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233화 (233/529)

<-- 233 회: 10권 - 3장. 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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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야 ‘여자는 무조건 외모다!’라는 철딱서니 없는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 내가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은 미란다 제드의 정치적인 기질이었다.

야심이 많고 속내를 감추길 좋아하는 음흉한 여자였다면 나는 이 혼담을 거절하는 방향으로 손을 쓰려고 했다. 그런 여자를 집안에 들였다가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 세 형제까지 새어머니라는 위치를 내세워서 이용하려 들 게 뻔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봐라!

볼프강 란즈헬 같은 새어머니라니? 무서워!

다행히 미란다 제드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아무리 여자가 내숭을 떨어도 인간인 이상에는 자기 본연의 기질을 완전히 감출 수 없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자신의 진심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루이 콘체른이나 줄리아처럼 야심만만한 사람은 짧은 순간에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이며 무서울 정도의 관찰력을 발휘한다. 그리고는 그렇게 습득한 정보를 토대로 손익을 계산해내는 습성을 보인다.

그런 사람은 정신연령이 100살에 가까워지고 있는 내 눈을 속이지 못한다. 전생에 상인으로 살면서 그런 사람을 워낙 많이 만나봤거든. 카르스 황제처럼 아예 감정이 보이지 않는 얼음 인간이 아닌 한에는 말이다.

미란다 제드는 그저 순진한 여자였다. 물론 이미 혼인을 한 번 하고 남편을 병으로 잃은 만큼 세상을 전혀 모르는 순진무구한 여자는 아닐 테지만, 속내가 음흉한 여자도 아니었다.

고(故) 란즈헬 백작은 자기 딸에게 정치적인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자식들까지 자신처럼 진흙탕 속에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행인 일이다.

늙은 집사가 마련해준 숙소로 돌아와서, 나는 줄리아에게 마구 잔소리를 들었다.

“어휴, 정말! 부끄러워서 혼났잖아요. 대체 귀족으로서의 체면이 있기는 한 거예요?”

“내가 그런 거 챙겨가며 사는 인간 같니?”

“어휴! 못살아 정말! 장래 유망한 사람답게 품위 있는 행동거지를 갖추면 좀 좋아요? 세상에 자기 아버지의 알몸을 공개해버리다니, 미쳤어 정말!”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 상관없잖아. 미란다 제드도 내심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고.”

줄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심장이 콩닥콩닥 뛰던걸. 정령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거든.”

“하여튼 그놈의 정령술…….”

“됐어, 됐어.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자고.”

얄밉다는 듯이 날 쏘아본 줄리아는 잠시 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장난스런 눈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라도 반하겠어요. 시아버님이 여보보다 두 배는 더 크던걸요.”

그 말에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정신적 충격을 느꼈다.

“뭐, 뭐라고?! 그, 그, 그런 망발을!”

“어머, 무슨 생각 하실까? 저는 시아버님의 체격 이야기였는데.”

“으윽!”

“정말 어쩜 복근도 그렇게 탄탄하시고, 역시 무인은 달라. 뱃살이 출렁거리는 누구와는 하늘과 땅 차이지.”

“비, 비교하지 마! 그리고 출렁거리는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아아아. 때로는 그런 탄탄한 근육질 남자 품에 안기고파. 여자의 로망이지, 로망.”

“크으윽!”

나는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뻔한 도발인 건 알지만서도! 내가 요즘 운동을 전혀 안 해서 몸이 좀 말랑말랑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필이면 아버지와 비교 당하다니, 참을 수 없어!

“우이 씨! 나 술 마시러 나갈 거야!”

“호호, 다녀오세요.”

“흥이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운디네의 힘으로 체액을 조절하며 붕 날아올랐다.

요즘 들어 높으신 작자들만 만나러 다녀서 좋은 포도주만 실컷 마셨다. 가끔씩은 딘 용병단과 함께 했던 때처럼 시원한 맥주를 실컷 마시고 싶었다.

술집을 찾을 땐 운디네의 감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맥주는 곧 액체. 맥주가 많은 곳으로 가면 그만이다.

나는 곧 선술집 하나를 발견하곤 그쪽으로 날아갔다.

거리에 착지해서 선술집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웃고 떠들고 마시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이 많은 걸 보니 제법 인기가 좋은 선술집인 모양이었다. 그럼 맥주 맛이 좋다는 뜻이겠지?

“여기 맥주 한 잔!”

“옙!”

주인장으로 보이는 늙은 사내가 호쾌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주인장은 커다란 잔에 맥주를 한 가득 가져왔다. 한 입 마셔보니 맛이 그만이었다.

오, 제법이군. ‘맥주의 쉬어가는 집’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아.

다만 온도가 좀 미지근한 것이 아쉬웠다. 시원했으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으응?

그럼 시원하게 만들면 되잖아? 난 정령사이니까.

나는 즉시 운디네를 시켜서 맥주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잠시 잔 안의 맥주가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차가운 서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차가워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잔까지 차가워질 정도였다.

그럼 어디.

나는 한 모금 마셔보았다.

“캬아!”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식도는 물론 뱃속까지 시원하게 적시는 듯한 시원한 맛이었다. 운디네와 계약한 정령사들은 전부 애주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남자가 선술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윽고 날 주시했다.

난 그 남자를 등지고 있었지만, 정령들의 감각으로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남자는 내 등 뒤로 서서히 다가왔다.

……얼레?

남자는 자기 품속으로 손을 넣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차가운 숏 소드의 손잡이를 쥐었다.

계속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노움과 운디네와 공유하고 있는 감각으로 그걸 가만히 지켜본다.

암살자인가?

그런데 암살자치고는 조금 행동이 대범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술집에서 직접 행동이라니 말이다. 어지간히도 실력에 자신 있거나, 프로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로 보였다. 프로가 아닌 걸로 보인다. 신중함과 음험함이 오히려 내 주의를 끌었다.

아무튼 잡아 놓고 누가 사주한 건지 물어봐야겠군.

이윽고,

“……?!”

남자는 숏 소드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꺼낼 수 없었다. 모래로 만든 어스 핸드가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거든.

또 하나의 어스 핸드는 남자의 어깨를 붙들고 내 맞은편 자리로 떠밀어 앉혔다.

나는 주인장에게 손을 들며 주문했다.

“맥주 두 잔 더!”

“예입!”

그리고 비로소 나는 내 맞은편에 앉혀진 어설픈 암살자를 응시했다.

어스 핸드에 붙잡힌 어설픈 암살자는 나를 보며 히죽 음험하게 웃어 보인다.

“기본은 되어 있는 것 같군요.”

“그쪽이 암살자로서의 기본이 안 되어 있어서 말이오.”

그는 바로 에반 테일러 남작이었다.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죽고 나서 란즈헬 백작가에서 축출된 에반이 아직도 이곳에 머물고 있다니 의외였다.

아니.

잘 생각해보니, 내가 이곳에 올 줄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말을 편히 하셔도 됩니다. 이제 란즈헬 백작가에서도 쫓겨난 떠돌이 신세이니까.”

에반은 자조적으로 말했다.

“흠흠, 그럴까? 그럼 사양 않고 말을 편히 놓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에반의 행색을 살폈다.

이제 보니 에반은 행색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았다. 물론 좋은 품질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겉에 두른 갈색 망토에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뭔가 험한 일이라도 겪은 모양이었다.

“험한 일이라도 당했나봐?”

나는 망토에 붙은 피를 보며 물었다.

에반도 피 뭍은 망토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별 일 아닙니다. 빈민가에서 몇 놈이 덤비기에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이건 그놈들 피지요. 세 명? 네 명? 그래봐야 쓰레기 거지들이니까요.”

여전히 거칠고 음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에반이었다. ‘란즈헬의 청소부’다운 모습이었다.

“네가 빈민가에는 무슨 일로?”

“제가 어릴 때 살았던 곳을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평민 출신인 건 알았지만, 빈민가 출신일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훨씬 험한 인생을 살아온 모양이었다.

“엘리트 의식이 높은 육제후 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네가 빈민가 출신이었다니 놀라운데.”

“란즈헬 백작 각하께서 사람을 보는 기준은 딱 하나였습니다. 살아 있느냐, 살아 있지 않느냐.”

때마침 맥주 두 잔이 나왔다. 에반은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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