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245화 (245/529)

<-- 245 회: 10권 - 7장. 또다른 음모 -->

***

정령친화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일까. 역시 상급 정령사인 나라고 해도 린델 성의 성벽을 통째로 무너뜨리고 홍수를 일으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명피해가 없도록 컨트롤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들었다.

비실거리는 속도로 날아서 간신히 쿤트 영지로 돌아온 나는 내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때쯤에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아이고, 이거 완전히 맥주를 오크통 하나 통째로 퍼마신 듯한 기분이네. 숙취가 아니라서 운디네의 힘으로 치유할 수도 없다.

“나 왔다…….”

긴장이 풀려서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줄리아가 도끼눈을 뜨고 맞이했다.

“아니, 왜 이제야 들어오시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어디서 술 먹고 뻗었나 싶어서 온 골목을 다 뒤졌다고요.”

그 말에 나는 황당해졌다.

“얘야, 내가 며칠 걸린다고 말했었잖니. 상식적으로 술을 며칠씩이나 마실 리가 있겠어?”

그보다 상급 정령사씩이나 되어서 술에 취해서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망신이야?

“꼴을 보니 며칠 내내 마신 것 같은데요.”

“으휴, 말을 말자. 그보다 이 남편님은 지금 피곤하니까 잠 좀 잘게.”

나는 거실에 보이는 소파에 벌렁 누웠다.

“씻고 옷 갈아입고 자요. 아니, 그보다 침실로 올라가서 주무세요.”

아아, 줄리아야. 머리 울리니까 목소리를 좀 낮춰주지 않겠니.

그때 누군가가 도도도 위층에서 달려 내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음, 이 적당히 작아서 안기 좋은 사이즈는 시스로군.

“아앗, 시스! 너는 실컷 자놓고서는 왜 또 같이 자려는 거야! 출근해야지!”

지금은 아침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관없이 잠을 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잘 자던 나는 누군가가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품에서 함께 자고 있던 시스가 날 깨운 듯했다.

“시스, 배고파?”

“응. 그리고 손님.”

“응?”

어디보자. 이 말뜻을 해석하면, 배가 고픈 건 맞는데 날 깨운 이유는 손님이 왔기 때문이라는 뜻이군.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눈을 떴다.

“……어라?”

에반이 거실의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반 테일러가 드디어 약속대로 나에게 온 것이었다.

“저택의 경비가 지나치게 허술하지 않습니까? 유목민족 출신의 병사들 외에 경비가 없더군요.”

이 집을 지키는 경비 병력은 패트릭이 내 신변을 걱정하면서 붙여준 콘돌기병대의 대원들 몇 명 정도였다.

“뭐, 평소에는 늘 정령을 소환상태로 두기 때문에 경비가 필요 없거든. 어차피 곧 레던 왕성으로 이사도 할 거고.”

그렇게 말한 뒤에 나는 다시 잠을 자려는 시스를 깨웠다.

“시스. 간단하게 식사나 하자.”

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스스한 얼굴로 부엌으로 향했다.

난 다시 에반을 바라보았다.

“이제 마음은 정한 건가?”

“예.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주군.”

마지막의 주군이란 말이 내 심금을 울렸다. 저 에반 테일러를 드디어 내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자, 주군. 이제 제게 어떤 역할을 주시겠습니까?”

“사실은 카록 상단의 사장 자리를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에반은 피식 웃었다.

“제게 돈벌이를 시키실 셈입니까? 뭐, 아예 적성에 안 맞는 건 아니겠군요. 이간질로 영지전을 유발시켜서 병장기와 식량을 팔아먹고, 경쟁상단에 음해를 가하는 일이라면 제 전문이니까요.”

“……아냐. 생각해보니 너 같은 인재를 상단에 놔두는 건 인력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놈.

나도 얼마 전에 에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상단을 맡기겠다는 생각을 바꿨다.

에반은 카르스 황제, 볼프강 란즈헬 등과 같은 부류였다. ‘게임’을 할 줄 알고, 더 나아가 그것을 즐기는 인간인 것이다. 카르스 황제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에반의 그러한 능력도 필요했다.

“그렇다면 전 란즈헬 백작 각하를 모셨을 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자. 뭐, 리간드 가문에 청소부는 필요 없지만.”

내 말에 에반은 히죽 웃어보였다.

“그럼 린델 백작 문제를 이야기해보지요. 린델 백작에게 어떻게 대응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가만히 당하기만 하고 넘어가실 생각이었으면 29명의 포로를 잡아두시지 않았을 텐데요.”

“일단은 가볍게 보복삼아서 린델 성을 부수고 왔어.”

내 말에 에반은 처음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저 인간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

“몰랐어? 나 상급 정령사야.”

에반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자 나는 보람을 느꼈다. 린델 성의 성벽과 선착장, 조선소를 부순 이야기를 들려주자 에반은 살짝 질린 얼굴이 되었다.

“일단 ‘가볍게’ 복수는 했고, 왕실에도 린델 백작의 짓을 고발했으니 상황을 지켜보자고.”

“그게 가볍게 한 겁니까? 성벽과 선착장과 조선소를 다시 복구하려면 엄청난 자금이 깨지겠군요. 살면서 린델 백작가가 걱정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그보다 왜 린델 백작은 그냥 살려둔 겁니까? 천재지변으로 가장해서 그자를 죽이면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내가 암살자냐?”

“지나치게 도의적인 부분을 신경 쓰시는 게 아닌지 말씀드린 겁니다.”

“내가 상급 정령사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 이상, 언젠가는 그게 내가 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원한은 깊어지고 린델 백작가는 물론 다른 육제후와의 관계도 크게 틀어질 테지.”

“……그렇습니까?”

험하게 인생을 살아온 에반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투였다. 착해서 미안하다, 그래.

“아무튼, 살려두신 이상 린델 백작은 무언가 조치를 취할 겁니다. 그토록 화려하게 당했으니, 주군의 상급 정령술에 대한 대책을 위해 골머리를 앓겠지요. 별달리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만, 적어도 다른 육제후 가문과 힘을 합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에반의 말이 옳았다. 육제후는 늘 여섯 가문이 하나가 되어서 대응한 덕분에 오늘날 이렇게 강성한 세력을 만든 것 아닌가.

에반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은 이 상황을 왕실 대 육제후가 아니라 주군 대 린델 백작의 문제로 끝내야 합니다.”

“그건 동의해. 나도 이 나라의 내전 사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아.”

“그러기 위해서는 린델 백작과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이 필요합니다.”

“타협?”

“예. 육제후는 명칭 그대로 언제나 여섯 가문이었습니다. 만약에 린델 백작가와 주군의 가문 간에 영지전이라도 발생하는 날에는 한 쪽이 몰락할 때까지 싸우게 됩니다. 다른 육제후 가문은 절대 린델 백작가가 몰락하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그게 육제후라는 공동체의 습성입니다.”

에반은 과연 볼프강 란즈헬의 심복 출신답게 육제후에 대해 잘 알았다.

“주군께는 상급 정령술이 있지만, 린델 백작가의 거대한 부(富) 또한 우습게 볼 바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승자 역시 큰 출혈이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잃을 게 더 많은 쪽은 린델 백작가입니다. 게다가 주군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테니, 조금만 더 위협을 가한다면 먼저 타협을 하려고 할 겁니다.”

“조금 더 위협을 가하자고?”

“간단합니다. 린델 백작령에 있는 성을 하나 더 부수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카슈텔 성을 혼트 제국에 빼앗긴 후로 안보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는 린델 백작인데, 성을 하나 더 잃고 나면 먼저 화해를 청할 겁니다.”

“그리고?”

에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다음이야 뻔합니다. 배상금으로 15만 레디나 정도 받아내고, 독단적으로 이번 일을 주도한 죄로 샘 린델 남작을 처형하고, 결과를 왕실에 보고하면 그렇게 일단락되는 일입니다.”

역시 에반은 이런 일에 밝았다. 단숨에 배상금의 견적까지 내놓지 않은가.

“15만 레디나나 받자고?”

“예. 린델 백작가가 몰락할 만큼의 액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게는 할 수 있는 금액이 그 정도입니다. 아마 육제후의 다른 가문이 자금 지원을 해줘서 재정 문제에서도 금방 벗어날 겁니다.”

“육제후는 생각보다 훨씬 서로의 유대감이 강하네?”

나는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냥 왕실에 맞서 이익을 챙기기 위한 연합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끈끈한 공동체였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는 바덴 강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툰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학습을 했지요. 바덴 강 유역을 노리는 것은 자신들뿐만이 아니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 황금의 땅을 지배하려면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요. 육제후가 볼프강 란즈헬 백작 각하께 기꺼이 주도권을 내주고 협력한 것도 그러한 맥락입니다. 백작 각하는 란즈헬 백작가의 이익만을 챙기지 않고 여섯 가문의 공정한 이익 배분을 원칙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랬기에 육제후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

그래서 더더욱 그가 죽은 지금이 기회인 것이다.

여섯 가문 중에 볼프강 란즈헬만큼 지혜롭고 공정한 사람이 있느냐는 딜레마를 해결 못하는 이상, 육제후는 더 이상 예전처럼 하나로 뭉치지 못할 테니까.

그 분열의 첫 걸음이 바로 란즈헬 백작가이고, 두 번째는 린델 백작가다.

“이번 일로 린델 백작가가 큰 타격을 입으면, 여섯 가문의 힘의 균형이 무너질 거야. 더 이상 린델 백작은 육제후 내에서 예전 같은 발언권을 갖지 못할 테고, 거기서 갈등이 시작되는 거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에반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육제후를 위해 살아온 제가 이번에는 육제후를 무너뜨린다니, 재미있겠군요.”

“…….”

넌 그게 재미있냐? 이 변태야. 역시 나랑은 완전히 다른 인종이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