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회: 10권 - 2장. 아버지의 혼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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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늙은 집사가 제이슨의 집무실에 들어와 말했다.
한창 바덴 강 물류 관련 서류를 보고 있던 제이슨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전에 방문을 약속한 서신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굳이 내가 만나야 하는 손님이란 말이냐?”
원래 귀족사회에서는 상대방을 방문하기 전에 서신을 보내서 미리 약속을 잡는 것이 예의였다. 하물며 육제후의 한 사람이 된 제이슨은 예고 없이 불쑥 방문한 손님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사가 말했다.
“리간드 자작과 그의 두 부인입니다.”
“뭐? 카록 리간드가?”
제이슨은 흠칫하여 물었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저택 응접실에 계십니다.”
“뭐? 그런 손님이 왔으면 성문을 통과할 때 나에게 보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됐다.”
‘보나마나 날아서 들어왔겠군.’
제이슨도 카록의 정령술로 하늘을 날아본 경험이 있었기에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고려하면 검문도 받지 않고 불쑥 성안에 들어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40분 뒤에 만나주겠다고 해라.”
“알겠습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왔다고 냉큼 나와서 맞이할 필요는 없지.’
제이슨은 이제 육제후의 한 사람이었고, 게다가 원래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카록을 조금은 기다리게 만들 참이었다.
***
“주인님께서는…….”
“내가 맞춰보지.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
내 물음에 늙은 집사는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었다.
“예, 업무 때문에 40분쯤 기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했다면 실제로는 한 시간쯤 기다려야겠군. 알았어. 그런데 그동안 내 부인들과 저택을 좀 구경해도 괜찮겠지?”
“예, 물론입니다.”
늙은 집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요 근처 정원이라도 둘러보자. 제이슨 란즈헬 백작은 자존심이 좀 세서 한 시간쯤 우릴 기다리게 만들 게 분명하거든.”
“네, 좋아요.”
“간식.”
“그래그래, 시스. 간식은 나중에 실컷 먹게 해줄게. 란즈헬 백작가의 요리사는 솜씨가 마스터 급이라고.”
나는 줄리아, 시스와 함께 저택 앞뜰의 정원으로 나갔다.
제이슨은 원래부터 자존심이 세고, 지금은 막 가주 직에 오른 시기이니 체면을 중시 여길 터였다. 40분을 기다리라 했으면 한 시간 뒤에 나타날 게 뻔하다. 저런 타입의 인물도 전생 때 많이 만나봤거든.
란즈헬 백작가의 저택은 굉장히 크고 화려해서 궁전을 방불케 했다. 아무렴 이 나라 최고의 부자 가문 중 하나이니 오죽 화려하겠는가.
때문에 란즈헬 백작가의 저택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관광거리였다.
우리는 란즈헬 백작가를 이곳저곳 구경하며 그 화려함에 감탄을 거듭했다. 조각상 하나 그림 한 점까지 수준급의 예술품이었다.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자금으로 이루어진 저택!
레던 왕성에 새로 지어야 할 우리 집도 이렇게 꾸밀 수 있을까 상의하니 구경하는 재미가 두 배였다.
나는 이런 식으로 부를 과시하고픈 욕심은 없었지만, 내 사랑하는 아내들을 멋진 저택에서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란즈헬 백작가보다 가진 돈은 적지만, 내 정령술을 적당히 응용하면 이만큼 우아한 저택을 짓는 것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실컷 구경을 한 우리는 응접실로 돌아와서 하녀에게 초콜릿 쿠키와 과일주스 세 잔을 시켰다.
시스는 달콤한 초콜릿 쿠키를 마구 퍼먹기 시작했다. 나는 수시로 운디네를 시켜 시스의 입가에 뭍은 초콜릿을 닦아주었다. 저 자그마한 몸으로 음식은 무한정으로 흡입하니 일종의 불가사의였다.
그렇게 알차게 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침내 제이슨이 나타났다.
제이슨 란즈헬 백작!
그 ‘육제후의 두뇌’ 볼프강 란즈헬의 후계자인 만큼 무거운 부담감을 짊어진 신임 가주의 등장이었다.
“오래 기다렸겠군.”
“아닙니다. 저택이 워낙 화려해서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하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니 그 정도의 기다림은 감수해지.”
제이슨은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하하, 그 점은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흥,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지. 용건이 뭔가?”
“조선소 설립 건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왔습니다.”
“그대 영지의 텍스 강 인근에 설립할 계획이라던 그것 말이군.”
“예. 초기 투자금은 6대 4로 저희가 6을 부담하고, 향후 조선소가 정상 운영 되면서 발생하는 수익 배분은 5대 5로 하겠습니다. 조선소 설립으로 저희 영지에 발생할 특혜를 감안한 배분입니다.”
“투자대비 수익 배분은 나쁘지 않군.”
“예. 결코 손해를 보시지는 않을 겁니다.”
“뭐, 나쁠 것 없지.”
제이슨은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저 성격에 곧바로 오케이를 할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결 조건이 두 가지 있다.”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영지의 텍스 강 유역에 서식하는 몬스터 문제가 처리된 후에 투자를 하겠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대 부친인 쿤트 자작과의 혼담이 성사된 후에 투자하겠다.”
“…….”
순간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제이슨은 히죽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대가 처음 조선소 얘길 꺼내면서 말했었지. 이 합작투자가 본 란즈헬 백작가가 왕실과의 협력 관계가 구축될 단초가 될 것이라고 말이야. 그 얘길 그대로 돌려주지. 서로의 긴밀한 협력 관계에 혼담보다 더 적합한 이벤트는 없지. 그렇지 않나?”
“예. 그야 그렇습니다만, 혼담 문제는 아버지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합니다. 저희 부친께서는 혼담 문제에 있어 정략적인 요소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이 혼담은 신부 측의 외모에 달렸습니다.’ 라는 말을 최대한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했다.
“아무튼 두 조건이 선행되어야 투자를 한다는 내 뜻은 확고하다.”
제이슨은 그 점을 못 박았다.
으음. 어쩌지?
나는 란즈헬 백작가를 레던 왕실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육제후, 즉 바덴 강 유역의 여섯 제후라는 파벌 자체를 분열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카르스 황제의 침공을 막기 위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
그리고 강력한 왕실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친 레던 왕국.
강력한 왕권 구축을 위해 육제후는 해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란즈헬 백작가를 끌어들이는 것. 결국 아버지와 미란다 제드를 혼인시켜야 한단 말이다.
그렇다고 미란다 제드가 어떤 여자인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혼담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아들이 정략결혼의 소재로 아버지를 이용해먹는 게 말이나 되냐?
……일단 여자를 봐야겠다.
나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곧 저녁 식사 때로군요.”
“그런가.”
“괜찮으시다면 저희 부부에게 백작 각하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그리고 이왕 함께 식사하는 것, 백작 각하의 여동생 분도 합석하면 어떨까요?”
그제야 제이슨은 내 의도를 눈치 챘는지 눈매를 날카롭게 떴다.
“신부를 직접 보고 혼담 여부를 판단하고 싶나 보군.”
과연 볼프강 란즈헬의 아들이라 이건가. 눈치가 빠르다.
제이슨은 기꺼이 수락했다.
“좋다. 정략적인 차원에서 진행한 혼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내 여동생 미란다에게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미란다 제드를 직접 볼 좋은 기회였다.
부디 아버지 취향이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