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248화 (248/529)

<-- 248 회: 10권 - 8장. 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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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델 영지는 분명 부유한 지역답게 구경거리가 많은 동네였지만, 솔직히 이번 달 들어서만 세 번이나 드나들다 보니 이제 지겨웠다.

린델 성은 아직 성벽의 보수를 시작도 안 한 눈치였다. 물론 바덴 강의 통행세가 주요 수입원이다 보니 선착장은 서둘러 보수하는 풍경이 보였다. 하지만 상인들이 전처럼 많지는 않았다.

유유히 하늘을 날아서 린델 백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물론 오러 엑스퍼트 급의 기사들도 두 명이나 경계근무에 참가한 상태라서 비밀리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착지한 뒤, 땅속으로 들어갔다. 노움의 능력으로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며 린델 백작가의 저택 바로 아래까지 이동했다.

그 뒤 바닥을 뚫고서 안으로 진입했다.

오, 이게 웬 좋은 냄새래?

내가 침투한 장소는 린델 백작가 저택의 와인저장고였다. 퀸즈 블러드 같은 최고급 와인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포도주들뿐이라서 나는 눈이 돌아갔다.

아니지, 이러면 안 돼. 난 도둑이 아니잖아. 물론 지금 내 모습은 조금 도둑놈 같긴 하지만.

나는 몇 병 빼돌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래, 나도 돈 많아. 퀸즈 블러드 따위는 몇 병이든 사 마실 수 있다고! 안 부러워!

와인저장고를 빠져나가려 했을 때였다.

독특한 푸른 빛깔의 포도주 병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헉.

‘쓰론 블루’였다.

레던 왕실에도 한 병밖에 안 남아서 에릭 국왕이 몹시도 애지중지했던 바로 그 환상의 와인! 그 쓰론 블루가 한 병도 아니고 무려 아홉 병이나 보였다.

“하, 한 병만 가져가자. 린델 백작이 준 선물인 셈치고. 이렇게 많은데 한 병쯤이야.”

나는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죽가방에 쓰론 블루를 한 병 챙겼다.

……결국 나는 쓰론 블루를 세 병이나 챙긴 뒤에야 와인저장고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린델 백작에게 미안해진다. ‘정력의 목걸이’도 선물(?) 받은 주제에 염치도 없이! 반성해라, 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나는 감시망을 피해 한 층 한 층 계단을 올랐다.

정령의 감각으로 저택 내부의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날아서 천장에 붙어 다니기도 하고 커튼 뒤에 숨기도 하면서 나는 천천히 린델 백작의 침실을 향해 이동했다. 이쯤 되면 ‘괴도 카록’이라 불려도 되지 싶었다.

5층.

린델 백작이 있는 침실의 문 앞에는 호위기사가 네 명이나 보였다. 그중 두 명은 오러 엑스퍼트였다.

대체 이 가문에는 오러 엑스퍼트가 몇 명이란 말인가? 과연 돈의 힘이란…….

“누구냐?”

오러 엑스퍼트인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내 기척을 포착하고는 소리쳤다.

이런.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나는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린델 백작 각하와 약속을 했다.”

“백작 각하께서는 지금 주무시고 계시오. 정체를 밝히시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리간드 자작 카록이다. 들어가서 전해.”

“카, 카록?!”

“상급 정령사……!”

호위기사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런데 그때, 침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해라.”

잠에서 깬 린델 백작이었다. 아니, 사실은 잠이 잘 안 오는지 계속 뒤척이고 있었다. 난 정령들과 공유한 감각으로 그 모습이 훤히 보였다.

호위기사들은 길을 비켜주었고,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잠옷 차림의 린델 백작이 무서운 눈길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음, 잠이 안 와서 짜증난 모양이네. 아, 나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건가?

“정말 조용히 왔군.”

린델 백작은 약간은 허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택에 경비를 서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아무도 몰랐으니 허탈할 만도 했다.

“땅굴로 들어왔습니다. 상급 정령사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죠.”

“……앉게.”

나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린델 백작은 옷장에서 코트 한 벌을 꺼내 걸치고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에반과 둘이서 작당모의를 하면서 린델 백작을 바보취급 했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그 또한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의 돌발적인 방문에도 여전히 차분한 눈빛과 흔들림 없는 모습을 유지하는 린델 백작. 육제후의 한 사람이라는 높은 신분에 군림해오면서 알게 모르게 쌓인 연륜이 느껴졌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남의 일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시치미를 떼는 린델 백작.

나는 웃음을 지었다.

“현장에서 포로로 잡은 29인의 용병의 증언으로 저를 암살하려고 사주한 사람이 백작 각하임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네. 그 용병 나부랭이들이 내 얼굴을 똑똑히 봤다고 하던가? 내가 보기에는 도적질을 하려던 무리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같네만.”

“그들은 백작 각하의 조카인 샘 린델 남작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한낱 도적 나부랭이들이 백작 각하의 조카의 이름까지 알 정도로 풍문에 밝답니까?”

“그렇다고 내 조카 샘 린델이 아예 알려지지 않은 것도 아니지. 우연히 내 조카를 아는 도적들을 만난 모양이군. 아무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다니 유감이군.”

“유감은 제가 더 유감이지요. 지진 때문에 큰 피해를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린델 백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입니다. 인명피해는 없었잖습니까. 지진이 더 강해서 이 저택까지 무너졌더라면 백작 각하의 안위까지 위험하셨을 텐데 말이죠.”

나는 은근슬쩍 위협을 가했다.

“…….”

잠시 말이 없던 린델 백작.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에 턱을 괴고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자네의 암살 건은 내 조카 녀석이 멋대로 벌인 짓일 수도 있겠군.”

“그러십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그 녀석의 숙부이자 린델 가문의 가주로서 사과를 해야 하겠지.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하면 좋겠는가?”

슬슬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 린델 백작이었다.

저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말투. 마찬가지로 정치판에 몸담은 입장에서 본받아야겠군.

나도 슬슬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18만 레디나.”

“뭣이?”

린델 백작은 발끈했다. 그러나 화내지는 않고, 대신 차분히 말했다.

“욕심이 과하군. 지진 피해로 곤경에 처한 본 린델 가문의 입장을 생각해주게.”

너도 지진을 일으켜 복수하지 않았느냐는 말투였다.

“저는 흥정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백작 각하.”

“…….”

“하지만 지진 피해로 큰 타격을 입으신 건 사실이니, 이 점을 배려해드려서 15만 레디나로 만족하겠습니다.”

“그 또한 과하지 않나.”

“과하다고 생각이 되신다면, 현명하신 국왕 폐하의 판결에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요. 최악의 경우, 리간드 가문과 린델 가문의 영지전이라는 판결이 나올 테죠. 저는 전쟁을 원하지 않으나, 두렵지도 않습니다.”

“오만무도하군. 린델 가문이 오늘처럼 무시당한 적은 없었다.”

“린델 백작가의 저력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제가 가진 것을 잃는 게 두렵지 않습니다. 백작 각하께서도 그러하십니까?”

나의 최대 자산은 바로 나 자신.

그에 비해 린델 백작의 최대 자산은 가문의 부였다.

누가 더 잃을 게 많은지는 자명했다. 그리고 린델 백작은 내가 상급 정령술로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았다.

자, 어쩔 테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린델 백작은 문득 바깥을 향해 말했다.

“샘 린델 남작을 데려와라.”

“예.”

대답을 한 호위기사들은 잠시 후, 샘 린델 남작을 데려왔다. 자다 말고 온 모양인지 샘의 얼굴에는 피로가 한가득했다.

“백작 각하, 부르셨…… 헉!”

샘 린델 남작은 내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린델 백작은 그를 데려온 호위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나도, 호위기사들도, 그리고 샘 린델 남작 본인도 알았다.

“배, 백작 각……!”

촤아악!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단칼에 샘 린델 남작의 목을 베었다. 피를 뿜으며 목과 몸이 분리된 샘 린델 남작의 시신이 털썩 널브러졌다.

나는 샘 린델 남작에 대한 동정심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참 비열하다. 귀족들의 세계란.

린델 백작은 얼굴색 하나 변치 않은 모습으로 말했다.

“이것으로 사과를 받아주게. 원하는 조건은 들어주겠네. 1년 상환의 어음으로 가져가게.”

“알겠습니다.”

린델 백작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어음을 작성해주었다. 1년에 걸쳐 15만 레디나를 지급하겠다는 어음이었다.

어음을 품에 넣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시간에 실례 많았습니다. 평안한 밤 되십시오.”

나는 왔던 길 그대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린델 백작과의 충돌은 일단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란즈헬 백작가를 제외한 나머지 육제후와의 갈등은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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