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290화 (290/529)

<-- 290 회: 12권 - 5장. 북부대로의 부활 -->

“평화로운 결말을 원하는군.”

“네. 싸울 수 있는 젊은 사내들을 제외하면 다들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사는 무고한 사람들입니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도 문제없이 충실한 영지민으로서 살 수 있지요. 그리고 제 부하들은 말씀드렸다시피 이용가치가 있는 쓸 만한 전력입니다. 이 점을 생각하셔서, 부디 저희를 죽이지 말고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가만히 베일을 바라보았다.

베일의 태도는 한 점 거짓 없이 진실 되어 보였다. 산적단 두목인 그는 우습게도 절제심이 강하고 공명정대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거기에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데도 전략전술을 터득하고 시류를 볼 줄 아는 통찰력까지 갖췄다. 그야말로 천재다.

가만…….

지금까지 발라드 산맥에 살면서 토벌군을 수차례나 격퇴했다면, 이 산적단은 산악전에 굉장히 능하다는 뜻이 된다.

……몽땅 다 내 영지로 데려갈까?

남쪽의 산골에 있는 내 코딱지만 한 영지는 인구수가 적고, 텍스 강 유역에 조선소를 설립하기 위해 몬스터와 치고받는 중이었다.

여기에 있는 수천 명을 전부 내 영지로 데려가면 인구수도 늘고, 몬스터와 싸울 전력도 천여 명이나 추가된다. 내가 2년쯤 생계비를 지원해주면 내 영지민으로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갑자기 영지 인구가 2배가량 늘어버리면 혼란도 있을 테지만, 통솔력이 강한 베일이라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베일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강한 흥미를 느꼈다.

이 남자는 분명히 재능이 있었다.

조직을 이끄는 통솔력은 물론 산악전에 대한 용병술도 타고났다.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베일.”

“예, 백작님.”

“이틀 정도 시간을 주지.”

“네?”

“이틀 안에 네 부하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발라드 산맥에서 나오도록 해. 그렇다면 너를 리간드 가문의 기사로 임명하고 다른 모두에게도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 만약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이틀 안에 전부 이 산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싸우는 걸로 알겠다. 어때? 할 수 있었어?”

“진심이십니까? 저희가 백작님을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나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1분 안에 전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굳이 비열한 속임수를 쓰면 그쪽이 오히려 번거로워.”

내 말에도 베일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틀 안에 모두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좋아. 그럼 그때 보자고.”

나는 베일의 어깨를 툭툭 친 후 밖으로 나갔다.

***

그날 5군단 진영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5군단장 로뎀 자작에게 알렸다.

로뎀 자작은 여러 가지로 놀란 모양이었다.

“100명이나 되는 궁수 전력을 숨겨놓고 있었다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확실히 베일 그 자는 산적 수괴로 썩기에는 실로 아까운 재능입니다.”

예상외의 공격을 당하면 지휘관으로서는 크게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었으면 확실히 5군단은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격을 보류하고 내게 지원 요청을 한 로뎀 자작의 판단은 옳은 결정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항복을 받고 전원 제 영지로 데려갈 생각입니다만, 군단장님께서도 동의하시는지요?”

“백작 각하께서 그리 결정하셨다면 따라야지요.”

“이곳의 책임자는 군단장님이시니 동의를 구하고 싶습니다.”

나는 왕실군의 5군단장인 로뎀 자작의 권위를 존중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양해를 구했다. 내가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왕실군까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배려를 이해했는지 로뎀 자작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5군단은 북부대로의 치안 회복을 위하여 이곳 발라드 산맥을 반드시 장악해야 했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 거부할 까닭이 없습니다.”

발라드 산맥은 북부대로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지였다. 게다가 규모도 꽤 크다.

필연적으로 베일 일당 같은 산적단이나 몬스터 부족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지점이기 때문에 5군단은 반드시 이곳을 지배해야 했다.

“그럼 베일 산적단이 이용하던 본거지를 5군단이 인수하면 되겠군요. 수천 명이 살던 곳이니 5군단의 주둔지로 부족함이 없을 듯합니다.”

“예. 게다가 주요 거점마다 목책까지 세워뒀으니 저희 5군단이 발라드 산맥을 통제하기가 더욱 수월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걸 전투 한 번 없이 손에 넣게 됐으니 모두 백작 각하의 공로입니다.”

로뎀 자작은 진심어린 태도로 감사를 표해왔다.

“별 말씀을요.”

쑥스럽네. 그냥 가서 얘기만 하고 왔을 뿐인데.

로뎀 자작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혹시라도 놈들이 속임수를 쓴 것일지도 모르니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러시지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베일이 날 속이고 항복하는 척 기습할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나야 샐러맨더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는 거지. 물론 베일처럼 현명한 인물이라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 없겠지만.

5군단은 기습공격에 대비하여 진지 방어 태세로 들어갔다.

나는 느긋하게 막사에 머물면서 놀고먹었다.

샐러맨더가 왜 안 싸우느냐며 가끔 투정을 부렸지만 가볍게 무시해줬다.

그랬더니 그날 밤 횃불이 불기둥이 되어서 하늘로 치솟아서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었는데,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크헤헤! 통구이, 통구이!’하는 악마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얌마…….”

-크헤헤! 왜 그러냐? 증거 있냐?

“아직 아무 말도 안 했거든?”

-크헤헤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러지 말고, 내가 다른 군단을 지원하면서 몬스터 토벌을 할 때 실컷 놀게 해줄게.”

-정말이냐?

“그래, 약속할게. 마음껏 통구이 만들며 놀게 해줄 테니까 장난 그만 쳐, 알았냐?”

-지켜보겠다!

그러면서 샐러맨더는 내 체온으로 쏙 깃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지켜보긴 뭘 지켜봐? 아 놔, 아니꼬워. 뭔 놈의 정령이 계약자 말을 안 듣는 거지. 누굴 닮아서 이래?

……누구긴 누구겠어.

전생의 내 아들놈 닮았겠지. 다 내 탓이다, 내 탓.

아무튼 그런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대체로 아무 문제없이 약속했던 이틀째가 되었다.

발라드 산맥에서 수많은 사람이 줄지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는 베일이 있었다.

그가 이끌고 온 산적단 사람들은 저마다 불안한 표정이었다. 혹여나 왕실군이 약속을 어기고 공격하는 게 아닌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반면, 잔뜩 긴장하고 있던 5군단 병사들은 베일 산적단이 무기를 들지 않고 나타나자 안심한 눈치였다.

“백작님. 약속한 대로 모두를 이끌고 왔습니다.”

베일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나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잘 왔다. 약속대로 아무런 처벌 없이 항복을 받아들인다.”

이윽고 5군단 병사들이 우르르 나와 그들을 진지 안으로 수용했다. 일단 숨기고 온 무기가 없는지 철저하게 수색을 한 뒤에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베일은 나와 함께 5군단장 로뎀 자작을 만났다.

“네가 산적단 두목 베일이냐.”

“송구합니다.”

베일은 로뎀 자작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로뎀 자작은 껄껄 웃었다.

“뭐, 어떠냐. 마음을 고쳐먹고 리간드 백작 각하를 섬기기로 했으니 더는 과오를 묻지 않지.”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그런데, 그보다 자네들이 살던 본거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많은데…….”

“뭐든 알려드리겠습니다.”

베일은 로뎀 자작에게 발라드 산맥에 대한 모든 사항을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놀라운 점은 베일 산적단은 토벌군뿐만이 아니라 발라드 산맥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싸워왔다는 점이었다.

“기존에 서식하던 고블린 부족은 저희가 토벌했습니다만, 북쪽에 있는 오크 부족과는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로 이쪽 루트로 공격을 해오곤 하는데, 이 봉우리에 있는 목책만 잘 지키면 어려움 없이 격퇴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그 외에 다른 주의할 만한 몬스터는?”

“발라드 산맥 동쪽 끝에 미노타우로스가 가끔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몬스터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산적 두목이 아니라 영주노릇을 하고 있었군, 이 베일이라는 녀석. 생각보다 기량이 출중한 놈이었다.

로뎀 자작도 베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정말 대단한 솜씨로군. 지금껏 발라드 산맥을 아주 효율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어. 앞으로도 그 실력을 리간드 백작 각하를 위해 쓰게.”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베일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로뎀 자작에게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베일과 함께 둘이서 대화를 나눴다.

“백작님,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전에 한 가지 묻지. 내가 네게 했던 제안 기억해?”

“리간드 가문의 기사가 되라는 말씀 말입니까? 물론 기억합니다.”

“그럼 정식으로 제안할게. 기사가 되어서 나를 섬기겠어?”

베일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물론입니다. 백작님의 기사가 될 수 있다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좋아. 정식으로 너를 리간드 백작가의 기사로 임명하겠다. 앞으로 리간드 가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해라.”

“맹세합니다.”

나는 간단한 수여식으로 베일을 기사로 임명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임무를 주겠다.”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이제부터 주군이라고 불러.”

“예, 주군.”

베일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쿤트 영지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리간드 백작령이 나온다. 그곳까지 발라드 산맥에 상주했던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가도록 해라. 그리고 나를 대신해서 리간드 백작령을 관리하는 기사 딘에게 이 서신을 보여줘라. 그럼 딘이 네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줄 거다.”

나는 미리 준비해놓은 서신을 베일에게 건네주었다.

서신에는 네 가지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첫째, 베일에 대한 소개와 그가 내 기사가 되었다는 것.

둘째, 그가 이끌던 부하들을 기문의 사병으로 임명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지민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셋째, 새로 영지민이 된 이들에게 2년간 정착금을 지원하라는 것.

넷째, 베일과 그 부하 출신들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텍스 강 유역의 몬스터 토벌에 박차를 가할 것.

딘이라면 잘 알아듣고 내 뜻에 따라줄 것이다. 어차피 딘도 귀족이 아닌 용병 출신이었다. 베일을 차별 없이 대우해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군.”

베일은 서신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

로뎀 자작은 리간드 백작령으로 떠나는 베일 일행을 위해 약간의 식량을 제공해주었다. 내 덕에 임무를 손쉽게 완수했으니 그 보답 차원이었다.

베일은 수천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떠났다.

로뎀 자작은 발라드 산맥 장악을 위해 베일 산적단이 쓰던 본거지로 선발대를 출발시켰다.

나는 로뎀 자작과 작별하고 레던 왕성으로 돌아갔다.

북부대로 보수공사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았지만, 일단은 집에 돌아가 휴식을 가질 생각이었다. 줄리아와 시스가 보고 싶거든. 뱃속의 아이는 잘 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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