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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레던 왕궁으로
레던 왕실은 나를 상대로 한 암살 사건에 격하게 반응했다.
에릭 국왕은 나에게 답신을 보냈는데, 린델 백작과 함께 왕실로 호출하여서 엄중하게 판결을 하겠으며, 호출에 불응할 시 대대적인 응징이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엄포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미 린델 백작과 합의가 끝난 상태였다.
나는 에릭 국왕에게 공식 상소를 올리는 대신, 듀론 후작에게 비공식으로 서신을 보내 이번 사태를 숨김없이 설명했다.
그러자 에릭 국왕으로부터 다시 서신이 도착했다. 나와 린델 백작에 대한 호출을 취소하고, 대신 나에게는 이러한 말을 덧붙였다.
「그대의 부친인 쿤트 자작 바스크와 함께 왕실로 상경하라.
그대들이 도착하는 대로 승작 건과 왕실 최고위 관리들에 대한 대규모의 인사발령이 있을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왕실이 칼을 뽑아들었군요.”
에반은 이 서신 내용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육제후와 커넥션을 형성하고 있던 최고위 관리들을 대거 해임할 듯합니다. 혼트 제국 내전 건에서 단체로 판단미스를 했으니 명분은 충분하지요. 주군은 물론이고, 제론 데커드와 루이 콘체른 같은 국왕의 젊은 측근이 요직에 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달리 인물이 없으니까요, 왕실파에는.”
으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제후파의 핵심인물이었던 녀석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해지는군.
아무튼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때가 왔다.
인사발령이 있고 나서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왕실에서 활동하게 될 듯싶었다.
“아마 주군과 쿤트 자작님은 백작으로 승작되겠군요. 하기야 상급 정령사와 오러 마스터인데 그만한 작위는 수여해야겠지요. 어쩌면 주군께서는 이번 인사로 재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재상? 벌써?”
덜컥 겁이 난다.
물론 내가 언젠가 재상이 되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직은 듀론 후작이 왕실에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크다고!
“애당초 이미 은퇴를 한 듀론 후작을 왕실에서 억지로 데려와 재상에 앉혀놓은 겁니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이참에 은퇴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아직은 그 영감님이 필요하다고. 국왕 폐하도 루이도 제론도 나도 다들 너무 젊어. 듀론 후작 각하께서 계셔야 적절한 균형이 유지된다고.”
“그건 국왕 폐하의 판단에 달린 문제이지요. 아무튼 주군으로서는 어찌 되든 좋은 상황입니다. 어서 왕실로 가시지요.”
나는 문득 에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 인간도 왕실에 데려가야 하지?
“너도 뭐 한 자리 할래?”
“예?”
“외교부상서 같은 거 하나 할래? 그래야 함께 왕실에서 일하기 편하잖아.”
“싫습니다.”
“엥? 어째서?”
“공식적인 직함은 오히려 제 운신의 폭을 제한시킬 뿐입니다. 첩보조직도 더 키워야 하므로 왕실 공직은 사양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제일 속 편한 놈이 되겠다, 이 뜻이렷다?
앞으로 일에 치여 사는 인생길을 눈앞에 둔 나로서는 얄미웠지만, 에반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쿤트 자작가 저택으로 달려가서 이 소식을 아서 형님과 아버지에게 전했다.
아버지의 혼담 준비로 분주하던 두 사람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아버님 덕택에 우리가 어엿한 백작가문이 되겠군요. 아버님 대에 이르러서 쿤트 가문이 크게 번성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서 형님의 극찬에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였다.
“뭘. 나 너희들 덕분이지. 아무튼 내가 백작으로 승작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란즈헬 백작가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겠구나. 당당하게 혼담에 응할 수 있겠어.”
아버지는 백작이라는 지위보다는 우리보다도 어린 여자와 새장가를 가는 데에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무튼 우리 대에 이르러서 아버지는 물론 나까지 백작가문의 수장이 되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보통 공작은 왕족이나 건국(建國) 혹은 구국(救國) 공신에게나 수여되는 작위이며, 후작 또한 대단한 공적이 있어야 받는 작위이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일반 귀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는 백작이었다. 육제후가 전부 백작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촌구석의 남작가문에서 백작이 두 명이나 탄생했으니 이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아무튼 국왕폐하께서 부르시니 내일 당장 출발하자꾸나.”
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날아가면 금방이니까요.”
“알겠다. 그럼 내일까지 준비를 마쳐놓을 테니, 너도 준비하여라.”
“예, 아버님.”
레던 왕성으로 갈 땐 줄리아와 시스도 데려가야 한다. 이제 레던 왕성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카록 병기점의 사장인 줄리아가 문제였지만, 얼마 전에 부사장이 된 닐 페리가 업무에 잘 적응하고 있어 병기점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안심이었다.
나는 내일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알려주기 위해 줄리아와 시스가 있는 카록 병기점으로 향했다.
“줄리아, 시스. 일은 그만하고 다들 준비해. 내일 레던 왕성으로 갈 거야.”
“어머, 정말요?”
줄리아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반색을 했다.
시스는 어느 새 일을 때려치우고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귀여운 우리 시스. 이제 일 같은 건 하지 말고 레던 왕성에서 마음 편히 놀고먹으렴.
“여러 일들이 많아서 아직 저택을 짓지 못했지만, 뭐 저택이 완공될 때까지 왕궁 안에서 살면 되지 뭐. 너희도 왕궁 좋아하지?”
“그럼요! 왕궁생활은 잘나가는 여자의 로망인걸요.”
줄리아는 어느새 눈빛이 몽롱해졌다.
시스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왕궁의 요리사들 실력이 좀 좋아야 말이지.
“이제 떠나시는군요.”
부사장 닐 페리, 얼마 전까지는 왕도 오리엔 용병길드의 길드 마스터였던 그가 나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나는 웃으며 화답했다.
“아아. 그보다 이제 업무에 완전히 적응했다면서? 유능한 인재라고 줄리아의 칭찬이 대단하던걸?”
“정말입니까? 다행이로군요. 여자라고 내심 얕봤었는데, 막상 자작부인께서 그간 해놓으신 업무내용을 보니 너무나 훌륭해서 감명 깊었습니다. 무예로 치자면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고나 할까요?”
“호호, 뭘요.”
겸양하는 척 하면서 줄리아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몹시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확실히 닐 페리가 카록 병기점에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었다. 이런 아부도 할 줄 아는 걸 보니 말이야.
“그런데 단주님. 최고장인이신 구스 영감님이 단주님을 찾으시더군요.”
“구스 영감이?”
“예. 단주님께 만들어드리기로 하셨던 회심의 역작이 완성되었다고 하더군요.”
아, 그랬지!
비로소 나는 구스 영감이 한 약속이 생각났다.
내가 카르스 황제에게 지금 입고 있는 이 레드 미스릴 코트를 선물 받아오자, 이를 본 구스 영감은 장인 혼을 자극받아서 이보다 더 훌륭한 역작을 만들겠노라고 공언했었다.
그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그간 너무 바빠서 깜빡했다.
대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을지 기대되었다.
나는 냉큼 구스 영감의 개인작업장으로 갔다.
“여어, 구스 영감!”
“오! 자작님!”
구스 영감은 여전히 정정했다. 작업실 한쪽에는 반쯤 마신 힐링포션이 보인다. 여전히 몸 관리는 철저히 하는군. 구스 영감도 한 100살까지 망치 두들기며 살 것 같아.
“이제야 오시다니, 이게 얼마만입니까?”
“미안, 미안. 내가 좀 잘나가야지.”
“허허헛!”
구스 영감은 내 말에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보다 약속한 것은?”
“완성했습니다. 한 번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