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 회: 12권 - 8장. 네 명의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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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굳은 얼굴을 띤 제이슨과 마주 앉아 있자니 나도 슬슬 심기가 불편해진다. 이 양반은 뭐가 불만이야? 아, 그래그래. 물론 내가 좀 야밤에 4층 창문으로 방문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잖아? 우리가 이제 남도 아니고, 아하하.
나는 문득 제이슨의 집무실 탁자에 놓인 서류들에 눈길이 갔다.
노움, 운디네와 공유된 감각으로 살펴보니 안타레스 백작가, 린델 백작가에 대한 첩보 보고서 같았다. 나는 흥미가 생겨서 입을 열었다.
“저것 좀 봐도 될까요?”
“누구 마음대로?”
제이슨은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렇게 정중하게 요청하잖습니까, 외숙부.”
“외숙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아참, 그랬죠? 란즈헬 백작님.”
제이슨은 코웃음을 치더니 탁자의 서류더미를 내게 휙 던졌다. 어이쿠, 이놈 성질머리 좀 보게. 나는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는 서류들을 어스 핸드 네 개로 모두 낚아챘다.
제이슨은 내심 아쉬운 기색이었다. 내가 허둥대면서 흩날린 서류들을 줍는 꼴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거야. 남을 기죽이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아는 작자일 테니까. 하여튼 음흉하다니까.
나는 빠르게 서류를 훑었다.
그 내용을 읽으면서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내용이 매우 유용하고 충실해서가 아니었다.
에반이 가끔 나에게 했던 보고 내용과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에반의 첩보조직이 란즈헬 백작가의 첩보망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생각하지?”
제이슨이 물어왔다.
내가 답했다.
“두 가문은 미리 확보해놓은 많은 물량으로 혼트 제국의 내수시장을 공략할 겁니다. 문제는 그 물량을 모두 소진한 뒤에는 어떻게 다시 물건을 확보할 것이냐, 라는 것이죠.”
“그래서?”
“바덴 강의 통행이 차단된 상태에서 두 가문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씩이나 된다고?”
제이슨은 자신이 생각지 못한 것을 들어서인지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내가 설명했다.
“첫째는 두 가문도 육로로 상행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혼트 제국 내수시장을 상당수 잠식한 뒤이며, 막강한 자본력도 있으니 바덴 강을 통한 교역이 아니더라도 이익을 얻지 못할 리는 없습니다. 수많은 상단을 거느린 그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래서야 혼트 제국의 편으로 돌아선 의미가 없지 않나.”
“그렇죠. 바덴 강의 물류를 쥐고 통행세로 얻었던 때보다는 얻는 수익이 훨씬 적어지겠지요. 그래서 그들이 시도할 두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나는 제이슨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바로 란즈헬 백작, 당신입니다.”
“뭐?”
“란즈헬 백작가와 결탁해서 밀무역을 한다면, 계속 바덴 강을 통해서 막대한 이득을 낼 수 있습니다. 란즈헬 백작가 또한 함께 이익을 낼 수 있고요. 두 가문이 더 많은 커미션을 제안할 테니 꽤 솔깃할 겁니다.”
란즈헬 백작가는 린델, 안타레스 두 가문과 밀접한 위치에 있었다.
당연히 뒷거래를 제안한다면 그 대상은 란즈헬 백작가가 될 것이다.
“지금 날 의심하나?”
제이슨은 나직한 어조로, 그러나 매서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그런 시도를 할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두고 보시죠.”
“그 제안에 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길 바랍니다.”
“흥, 세 번째는 뭐냐?”
“왕실을 설득하는 것이죠. 바덴 강 통행 금지령을 내린 왕실을 설득해서 왕명을 철회하는 것인데, 셋 중에 가장 힘든 방법이 되겠죠. 무엇보다도 제가 거절할 테니까요.”
내가 싫으면 에릭 국왕도 싫은 거다. 권력 쥐었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레던 왕실에서 내 위치가 그렇다는 뜻이다.
사실은 이런 문제 때문에 나는 듀론 후작의 은퇴를 원치 않는 것이다. 나에게 너무 강한 권력이 쏠려 있다. 내가 오판을 하면 나라 전체에 악영향이 미친다. 그게 겁난다. 그땐 루이와 제론이 나를 잘 말려주길 바라는 수밖에.
“군사행동으로 나올 가능성은 없는 건가?”
“결단코 없지요. 자칫 잘못해서 전쟁이라도 나면 가장 험한 꼴 보는 쪽이 두 가문입니다.”
혼트 제국군이 그 명분으로 바덴 강에 오면, 두 가문은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그들을 자기 영토 내로 들였다가는 순식간에 잡아먹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와주겠다는 명분으로 집안에 들어와서 다 죽이고 재산 약탈하면 어쩔 거냔 말이다.
작금의 정세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안타레스 백작과 린델 백작 두 사람이다.
“그래서, 내게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이지?”
제이슨이 화제를 돌렸다.
“텍스 강 유역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조선소를 설립하는 일만 남았죠.”
“미적거리더니 이제야 끝냈군.”
“하하, 제가 워낙 공사다망해야죠.”
“나 역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이죠. 그런 의미에서 합작투자에 관한 계약을 슬슬 채결할까요?”
“그 계약 채결에 대해서 말인데, 그건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일 것 같나?”
제이슨은 삐딱한 어조로 반문해왔다. 그냥 확실하게 말하면 안 되겠냐?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육제후의 다른 가문에서 합작투자에 참여하겠다는 건……?”
“잘 아는군. 세 가문 모두 투자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나로서도 달갑지는 않지만, 왕실과의 화합이라는 명목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끄응…….”
그럼 대체 투자비율이 어떻게 되는 거야? 이것 때문에 한바탕 입씨름 하겠군. 경영권을 보유하려면 51%이상의 지분은 내가 쥐고 있어야 하는데.
“다른 세 가문의 가주들을 이리로 초대할 테니, 그때까지는 다른 볼일을 보던지, 아니면 이곳에서 머물도록 해라.”
“이곳에서 머물겠습니다.”
“알겠다.”
제이슨은 탁자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길게 울리자 밖에서 하인 한 명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리간드 백작을 머물 만한 숙소로 안내해드려라.”
“예, 주인님.”
하인은 나에게 정중히 손짓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따랐다.
으음, 그동안 쇼핑이나 할까?
시스와 줄리아 줄 선물도 사줄 겸. 아하, 이제 곧 태어날 아기 선물도 사야지! 유모차랑 옷이랑 신발이랑 전부!
***
나는 열흘간 란즈헬 백작령에서 놀았다.
역시 명불허전의 바덴 강 유역.
굉장히 아름답게 꾸며진 거리, 부유한 사람들, 고급스러운 상점들. 어딜 가나 금화를 처바른 티가 풀풀 났다. 세삼 레던 왕국 북부는 이곳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가족들 줄 선물을 실컷 살 수 있었다.
귀금속류를 주로 구매했는데, 하나같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서 연신 감탄이 나왔다.
귀금속시장도 아직까지는 가장 수익성이 높은 사업 분야 중 하난데, 카록 상단도 슬슬 이쪽에 진출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 때 레이라(지금은 형수) 때문에 귀금속 사다 나른 경험이 있어서 귀금속시장의 유행의 흐름은 꿰고 있었다.
물론 그 유행이란 것은 시대가 어떻게 흐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로 인해 시대 흐름이 달라졌기 때문에 유행도 내가 알던 것과 다를 수 있었다.
“쯧, 욕심이지 뭐.”
굳이 집착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돈을 버는데 더 벌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중에 줄리아가 할 마음이 있으면 시켜줘야겠다.
그렇게 열흘간 원 없이 놀다 보니, 마침내 육제후의 다른 3인이 하나둘 찾아왔다.
앵거스 백작.
로도크 백작.
두첸 백작.
이로서 나는 육제후 6인 전부를 만나보게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