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회: 11권 - 8장. 의도 -->
정령들과 공유하고 있는 예민한 감각을 통해서 나는 륭겐 후작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했는지 파악했다.
움직임은 점점 간결해지고 오러를 소모하는 효율이 극도로 높아졌다.
륭겐 후작이 버티기 작전으로 나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정령친화력이 먼저 소모되지 않고서는 그가 이길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판단.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륭겐 후작은 참으로 운이 없었다.
내게 상급 정령이 노움밖에 없었을 때라면 륭겐 후작의 승리였을 텐데. 륭겐 후작이 오러를 사용하는 효율은 내 정령친화력 소모량보다 훨씬 탁월했다. 그랬으면 륭겐 후작은 차분하게 시간을 끌고, 오히려 내가 빨리 결판을 짓기 위해 안달복달했겠지.
하지만 운디네까지 상급 정령으로 진화하면서 나 역시 정령사로서 진화했다. 정령친화력은 그때보다 더 많아졌다.
이런 소모전이라면 내가 더 유리한 것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이대로 륭겐 후작의 오러가 바닥나서 항복할 때까지 소모전을 계속 하는 것.
그리고 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서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
물론 나는 전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여라.
아버지의 그 말 때문에 나는 번민했다.
나도 안다.
이 자리에서 륭겐 후작을 죽이는 편이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이 한 사람 죽인다고 뭐가 그리 크게 달라질까마는, 흑십자 기사단의 로드이자 오러 마스터인 륭겐 후작의 죽음은 혼트 제국에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
적진을 무참히 돌파할 수 있는 륭겐 후작의 존재는 명 전략가인 카르스 황제에게 더 많은 전술적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으니까. 전생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거라고는 분노밖에 없다. 그래서 성인군자가 아님에도 나는 그런 신념을 지켰다.
그것이 내가 카르스 황제를 살해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린델 백작을 죽이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정당한 대결이라면 어느 한 쪽이 죽더라도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닌가?
그러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륭겐 후작을 죽이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게다가 륭겐 후작은 지금껏 수많은 사선(死線)을 넘나든 무인 중의 무인. 그런 대단한 상대이니 내가 굳이 죽이면 안 된다고 배려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속내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무리하게 대결을 신청한 쪽 또한 륭겐 후작이었다.
나는 결심을 굳혔다.
좋아.
오만해지지 않겠어. 난 그를 죽일 각오로 싸우겠다. 그뿐이야. 그가 죽을지 살지는 운명에 달린 일이야.
나는 정령친화력을 대폭 쏟아 부었다.
***
“하늘을 봐!”
“저, 저런!”
“어떻게 저런……!”
모두를 경악시킬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에 둥실 떠 있는 50자루의 워터 스피어. 그 물의 창날은 정확하게 륭겐 후작을 겨냥한 상태였다.
이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녀석. 결심했군.’
바스크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사실 륭겐 후작의 죽음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적국의 강자를 한 명 줄이자는 얄팍한 생각은 바스크의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싸움의 승패여부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다. 적이 너무 강해서 졌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오러 마스터가 되면서 깨달은 이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왜 카록에게 죽이라고 넌지시 일렀을까?
그 이유는 바로 저것.
바스크가 아들 카록에게 진정 원한 것은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이었다.
상재와 판단력, 정령술 등 어디 하나 모자람 없는 셋째 아들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는 투지(鬪志)였다.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잔인함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다만 승부가 시작되었을 때, 온힘을 다해 적을 가차 없이 쳐부술 각오가 필요했다. 승패의 갈림길에서 배려 따윈 필요 없었다. 그따위 아량은 이긴 후에나 생각할 문제였다.
바스크는 그런 점을 카록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죽여라. 죽일 각오로 싸워라. 그것이 혼트 제국의 황제와 펼칠 싸움을 위하여 네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이다.’
한편으로는 바스크 역시 오싹오싹 몸이 떨려왔다.
저런 무서운 맹공으로부터 자신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들 때마다 바스크는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무인이었던 것이다.
***
륭겐 후작은 잠시 멍해졌다.
하늘에 수놓인 50자루의 물의 창을 보자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네 개의 골렘도 상대하기 벅찬데 저런 총공세라니!
날카로운 창날에 담긴 살의(殺意)가 따갑게 피부를 찔렀다.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는 50개의 죽음 앞에서 륭겐 후작은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놈이 날 죽이려 하는군. 이제야 진심으로 해보겠다는 것이냐.’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확 와 닿았다.
그게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륭겐 후작은 웃었다. 광포한 미소를 띤 륭겐 후작은 오러 블레이드에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벼랑까지 몰아세워질수록 더욱 타오르는 것이 무인이었다.
륭겐 후작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생애 최고로 강해진 상태임을 느꼈다.
카록 리간드 덕분이었다. 자신의 숨겨진 100%를 전부 쥐어짜낼 수 있도록 그가 도와준 것이다. 그래서 륭겐 후작은 오히려 그가 고마웠다.
‘전부 타오르는 이 느낌을 기억해두자. 이것이 내 전심전력이다.’
지금껏 한 번도 혼신의 힘을 발휘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륭겐 후작은 깨달았다.
늘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지금에야 알았다.
이 대결이 끝나면 조금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륭겐 후작은 생각했다.
물론, 무사히 목숨을 부지했을 때의 일이었다.
“와라!”
륭겐 후작의 포효가 신호가 된 것일까.
50자루의 워터 스피어가 일제히 그에게 날아들었다. 동시에 골렘들도 덤벼들었다. 그 까마득한 총공세 앞에서 륭겐 후작 또한 오러 블레이드를 힘차게 휘저었다.
콰르르릉―!
어마어마한 격돌이었다.
오러 블레이드의 충격파에 충돌할 때마다 워터 스피어는 수증기로 기화하면서 뿌연 안개를 만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어찌나 여파가 큰 격돌이었는지, 지켜보던 바스크가 오러를 발출해서 구경하는 손님들을 보호해야 할 지경이었다.
워터 스피어는 10개씩 계속 만들어져 륭겐 후작을 괴롭혔다.
륭겐 후작은 자신을 태우는 촛불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오러 블레이드에 오러를 쏟아 부었다. 점점 위태로워졌지만 륭겐 후작의 투지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약 40초 후에 승패를 결정짓는 승부수가 카록에게서 나왔다.
륭겐 후작의 발밑에서 은밀히 생성된 어스 핸드. 그 흙의 손이 륭겐 후작의 발목을 잡아챘다.
“크으윽?!”
륭겐 후작의 신형이 잠시 비틀거렸다.
아주 잠시였다.
이내 다리에 오러를 흘려 넣어 어스 핸드를 짓밟아버렸지만, 끊겨버린 그의 호흡과 흐름은 만회할 도리가 없이 치명적이었다.
그 순간, 륭겐 후작은 아득한 죽음을 느꼈다.
이대로 죽는 것인가?
륭겐 후작은 버럭 소리쳤다.
“졌다!”
거짓말처럼 워터 스피어들이 그의 지척 앞에서 정지했다. 골렘들의 움직임도 멎어들었다. 그 격렬했던 싸움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했다.
륭겐 후작은 허탈한 한숨을 쉬더니 킬킬거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나의 패배다. 내가 졌어.”
륭겐 후작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카록의 승리가 선언된 것이었다.
“와아아아!”
“리간드 백작이 이겼다!”
“흑십자 기사단의 륭겐 후작을 꺾었어! 대단해!”
“륭겐 후작도 굉장했어!”
다시 보기 힘든 일대결전을 똑똑히 지켜본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열광했다.
륭겐 후작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명승부였든 어쨌든 진 건 진 거였다. 그는 화풀이하듯이 땅을 쿵쿵 밟았다.
“어이! 자네가 이겼으니까 이제 그만 기어 나오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