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회: 10권 - 10장. 인사격변 -->
“온몸을 바쳐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버지는 감격하여서 보검을 받으며 소리쳤다.
뮤트 공작과 대련하다가 검을 부러뜨려먹은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에릭 국왕은 그 점을 생각하여서 더없이 훌륭한 상을 내린 것이다.
역시나 에릭 국왕!
용인술에서는 놀랄만한 비범함을 발휘하는 그였다.
에릭 국왕은 이어서 날 보았다.
“카록 리간드 자작.”
“예, 폐하.”
“그대는 놀라운 식견과 재치로 수많은 공적을 쌓아왔으며, 특히나 이번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 성사는 그대의 능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그대의 공로를 치하하는 바, 그대를 백작에 임명한다.”
“폐하의 은총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또한 그대를 외교부 부상서의 직책에서 해임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재상 보좌로서의 업무에만 충실하도록 하라.”
이제야 에릭 국왕의 인사발령의 전모가 밝혀졌다.
에릭 국왕은 나를 차기 재상으로서 듀론 후작을 보좌하며 재상의 업무를 익히게 할 참이었다.
조만간 듀론 후작이 연로하여서 은퇴하게 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재상 직을 이어받아 매끄럽게 국정을 주도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즉 ‘재상 보좌’란 직책이란 실질적인 재상 직을 뜻했다. 다만 아직 국정에 익숙하지 못한 날 위해 듀론 후작이 은퇴를 미루고 남아서 날 지도해주는 것뿐이다.
“그 이하 관직에 대한 인사발령은 조만간 공문으로 각 부서에 전달될 것이다. 새로이 임명된 자는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그렇게 에릭 국왕은 국정회의를 끝맺었다.
***
“모두 모였는가?”
안타레스 백작령.
안타레스 백작가의 저택.
육제후의 일가(一家) 안타레스 백작가의 저택에서 다섯 명의 남자가 모였다.
원형 테이블에 다섯 남자는 일정 간격으로 앉았는데, 유독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쯧쯧. 란즈헬 백작가는 빠졌군.”
“여섯 중에 하나가 빠지게 되다니. 톱니바퀴의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군.”
그들은 바로 육제후.
란즈헬 백작 제이슨을 제외한 5인이 모두 모인 것이다. 물론 린델 백작이 모임을 요청한 탓이었다.
본래는 모임을 요청한 린델 백작의 저택에서 집결해야 옳았지만, 린델 백작은 성벽이 형편없이 파괴된 린델 성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마침 그 사정을 알고 안타레스 백작이 자신의 저택에서 모이자고 제안을 했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린델 백작은 기꺼이 동의했고 다른 이들도 불만이 없었다.
“란즈헬 백작가야 요즘 바스크 쿤트에게 여동생을 주려고 하고 있잖나.”
“부친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지는 알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불참하면 안 되지.”
“육제후의 배신자라고 매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싶네만, 그래도 살짝 서운하군.”
“이러다가 란즈헬 백작가가 아예 왕실파로 전향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군.”
“설마.”
“아무리 젊어서 혈기가 지나친 제이슨이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네만.”
“혹시 모르지 않은가. 왕실의 실세인 카록 리간드와 합작투자나 하려 들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카록 리간드 그 친구는 건드리는 사업마다 성공을 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그 친구가 투자하려는 사업 분야가 어딘가?”
“조선소를 설립하려 한다더군.”
“이런. 하필이면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업이군. 뭐, 바덴 강에서 조선업으로 우리들을 이길 수 있겠냐마는, 카록 그 젊은 녀석은 워낙에 수완이 탁월하지 않나?”
“거기에 같은 육제후인 란즈헬 백작가까지 합작투자를 할 걸세. 뭔가 가능성을 본 게 아니겠나.”
“에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있겠나? 우리의 돈줄이야 결국 통행세지 조선업 이익이야 새 발의 피지.”
육제후는 너도나도 한 마디씩 했다. 린델 백작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침묵하던 또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흘흘흘. 이거야 원.”
대화가 멈췄다. 모두가 그 노쇠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바로 안타레스 백작.
82세의 나이로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인물이었다. 80대라는 실제 나이에 비하면 상당히 정정해보여서 15년쯤 더 젊어 보일 정도였다.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죽고 나니 대화가 겉돌기 시작하는군. ‘육제후의 두뇌’가 살아 있을 적에는 이런 적이 없지 않았나.” 안타레스 백작의 말에 그제야 다른 이들도 헛기침을 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싱거운 잡담을 했군.”
“뭐, 이런 것도 좋지 않나. 볼프강 그 친구는 다 좋은데 너무 재미가 없었어. 아니, 그보다 좀 무서웠다고. 하하.”
“안타라스 백작님의 말대로 이제 슬슬 회의에 들어감세.”
그들의 반응에 안타레스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존 안타레스 백작.
본래는 육제후 중 가장 연장자에 나름대로 식견이 있어서 육제후의 맏이노릇을 했던 안타레스 백작이었다. 하지만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천재성을 드러내면서 빛을 잃었고, 그저 육제후의 한 명으로 묻혀버린 인물이었다.
그런데 마침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죽자, 다시금 주도권을 쥐려고 나선 것이다. 린델 백작을 배려하여 자신의 저택으로 육제후를 초대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흘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감세. 린델 백작, 자네가 겪은 문제를 모두에게 이야기해주겠나?”
“그러겠소.”
린델 백작은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가 늦었군요.”
그들보다 월등히 나이가 젊은 남자가 거침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제이슨 란즈헬이었다.
***
“린델 백작은 암살에 실패했고, 카록 리간드가 상급 정령사임이 밝혀졌습니다.”
“역시 그랬나.”
할슈타인 백작의 보고에 카르스 황제는 덤덤히 대꾸했다. 할슈타인 백작은 이채가 어린 눈으로 물었다.
“짐작하셨습니까?”
“약간은. 언젠가 카록은 내게 날 죽이고 싶다고 했었지. 그대는 카록에게 화를 냈고. 그때, 카록은 그대에게 기죽지 않았다.”
할슈타인 백작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그때 그 역시도 카록 리간드에게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 아리송한 느낌이 들긴 했었다.
그때의 카록의 반응을 카르스 황제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실로 경이로운 관찰력 아닌가.
할슈타인 백작은 보고를 계속했다.
“이후로 린델 백작령은 지진으로 성을 잃는 등의 자연재해를 당해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 뒤에 양측의 갈등에 대해서는 레던 왕실에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진은 카록 리간드의 소행이며 이에 굴복한 린델 백작이 적절한 보상으로 타협한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그렇군.”
이야기를 듣고서 카르스 황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계산이 뇌리를 스친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란즈헬 백작가는 레던 왕실로 약간 기울고, 린델 백작가는 약화되고, 육제후의 세력이 꺾인다.”
“예. 내전 때 반란군 놈들에게 자금을 퍼부은 것도 그들의 패착이 되었습니다.”
할슈타인 백작이 맞장구쳤다.
카르스 황제는 차갑게 웃었다.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진 미소였다.
“레던 왕실과 육제후의 갈등은 깊어진다. 레던 왕실이 강해질수록, 육제후가 약화되고 분열될수록, 갈등의 골은 깊어간다. 양측이 멀어져간다. 거기서 파고들 틈이 생긴다.”
“…….”
할슈타인 백작은 말없이 이 야윈 황제를 바라보았다. 분명 머릿속에는 자신이 짐작하기 힘든 책략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다만, 한 가지.
아무 감정도 없었던 표정에 약간의 감정이, 바로 ‘흥미’라는 것이 눈빛에 어리는 것을 할슈타인 백작은 보았다. 누가 이 얼음 황제를 즐겁게 하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카록 리간드.
첫 만남에서 카르스 황제의 내면을 간파한 그 자일 터였다.
―10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