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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3군단장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응?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루이가 문제를 제기했다.
“쿤트 백작 각하의 실력과 명성을 생각하면 겨우 일개 군단의 군단장이라는 지위는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일전에 폐하께서 왕실군 총사령관 직책을 제안하셨으나 그 역시 거절한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냐, 루이. 네 말도 일리는 있는데, 중요한 건 직책이 아니라 아버지가 지금 신혼이라는 점이라니까?
제론이 말했다.
“쿤트 백작 각하를 3군단장 겸 왕실군 부사령관의 직책을 준다면 어떻습니까, 폐하?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쿤트 백작 각하의 성격상 왕실군 총사령관보다 오히려 그 편을 더 선호하실 듯합니다.”
그 말이 옳긴 한데, 지금 아버지는 신혼이라니까?!
에릭 국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3군단을 왕실특별군으로 따로 편성하고 짐의 직속으로, 왕실군의 지휘를 받지 않는 자유지휘권을 준다면 어떻겠느냐? 쿤트 백작의 통솔력은 짐 또한 일찍이 내전 때 확인한 바 있으니 능히 감당할 만하다고 본다.”
그렇게 다들 헛된 기대를 하고 있을 때, 때마침 듀론 후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쿤트 백작은 이제 막 결혼을 했습니다. 달갑지 않게 여길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의견이 나왔다. 나 역시 이에 동의했다.
“예. 달콤한 신혼생활을 누리시는 아버지가 그러한 일을 맡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자기 영지 일도 손 뗀 지가 십여 년이 넘은 아버지에게 무얼 바란단 말인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참 후, 에릭 국왕은 한숨을 쉬며 결론을 내렸다.
“일단 제안이라도 해봐야겠군.”
그리하여 그날 오후, 에릭 국왕은 친서를 쿤트 영지로 보내게 되었다.
***
친서를 받아 읽은 바스크는 순간 그것을 찢을 뻔했다. 국왕 폐하의 친서라서 간신히 참았다. 그가 충성스러운 왕실파가 아니었더라면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군단장이고 사령관이고 절대 안 한다. 카록 녀석, 누구 결혼생활을 초장부터 망치고 싶나!”
물론 왕실특별군단의 사령관이라든지, 자유지휘권이라든지 바스크를 배려한 에릭 국왕의 특혜가 많이 보였다.
하지만 직책이야 어쨌든 3군단을 지휘하란 뜻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 직책을 맡는 동안은 3군단의 주둔지에서 지내야 한다.
이제 갓 결혼한 남자에게 새 신부 집에 놔두고 군대 가라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새 신부가 좀 예쁜가? 요즘은 어린 아내 미란다와 알콩달콩하게 지내는 맛에 사는 바스크였다.
“여보…… 그럼 이곳을 떠나 계셔야 하는 건가요?”
옆에서 미란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촉촉한 눈망울이 불안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바스크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럴 리가 있겠소? 내가 당신을 놔두고 어딜 간단 말이오.”
‘아들은 충분하니 딸도 셋 낳자고 결심한 판국인데, 군대라니?’
카록 녀석을 만나면 혼쭐을 내줘야겠다고 바스크는 생각했다. 왕실의 일이니 모두 카록의 책임이었다. 이 아비가 싫어할 걸 뻔히 알면서 이런 친서가 날아오도록 놔두다니, 얼마나 괘씸한가.
……물론 그 막둥이 아들이 지금은 워낙 강해진 탓에 대련을 빙자해서 혼쭐을 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다만 잔소리를 좀 해줄 참이었다.
그런데 미란다가 말했다.
“정 가야 하신다면 저도 함께 갈게요. 왕실군 군단장들은 군단장 관저에서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 말에 바스크는 감격했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내인가?
왕실군의 군단장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군단장의 관저라면 생활에는 문제가 없겠으나, 아무래도 군대이다 보니 귀족인 가족들로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스크는 미란다가 더욱 예뻐 보였다.
“무슨 소리요? 군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옥의 땅(?)에 당신을 데려갈 리가 없잖소. 이 제안은 거절할 테니 염려 놓으시구려.”
“폐하의 요청인데 거절해도 괜찮나요?”
“끙, 폐하께는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소. 폐하께서도 이해해주실 것이오.”
나름 충성스러운 귀족인 바스크였는지라 양심에 찔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육제후를 견제할 만한 대응카드로 자신만한 강자가 없다는 것을 바스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부와 권세를 거머쥔 육제후에게 약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강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돈으로 군대를 키우고 용병을 고용할 수는 있어도, 진짜 강자는 살 수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다스리는 바덴 강 유역은 워낙 평화롭고 번영한 땅이라 그들의 군대는 봉급만 높지 정신 상태는 영 썩어먹은 약졸들이라 오합지졸의 대명사로 여겨질 정도였다.
오러 마스터는 육제후에게는 없는 절대무인인 점에서 훌륭한 압박카드가 되는 것이다. 수년 전 바덴 강 통행세 협상 때 뮤트 공작이 할슈타인 백작과 대련을 벌였던 것도 육제후에 대한 시위 성격이 강했다.
‘끄응. 오러 마스터가 한 명만 더 있었어도 되었을 텐데…….’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달래던 바스크는 문득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대체자가 있었다.
지금 오러 마스터가 될까 말까 하는 ‘자칭 검술 천재’ 녀석이 자신의 개인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이 오러 마스터가 되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이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과 달리 전쟁 경험이 부족한 릭은 분명 3군단장 직책을 좋은 기회로 여길 터였다.
물론 ‘역시 난 천재였다’며 잘난 체 할 꼴을 상상하니 약간 아니꼽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들이 잘 되면 아비인 자신도 기쁜 법이었다.
모종의 결심을 한 바스크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릭 녀석의 수련을 도와야겠소.”
그리고 그날부터 바스크는 릭의 수련을 돕기 시작했다.
***
릭은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었다.
카록과 싸우는 륭겐 후작을 보면서 얻었던 그 기묘한 느낌! 왠지 그가 보여준 무위가 이해되었던 그 공감이 사라질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때 얻었던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릭은 매일 기억을 붙들고 살았다.
방해될까봐 두려워서 수련장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잠도 잘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릭은 오로지 명상에만 몰두한 채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출입을 금한 탓에 식사를 가져다줄 사람도 없어서 굶주렸다. 잠을 잘 수 없어서 정신적으로 나날이 피폐해졌다. 하지만 릭의 눈빛은 여전히 꺾이지 않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갈증과 허기로 신경이 날카로워질수록 맹수의 눈처럼 흉포해져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쯧쯧쯧, 누가 내 아들 녀석 아니랄까봐. 너도 그러고 있었느냐?”
순간 릭은 명상을 방해한 자에게 살기를 쏟아내었다. 하지만 방해꾼은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그제야 릭은 자신의 아버지를 알아보았다.
“뭡니까.”
릭은 퉁명하게 말했다.
“먹고 해라.”
바스크는 접시에 담아온 빵과 우유를 내려놓았다.
“먹고 싶지 않습니다. 당장 나가주십시오.”
“왜? 간신히 잡은 끈을 놓칠까봐 두려우냐?”
정곡을 찌르는 아버지의 말에 릭은 눈을 부릅떴다.
“그걸 알면 갖고 꺼지란 말입니다!”
극도로 날카로워진 릭은 아버지에게 예를 갖출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바스크는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한 대 쥐어박았다.
퍽!
“악!”
“놀고 앉았네. 일단 먹으라니까?”
“아 쫌!”
릭이 짜증을 부리자 바스크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혀봐야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다. 그 실낱같은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집착해봐야, 결국은 과도한 집착 속에서 변질될 뿐이다. 내가 얼마 전에 경험한 일이니 이 애비 말 좀 믿어라.”
그제야 릭은 하는 수 없이 명상을 중단했다. 그리고는 우유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빵을 씹어 삼키니 굶주림이 사라져갔다.
깨끗이 먹어치운 릭은 바스크를 빤히 보며 물었다.
“겨우 빵하고 우유입니까? 이왕 가져올 거면 제대로 된 식사를 가져올 것이지…….”
퍽!
바스크는 한 대 더 쥐어박았다.
“이놈아! 애비도 그거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 어쩔래?! 나름 의미가 있단 말이다!”
“뭡니까 그게. 이왕이면 멋지게 검무를 추다가 깨닫지 못할망정, 궁상맞게 빵 한 쪽 먹고, 쯧쯧.”
바스크는 얄미운 아들놈을 태도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더 때리면 평소처럼 티격태격 싸우다가 수련이고 뭐고 끝나버릴 것 같아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