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회: 10권 - 3장. 경고 -->
에반은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그의 어머니는 빈민가의 여인이었는데 에반을 낳다가 목숨을 잃었다. 자신을 키워준 거지 왕초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는 몸을 팔아서 하루하루 먹고 살았던 흔한 빈민가의 여자였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네 아비일 수도 있다며 왕초는 낄낄거렸지만 머리색도 눈동자색도 다른 걸 보면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도 왕초는 자신보다 훨씬 멍청했으니까.
거지들 틈바구니에서 자란 에반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낮이 되면 거리로 나아가 구걸을 했고, 얻어온 음식이나 동전을 왕초에게 바쳤다. 때때로 기회가 되면 소매치기도 했다. 맛있는 걸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럼 먹을 게 가장 많은 곳으로 가면 되잖아?’
먹을 게 가장 많은 곳.
바로 란즈헬 백작가였다.
에반은 과감하게 란즈헬 백작가의 저택에 숨어들었다.
평민 집에서 옷가지를 훔쳐 입어서 거지행색에서 벗어난 에반은 란즈헬 백작가에서 일하는 하인 이름을 하나 알아냈다. 그 하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니 문기지 병사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당한 태도를 가질수록 상대가 잘 속는다는 걸 에반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택에 침투한 에반은 식당에 숨어들어 음식을 마구 훔쳐 먹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맛있는 걸 실컷 먹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성취감이 그를 희열에 빠뜨렸다.
문득 든 의문.
그럼 이 저택의 주인은 과연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이 저택 주인이 먹는 음식을 먹어보자!
똑같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 죽는 목숨이다. 왜 누군 환상의 음식을 매일 먹으며 살아가고 자신은 평생 맛도 못 보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마음만 먹으면 나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반은 결국 란즈헬 백작가 일족을 위해 차려진 정찬 요리를 훔쳐 먹는데 성공했다. 눈물 나게 맛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맛이 그를 황홀감에 빠뜨렸다. 에반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요리를 죄다 먹어치웠다.
결국 식당에서 일하는 하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 미친 녀석아! 네 녀석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왜 모르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인의 아들이라는 가짜 신분도 들통 나고 말았다.
식사가 늦어지자 란즈헬 백작이 이유를 추궁했다. 그리고 웬 꼬맹이가 요리를 훔쳐 먹었다는 소리를 듣자 흥미를 보였다.
“그놈을 데려와라.”
“예? 아, 예!”
하인들은 즉시 매타작을 당하여서 너덜너덜해진 에반을 란즈헬 백작 앞에 대령했다.
그게 볼프강 란즈헬 백작과의 첫 만남이었다.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듯한 그 차가운 눈빛과 마주하자 에반은 심장이 멎을 듯이 놀랐다.
이 저택의 주인은 보나마나 돈 많은 뚱보일 거라고 상상했다. 맛있는 걸 매일 먹어 대서 뚱뚱해진 뚱보. 먹을 것 좀 훔쳐 먹었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을 돈 많고 만만한 뚱보 말이다.
그러나 웬걸.
무서운 눈빛을 가진 차가운 남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차가운 눈빛이었으나, 원수를 노려보는 분노 어린 시선보다도 훨씬 섬뜩하였다.
“넌 누구냐.”
“에, 에반입니다, 나리.”
“나는 란즈헬 백작가의 볼프강이다. 날 부를 때는 백작 각하라 칭해야 한다.”
“예, 볼프강 란즈헬 백작 각하. 저는 빈민가의 에반이라고 합니다.”
에반은 침착하게,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그것이 란즈헬 백작의 흥미를 샀다.
“거지인가.”
“예, 백작 각하.”
“그럼 왜 거리에서 구걸을 하지 않고 이곳에 숨어들어 음식을 훔쳤나.”
“먹을 것이 이곳에 가장 많았기 때문입니다, 백작 각하. 바깥의 사람들은 먹을 것을 훔치면 화를 내지만, 이곳은 먹을 것을 훔쳐도 티가 나지 않습니다.”
어린 나이답지 않은 침착한 대답이었다.
“그럼 어째서 좀 훔쳐도 티 나지 않은 하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고, 내가 먹어야 할 정찬 요리를 훔쳐 먹었나.”
“이왕 세상에 태어난 것,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백작 각하. 용서해주신다면 백작 각하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에반은 그렇게 말하며 납작 엎드렸다.
그 말에는 자신을 이 저택에 고용해달라는 뜻까지 내포되어 있었다. 용서를 비는 와중에도 이 기회에 거지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를 품은 것이었다.
물론 란즈헬 백작은 어린 에반의 속내를 빤히 알았다. 그러나 괘씸해하는 대신, 나직이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살아있군.”
그렇게 에반은 란즈헬 백작의 몸종이 되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심부름 따위를 했다. 하지만 심부름의 난이도는 나날이 어려워졌다.
때로는 방의 침대 아래에 숨어서 귀족들의 대화를 엿들어야 했고, 서신을 훔치는 일도 했다. 들키면 죽임을 당하는 일들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에반은 괴롭기는커녕, 점점 성취감과 희열을 느꼈다.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을 느낄 때마다 란즈헬 백작이 처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살아있군.”
그렇다.
이런 게 바로 살아있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구걸을 해서 고작해야 하루를 먹는 데에 그치는 빈민가 생활은 살아도 죽은 거나 다름없이 무의미했다.
에반은 란즈헬 백작이 시키는 일을 뭐든 잘 해냈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그치지 않고 란즈헬 백작을 상대로 게임을 했다.
게임.
바로 란즈헬 백작의 의중을 알아맞히는, 에반 혼자만의 게임이었다.
에반은 란즈헬 백작이 일을 시키면 시킨 대로만 하지 않았다.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란즈헬 백작의 마음에 드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란즈헬 백작은 그런 에반을 주제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반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더욱 어려운 일을 시켰다.
세월이 흐르자 에반은 ‘란즈헬의 청소부’라 불리는 란즈헬 백작의 심복이 되어 있었다.
***
“게임이라…….”
에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반 테일러.
이 작자도 나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카르스 황제나 볼프강 란즈헬 백작처럼 게임을 할 줄 알고 그것을 즐기는 인간이었다.
에반은 문득 나에게 물었다.
“당신도 나와 게임을 하시겠습니까?”
“게임? 어떤 게임인데?”
“우선 첫 번째 게임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암살을 계획했습니다. 누구일까요?”
뭐? 이게 뭔 소리래?
나는 깜짝 놀랐다.
에반은 지금 누군가가 날 암살하려 한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생각에 잠겼다.
우선 카르스 황제는 암살 같은 레벨 낮은 음모는 꾸미지 않는다.
제이슨 란즈헬 백작은 우리와 혼담을 추진하고 있다.
그럼 남는 건 물갈이를 앞두고 있는 왕실의 최고위 관리들, 그리고 육제후의 다른 5인뿐이다.
이중 에반이 암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쪽이라면…….
“린델 백작?”
나는 육제후의 6인 중 가장 성질이 급하다고 알려진 린델 백작을 지목했다.
에반은 히죽 웃었다.
“과연 카록 리간드답습니다.”
휴, 정답이군.
“그럼 두 번째 게임을 하지요.”
에반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린델 백작은 암살단 하나와 더러운 일을 곧잘 하는 용병단 몇 개를 고용했습니다. 마법사까지 두세 명 고용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당신이 뛰어난 정령사이며 하늘을 날아다니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전제로 암살 계획을 짤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기회는 이곳 바덴 강 유역에 제 발로 걸어온 지금이지요. 저라면 당신이 이곳을 떠나는 순간을 노릴 겁니다.”
“그래서 게임 내용은 뭐야?”
“살아서 돌아간다면 저는 당신의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럼, 건투를 빌지요.”
에반은 맥주를 마저 마셔버린 후 미련없이 선술집을 떠나버렸다.
나는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린델 백작이 날 암살하려 한다니. 육제후의 리더였던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죽고 나니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막나가는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줄리아와 시스도 함께 왔는데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린델 백작은 내가 상급 정령사라는 사실까지는 모른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