 미칠 텐데? 네가 과연 참을 수 있을까?
그러나 시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기 때문에 나는 아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밝히지 않기로 했다.
다만 입이 근질거렸기 때문에, 나만 알고 있는 이 비밀을 십분 활용해서 장난을 쳤다.
“히히히, 나는 아는데. 나는 알지롱.”
“으이씨! 그거 하지 말라고 했죠!”
벌컥 화를 내는 줄리아에게 나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딸이야.”
“꺅! 정말요?”
비명을 지르는 줄리아에게 나는 히죽거렸다.
“아니, 뻥인데.”
“그, 그럼 아들이에요?”
“아니, 안 가르쳐주지.”
“아아악! 정말 맞아볼래요?!”
나는 낄낄거리며 길길이 날뛰는 줄리아를 피해 달아났다.
한편, 북부대로 보수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이르자 상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도로가 제대로 정비되어서 마차나 수레가 다니기 편해졌고, 곳곳에 주둔한 왕실군 군단들이 북부대로를 철통 같이 보호하고 있었다. 수시로 정찰을 돌면서 도로를 지나는 민간인을 보호해주기도 하니, 통행자가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혼트 제국으로 가려면 북부대로를 통해야 했다. 혼트 제국에 물품을 수출하려는 상인들은 북부대로를 이용했다. 그 덕분에 레던 왕국 중북부 지방의 경기 흐름이 활발해졌다.
많은 자금을 들여서 북부대로 보수공사를 한 효과가 나타날수록, 왕실에서 나의 입지는 확고부동해졌다. 역시 ‘이번에도 카록 리간드가 옳았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전생의 경험과 운이 따라준 덕분이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나의 경력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퍽 인상적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이런 명성까지 따르게 되었다.
“레던 왕실이 현자를 얻었다.”
“젊은 현자가 나라를 부흥으로 이끌 것이다.”
레던의 현자.
‘미치광이 정령사’의 뒤를 이어서 생긴 나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나더러 현자라니, 아하하. 그것 참 거창하기도 하지. 그러다 막상 나랑 만나고 나면 현자 같지가 않아서 잔뜩 실망할 텐데.
아무튼 ‘레던의 현자’란 명칭은 상급 정령사이기도 한 나의 능력과 더불어서 백성들 사이에서 엉뚱한 소문까지 퍼졌다.
“그는 정령들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
“정령술의 극의를 이루어서 대자연의 모든 이치를 깨우쳤다.”
허허, 그것 참…….
소문만 들으면 난 정말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줄리아는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 뿐이었다. 나더러 현자라고 하니까 너무 웃긴단다.
그래, 내가 현자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무 웃긴다는 반응을 보이는 줄리아가 얄미워졌다.
그래서 나도 반격을 했다.
“사실은 나 현자 맞아.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우치고 있어서, 시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알지롱.”
그리고는 격분한 줄리아의 추격을 피해 달아났다.
의외로 아이를 가진 시스는 담담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똑같이 소중한 자신의 아이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이었다.
늘 어린 소녀 같기만 한 시스였는데, 이따금씩 이렇게 성숙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시스가 신비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
“진심이시오?”
“예, 폐하.”
에릭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후작…….”
“폐하.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신을 보내주시옵소서.”
듀론 후작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에릭 국왕의 얼굴에 고뇌가 어렸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때로는 경험 많은 친절한 어른처럼 자신을 이끌어주던 듀론 후작이었다. 그런 노재상을 잃는다는 것은 아직 젊은 에릭 국왕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내주어야 했다.
세대교체의 시기가 무르익었다.
게다가 듀론 후작은 진즉에 은퇴를 했어야 할 나이에 왕실에 불려와 많은 고생을 하였다. 더 이상 붙잡는 것은 억지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간드 백작이라면 재상이 되어서 신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것입니다. 이제 신은 걱정 없이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에릭 국왕은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다음 궁정회의 때 공표하겠소.”
“감사합니다, 폐하.”
“듀론 후작, 그간 감사했소. 나의 영원한 신하이자 스승으로 그대를 기억하리다.”
“폐하…….”
듀론 후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
“끄응, 무사해야 할 텐데.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뭐가 또 걱정이에요? 칼에 찔려도 안 죽을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해놓고서는.”
줄리아는 문가를 서성거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내게 잔소리를 했다.
시스가 진통을 시작하자 나는 미리 고용해놓은 산파를 투입해 출산 준비를 마쳤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힐링포션 열 병을 준비시켰고, 그래도 불안해서 운디네를 시스 옆에 붙여놓았다.
운디네는 지금도 시스와 뱃속의 아이에게 치유의 힘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순산, 순산, 제발 순산!”
“그만 좀 하라고요!”
“으으, 우리 시스 아파서 어떡해? 지금도 저렇게 아파하잖아.”
“제 귀에는 들리지도 않아요. 아파하긴 해요?”
“그래! 사람의 청각으로는 잘 안 들리지만 나지막하게 끙끙거리고 있단 말이야!”
“애 낳는데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거죠! 그리고 쟤는 원래 아픈 것도 잘 참잖아요.”
“그래도……. 크흑, 이게 다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시스를 임신시켜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어. 난 좀 두들겨 맞아야 돼! 욕을 먹어도 싸!”
“나한테 맞을래요?”
“…….”
아니. 네가 때리면 아파.
그런데 그때였다.
“오오! 머리! 머리가 나왔어!”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령들과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나에게는 방안에서 벌어지는 출산 현장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지금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늙은 산파가 좀 더 힘내라고 시스를 재촉했다.
“저, 정말요?”
옆에서 줄리아도 조마조마한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울음소리가 방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해, 해냈다!”
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꺄아악! 어쩜 좋아!”
줄리아도 방방 날뛰었다.
산파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우리는 안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갔다.
“주인님, 여기…….”
산파는 웃으며 나에게 아기를 안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줄리아가 가로채버렸다.
“비켜 봐요!”
“헉! 얘야!”
날 어깨로 들이받아 밀쳐버린 줄리아는 아기를 안아들었다. “안 돼! 아기를 먼저 안는 건 아빠인 나의 특권이란 말이야!”
“시끄러워요. 아기가 무서워하잖아요.”
줄리아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은 채 뻔뻔스럽게 내게 말했다.
“으으으…….”
몹시 억울했지만, 줄리아가 눈물을 살짝 글썽거리는 걸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인 것처럼 감격하는 줄리아였다.
나는 그 옆에서 함께 아기를 보았다.
작고 쭈글쭈글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나의 피. 나의 살. 나의 뼈.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아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하고 뜨거운 감정이 솟아났다. 울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나는 아이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안녕, 아가야. 아빠란다…….”
<1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