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회: 11권 - 1장. 리간드 백작가의 저택(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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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왕궁 복도를 거닐었다.
“어떠셨습니까, 아버님? 국왕 폐하와의 측근들의 회의를 본 소감이.”
“여러 가지로 놀라웠다.”
내 물음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먼저 젊은 폐하와 그 휘하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서 확고한 방향성을 갖고 추진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열정적이어서 좋았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 카록 네가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 별 말씀을요. 아버님이야말로 왕실군 총사령관이 되셨으면 한 끗발 날리셨을 텐데 아쉽지 않으십니까?”
“알면서 그러는구나. 이 아비는 새 장가가 더 시급하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기세라면 내 동생이 태어나는 것도 먼 일이 아니겠군. 조카보다 어린 동생이라니, 쿤트 가문의 족보가 살짝 걱정되는구나. 하지만 이제 난 쿤트가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 아하하.
아버지는 오랜만에 레던 왕성에 온 김에 함께 거리를 구경하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선술집에서 맥주잔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에릭 국왕에게 하사 받은 보검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좋아하셨다. 난생 처음 얻은 미스릴 롱 소드인 데다가, 국왕에게 직접 하사 받은 만큼 그 가치가 더 각별한 것이었다.
“하핫,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다마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일전에 뮤트 공작 전하께 검을 선물하지 않았더냐.”
“예. 그 바람에 카록 병기점이 유명세를 탔죠.”
“알고 보니 뮤트 공작 전하께서는 새로운 검이 생기자 원래 쓰시던 것을 릭 녀석에게 줬다고 하더구나. 뮤트 공작 전하께서 쓰시던 검이라니! 내색은 하지 않았다만 질투가 나서 열불이 뻗치더구나.”
아하하.
여전히 릭 형님과는 옥신각신하시는 모양이다. 서로에게 라이벌의식을 느끼는 부자라니, 쯧쯧.
“릭 형님도 아버님의 성취에 질투하셨을 텐데요.”
“크흐흐, 당연하지. 멋지게 릭 녀석의 콧대를 눌러주고 왔다. 이제 약자는 상대하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왔다. 분해서 죽으려고 하더구나, 크하하! 만날 자기가 천재라고 잘난 체를 하면서 날 범재라고 비웃더니, 꼴좋다!”
아버지는 호쾌하게 웃으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버지 성격에 릭 형님을 마음껏 깔아뭉갰을 것이 틀림없었다. 가여운 릭 형님. 돌아버릴 정도로 분개한 릭 형님은 아마 지금쯤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하고 있겠지. 하지만 오러 마스터라는 경지가 열심히 한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니 무진장 고생할 것이다.
“그나저나 카록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뭘 어떻게 해요?”
“뭐긴. 이제 이 나라의 미래는 네 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으냐.”
잠시 생각을 해본 뒤에 나는 입을 열었다.
“일단은 왕실 내부를 재정비해서 손발이 잘 맞는 조직으로 만들어야지요. 그 뒤에는 왕실 재정 확충에 주력할 생각입니다.”
육제후파가 레던 왕실을 압도한 것은 바덴 강에서 나오는 엄청난 자금력 덕분이었다. 육제후가 독식하고 있는 부를 천천히 왕실파가 포진해 있는 중부 및 북부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육제후와의 원활한 소통도 이루어져야 한다.
육제후와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수록 웃는 것은 혼트 제국이다. 전생 때와 마찬가지로 카르스 황제가 육제후를 꼬드겨서 레던 왕실과 분리시킨 후 각개격파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레던 왕실이 무너지고 나면 육제후 또한 멸망시킬 테지.
대륙 정복에 있어서 바덴 강은 경동맥이라 할 정도로 중요한 보급로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바덴 강 유역을 육제후 같은 못미더운 인간들에게 맡겨놓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미 전생에서 카르스 황제가 보여준 절차였다.
“아버님의 혼인을 계기로 란즈헬 백작가와의 관계 개선도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제이슨 란즈헬을 통해서 육제후와의 갈등을 줄여나가고 양측이 화합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란즈헬 백작가는 사돈지간이 될 테니 그렇다 쳐도, 린델 백작 같은 못미더운 놈들과 화합해야 한다니 참…….”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다.
투철한 왕실파인 아버지는 당연히 돈 좀 있다고 왕실에 반하는 육제후가 마음에 들지 않을 터.
“이미 지난 과거입니다. 양측의 골이 깊어져서 힘을 모으지 못하면 혼트 제국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리엔 왕국과도 동맹을 맺은 마당에 그렇게까지 혼트 제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느냐?”
“아버님, 경각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오러 마스터가 되셔서 세상 무서울 게 없으시겠지만, 혼트 제국의 국력과 야욕은 몇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끄응, 나라고 왜 모르겠느냐. 알겠다. 나도 란즈헬 백작가와의 관계에는 신경을 쓰도록 하마. 정치야 아서가 알아서 잘 하겠지.”
음, 그것이 정답이군.
아버지는 싸움질 말고는 그냥 손 놓고 아서 형님께 모든 걸 맡기는 게 상책이다.
밤늦게까지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쿤트 영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알뜰살뜰한 줄리아가 아버지를 위해 말을 준비시켜놓았다.
“그러고 보니 돌아갈 때를 생각 못했구나.”
달랑 말 한 필을 타고 돌아가게 된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와 함께 맨몸으로 그냥 날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줄리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버님, 역시 마차를 구해드릴까요?”
“하핫, 아니다. 그러고 보니 혼자서 홀가분하게 말 타고 다녀본 지도 꽤 오래 되었구나. 오랜만에 여행 다니는 기분을 만끽해보련다.”
“딴 길에 빠지지 마시고 집에 돌아가셔야 합니다. 곧 새신랑이 되셔야 하니까요.”
나의 당부에 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염려 마라! 내가 어린애냐?”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어린애니까 문제지.
그렇게 아버지는 말에 올라타 줄리아가 챙겨준 여행 가방을 매고 길을 떠나버렸다.
“여보, 이제 우린 뭘 하죠?”
“배고파.”
줄리아와 시스가 말했다.
나는 웃으며 시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실력 좋은 건축업자를 알아보자.”
“우리가 살 집을 지으시게요?”
줄리아가 눈을 반짝거렸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정령술을 발휘하면 금방 완공할 수 있을 거야.”
“왕궁처럼 화려한 저택을 지어요!”
“……진짜 왕궁처럼 거대하게 짓자는 뜻은 아니지? 국왕이 있는 레던 왕성 옆에다가 왕궁만큼 화려한 저택을 짓는 신하라니, 두고두고 욕먹을 짓이라고.”
“호호호, 누가 그렇게 큰 저택을 바라나요? 작아도 예쁘게 짓자는 거죠.”
“뭐, 여기에는 실력 있는 건축업자가 많으니까 네 취향에 맞는 저택을 함께 설계해보자고.”
우리는 함께 식사를 한 뒤에 사람을 시켜서 건축업자를 물색했다
일단은 땅 중개업자인 라크 니벨 영감을 찾아갔다. 니벨 영감은 레던 왕성에서 잔뼈가 굵은 중개업자로 우리 집안의 집사로 내정한 인물이었다.
“오오, 백작 각하! 승작 소식은 들었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니벨 영감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고마워. 많이 기다렸지? 집사로 고용하겠다고 해놓고서는 오랫동안 방문하지 못했네.”
“별말씀을요. 큰일을 하시는 분이니 공사다망하신 것도 당연하지요.”
“니벨 영감님, 오랜만이에요.”
줄리아도 니벨 영감에게 알은체를 했다.
“오오, 억척스런 레스토랑 여사장 줄리아! 이제는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니벨 영감은 줄리아를 몹시 반가워했다.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나는 질문을 했다.
“혹시 솜씨 좋은 건축가를 알고 있어?”
“솜씨 좋은 건축가야 이곳에 많지요.”
“최고의 저택을 설계할 수 있는 자를 원해.”
“그렇군요. 이곳에는 뛰어난 건축가가 많지만, 최고라고 칭할 수 있는 건축가라면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역시나 니벨 영감은 평생 레던 왕성에서 활동한 땅 중개업자답게 최고의 건축가를 알고 있었다.
“누군데?”
“동쪽 지역에 로버트 파오니 남작이라는 인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구설수에는 많이 오르내립니다만, 대륙을 통틀어도 최고라 할 만한 재능을 가진 건축가이지요.”
“로버트 파오니 남작?”
그 정도로 대단한 건축가라면 나도 전생 때 들어봤을 텐데 이상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