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 회: 11권 - 7장. 륭겐 후작 -->
“자, 리간드 백작. 설마 이대로 발을 빼는 건 아니겠지?”
“저와 겨루는 것은 재미가 없으실 텐데요.”
“그럴 리가.”
“정말 재미없을 겁니다.”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지!”
륭겐 후작은 급기야 투 핸드 소드를 뽑아들며 외쳤다. 그의 기세에 연회장에 다시금 험악한 기류가 흐르자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좋아.
이참에 대 오러 마스터용 전법을 써먹어봐야겠군. 진짜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도 효율이 있는지 실험해봐야겠다.
“좋습니다. 그럼 무투장으로 가시죠.”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륭겐 후작은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륭겐 후작과 함께 무투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에 있던 손님들이 우르르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신나는 구경거리는 놓치지 않는 게 인간의 습성 아닌가.
***
릭은 카록과 륭겐 후작의 대결을 보기 위해 뒤따랐다. 그런데 문득,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쿡쿡 찔렀다.
위를 올려다보니, 황금빛으로 빛나는 열네 살 남짓한 소녀가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노움?”
-응.
“나한텐 무슨 볼일이냐?”
-아빠가 ‘륭겐 후작에게 제 상급 정령술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려줬습니까?’ 라고 전해달래.
“그야 내가 아는 대로 다 알려줬지. 관심이 많더라고. 그 대신 나는 오는 동안 륭겐 후작에게 검술을 지도 받았고.”
-아빠가 ‘전부?’ 라고 전해달래.
“물론이지. 이 사나이 릭 쿤트, 숨길 게 아무것도 없거든.”
그러자 노움은 조막만한 주먹으로 릭의 머리를 쿵 때렸다.
퍼억!
“크억! 뭐, 뭐냐!”
-아빠가 한 대 때리래.
“크악! 죽을래?!”
길길이 날뛰는 릭을 무시하고 노움은 카록에게 돌아갔다.
***
“수고했어, 노움.”
-응, 아빠.
노움은 내 어깨 위에 폴짝 올라탔다. 그런 노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적국의 오러 마스터에게 내 정령술에 대해서 나불나불 떠들었군. 저걸 형님이라고!
자, 정리해보자.
륭겐 후작은 릭 형님의 동행을 허락했다. 함께 오면서 내 정령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했다. 릭 형님은 사나이답게 숨김없이 아는 대로 다 알려줬다.
그리고 륭겐 후작은 나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긴 한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왜 아버지와의 대결을 관두고 대신 나를 택했지?
무인은 대개 마법사나 정령사를 싫어한다. 무인이 가장 좋아하는 상대는 검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같은 무인이다. 순수한 무(武)로서 우열을 겨루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륭겐 후작은 처음부터 나와 싸울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건 카르스 황제가 굳이 륭겐 후작을 이곳에 보낸 이유와 같은 맥락일 터.
혹시 날 죽이려 하나? 대결을 빙자해서 날 살해하려는?
아냐, 아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건 카르스 황제의 방식치고는 치졸하고 탁월하지도 않았다. 륭겐 후작과 나 둘이 싸워서 누가 이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괜한 수작으로 흑십자 기사단의 단장을 잃을지도 모르는 짓을 할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면…….
“오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륭겐 후작의 감탄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투장을 둘러보며 륭겐 후작은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드넓은 수련장에서 수많은 무인이 서로 대련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서로 친해졌는지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는 이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막 낮잠에서 깨어났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검을 들고 숙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먹고 자고 싸우며 노는 무인들의 천국이었다.
“내가 혼트 제국의 귀족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이곳에서 살았을 것이다!”
륭겐 후작의 감탄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끝내주는 아이디어였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이 무투장이었다.
이번 파티가 끝난 후에도 무투장은 여전히 무인들로 가득할 것이다. 손님으로 지내면서 서로 무예를 겨루며 자신의 이름까지 알릴 수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명성까지 더하면, 뮤트 공작가의 ‘템플 오브 나이트’처럼 이곳 또한 무인들의 성지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스란히 쿤트 가문의 명성으로 이어지니, 나는 아버지의 결혼 축하 선물로 매우 귀중한 것을 준 셈이었다.
“이런 무대까지 있으니 우리가 실력을 겨루지 않을 수가 있겠나! 크하하!”
륭겐 후작은 오러를 잔뜩 끌어올려 기세를 내뿜으며 수련장의 중앙으로 걸었다.
무서운 기세가 인근을 장악하자 수련장의 무인들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황급히 물러났다.
“자, 와라! 리간드 백작!”
륭겐 후작은 검정색 투 핸드 소드에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켰다. 일순간 무인들은 숨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오러 블레이드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저 강력함을 숭배하여서 무(武)에 매진한 것이 아닌가.
나는 겁먹지 않고 그의 앞에 나섰다. 노움은 내 어깨 위에, 운디네와 샐러맨더는 각각 내 체액과 체온에 깃들어 있었다.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노움에게 마음속으로 미리 지시를 내렸다.
내 생각을 전달받은 노움은 땅속 50미터 깊이에 직육면체 모양의 빈 공간을 만들었다. 일명 지하대피소라고나 할까?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저기로 달아나면 된다.
륭겐 후작, 댁이 삽질의 마스터가 아닌 한 나를 위협할 수는 없을걸!
……조, 조금 비겁하긴 하지만 나는 무인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자.
그런데 그때, 아버지가 걸어 나와 중앙에 섰다.
“대결이 시작되기 전에 두 사람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아놓아야겠군. 이 대결은 상호간의 협의로 이루어진 정정당당한 것이며, 외부의 개입이 없는 한 어떤 불상사도 감수할 것을 약속하시오.”
륭겐 후작은 피식 웃었다.
“약속한다.”
나도 말했다.
“약속합니다.”
“좋소. 이 대결의 승패에 대해서는 이 바스크 쿤트 백작이 증인이 되겠소.”
그렇게 선언한 후, 아버지는 수련장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날 쳐다보며 아버지는 입술만 움직여서 은밀히 나에게 일렀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죽여라.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죽이라고? 륭겐 후작을 이 자리에서?
물론 륭겐 후작은 우리의 적인 혼트 제국의 오러 마스터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면 혼트 제국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승패는 붙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만, 노움에 이어 운디네까지 상급 정령으로 진화한 이상 지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속내야 어쨌든 축하를 위해 찾아온 그를 죽이라니…….
그때였다.
“자, 간다!”
륭겐 후작은 버럭 포효하고는 단숨에 나에게 돌격해왔다.
이런!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땅속으로 피신할 틈을 놓쳐버렸다. 오러 블레이드가 서린 투 핸드 소드가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파앗!
나는 급히 하늘로 솟구쳤다.
내가 있던 자리를 오러 블레이드가 지나갔다. 바람을 찢어발기는 소음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륭겐 후작은 이어서 하늘을 향해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올렸다. 나는 계속 위로 날아오르며 물의 창 20개를 만들었다.
물의 창 20개가 사방에서 날아들자 륭겐 후작은 오러 블레이드를 베어 올리며 한 바퀴 회전했다. 마치 회오리치듯이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치며 물의 창들을 모조리 박살내었다.
창의 파편이 물보라가 되어서 비 내리듯 사방을 적셨다.
“어떻게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지? 그것도 정령술인가?”
“운디네로 체내의 수분을 조종합니다.”
“그렇군. 재미있는데!”
륭겐 후작의 웃음이 점점 흉포해졌다.
제길. 진즉 땅속으로 숨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네.
방심할 상대가 아니니까 나도 이제 전심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