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271화 (271/529)

<-- 271 회: 11권 - 8장. 의도 -->

***

하아, 결국 죽이지 못했다.

죽이겠다고 독하게 마음은 먹었지만, 륭겐 후작의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자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정당하지 못한 살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상으로 나갔다.

아이고, 눈 따가워라.

땅속에 계속 있다가 햇볕을 받자 너무 눈부셨다. 거기다가 정령친화력의 소모도 어마어마해서 머리까지 띵했다. 이러다가 금방이라도 뻗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륭겐 후작의 몰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륭겐 후작은 나의 총공세를 받아내면서 갑옷이 너덜너덜해졌다. 비유하자면 먼지 나도록 맞았다는 표현에 매우 적합한 모습이랄까? 아하하.

“멋진 작전이었다. 너는 오러 마스터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패배를 선사한 장본인이다. 정령사만이 할 수 있는 훌륭한 두더지 전법이었어.”

“두더지 전법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지하대피전법이요.”

“그게 그거잖아. 좋다, 이제부터 널 두더지 백작이라고 불러주지.”

그렇게 부르지 마!

나 역시 입담으로는 지지 않는다.

“패배자라고 불러드릴까요?”

“……피차 쓸데없는 별명은 만들지 않기로 하지.”

“좋습니다.”

흐흐, 이겼다.

륭겐 후작은 날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튼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군.”

“어떤 게 말입니까?”

“뭐,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겠지. 도중부터는 진심으로 날 죽일 결심을 한 모양이던데?”

“하하…….”

아, 찔린다.

“게다가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다. 무인으로서 아직 더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 참, 축하해주러 와놓고서는 오히려 내가 좋은 선물을 얻어가는군.”

“꼭 그렇지만도 않소.”

아버지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멋진 대결이었소.”

“뭘. 신나게 난타당하기만 했는데.”

“우리 릭도 그 무위를 견식하고는 배운 바가 있었던 모양이오.”

“릭이?”

놀란 륭겐 후작에게 아버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무언가 감을 잡았다면서 내 수련장을 한동안 빌리겠다고 했소.”

“뭣?!”

그 말에 륭겐 후작은 물론 나까지 놀랐다.

“이곳에 함께 오면서도 릭에게 가르침을 많이 내려줬던 모양인데, 아비로서 감사를 표할 따름이오. 쿤트 가문이 큰 선물을 얻었소.”

아무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릭 형님이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는 힌트를 얻은 모양이었다.

원채 어릴 적부터 천재로 주목 받았던 릭 형님이었기에 나는 무척 기뻤다. 릭 형님이라면 분명히 아버지처럼 강한 무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 경박한 성품을 보면 오러 마스터가 된다 해도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달지 못할 테지만.

륭겐 후작은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 녀석이 기연을 얻었다고? 이런, 정말 과한 선물을 줘버렸는데. 돌아가면 폐하께 혼나겠어.”

“아무튼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연회장으로 돌아가 한 잔 하는 게 어떻소?”

“그거 좋지. 레던 왕국의 오러 마스터와 술잔을 기울일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아버지와 륭겐 후작은 함께 연회장으로 향하였다. 그제야 구경꾼들 또한 이제 볼거리가 다 끝난 걸 알고는 무투장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륭겐 후작과 싸우느라 많이 부서진 무투장을 다시 보수하느라 정령친화력을 또 소모해야 했다. 약간 현기증까지 느껴지는 걸 보니 오늘은 이만 쉬어야 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몇몇 무인들밖에 안 남은 무투장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라? 에반?”

“주군, 여기 계셨군요.”

“여긴 웬일이야? 에이,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좋은 구경 했을 텐데 아깝겠네.”

“그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에반이 여기에 나타난 걸 보면 날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내 방으로 가자.”

“예.”

당장이라도 곯아떨어지고 싶었지만, 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귀찮음을 꾹 참고 에반과 함께 걸었다.

***

손님이 너무 많은 탓에 달리 조용한 장소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에반을 우리 부부의 침실로 배정받은 숙소로 데려왔다.

“한 잔 할까? 괜찮은 포도주가 있어.”

“좋습니다.”

나는 퀸즈 블러드를 꺼냈다. 대표적인 적포도주의 최고봉. 물론이지만 린델 백작가에서 훔쳤던 것이었다. 맛을 음미할 때마다 린델 백작에 대한 고마움을 상기하도록 하자.(그러고 보면 린델 백작은 내게 뜯긴 게 무지 많다.)

원채 명주이고 운디네가 솜씨를 발휘한 터라 맛이 더욱 좋을 것이다.

에반은 와인글라스를 들고 한 모금 입에 흘러 넣었다. 한동안 잠시 침묵을 지키며 맛을 음미하나 싶더니, 문득 에반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안타레스 백작의 문제 때문입니다.”

“안타레스 백작에게 뭔가 움직임이 있었어?”

“그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반의 설명은 이러했다.

내 지시를 받고 에반은 사람을 풀어서 안타레스 백작가에 몇몇을 하인으로 침투시켰다. 안타레스 백작이 누구를 만나는지 철저하게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혼트 황실의 첩자들이 안타레스 백작가에 숨어들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안타레스 백작가는 육제후의 한 가문이니 혼트 황실의 첩자가 숨어 들어온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에반은 첩자를 더 침투시켜서 혼트 황실의 첩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파악했다.

놀랍게도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카르스 황제가 안타레스 백작가에 대하여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상대측 역시 에반이 지휘하는 첩보조직의 존재를 눈치 채버렸다.

결국 서로 간에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졌다.

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거나 거짓정보를 흘리는 등 음지에서 첩자들은 피 말리는 싸움을 했다.

다행히 에반이 안타레스 백작가 문제에 대하여 직접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던 덕분에 감시망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 혼트 황실이 안타레스 백작과 접촉했을까?”

“저희가 감시하고 있어서 접촉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행이네.”

나는 안도하였다.

카르스 황제가 벌써 안타레스 백작에게 손을 써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제길, 타이밍이 너무 좋다.

마침 안타레스 백작도 딴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양측이 접촉해버리면 아주 호흡이 척척 맞아서 꿍꿍이를 꾸밀 터였다. 전생 때도 그렇게 안타레스 백작이 카르스 황제에게 놀아난 것이리라.

에반은 와인글라스를 완전히 비우고는 말했다.

“안심하시기는 아직 이릅니다. 제 생각에 아마 오늘 안타레스 백작이 혼트 황실이 보낸 사람과 접촉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뭐?!”

나는 기겁을 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하필이면 쿤트 백작가에서 양측이 접촉했다니? 그것도 내가 있는데 말이다.

“륭겐 후작과 대결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야 물론…… 아차!”

그제야 나는 에반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상급 정령사인 나는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시할 수 있었다. 정령들과 감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안타레스 백작은 내가 특별히 주의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륭겐 후작과 싸우는 동안에는 다른 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륭겐 후작은 이곳에 시종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곧잘 홀로 떠돌곤 하는 그의 평소 성품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지요.”

“의도가 바로 이거였군!”

혼트 황실은 나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수집하니, 아마 상급 정령사로서의 내 능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터.

륭겐 후작은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대결을 신청한 것이다.

나와 실컷 싸우는 동안, 그가 데려온 시종은 안타레스 백작과 접촉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륭겐 후작과 싸울 때, 무투장에 안타레스 백작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미리부터 안타레스 백작을 감시하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양측이 접촉하는 것을 전혀 모를 뻔했습니다.”

휴우, 그건 그렇지.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알면 미리 대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안타레스 백작이 오판하지 않도록 회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육제후들까지 동조하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안타레스 백작에 의해 육제후 전원이 혼트 제국 쪽으로 홀랑 넘어가 버리면 그야말로 이 나라의 위기였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안타레스 백작을 직접 만나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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