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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아버지의 혼담
하늘을 날아서 쿤트 가 저택으로 향했다. 2층 발코니가 눈에 들어왔다. 아서 형님과 레이라 형수, 그리고 내 귀여운 조카딸 엘레네가 보였다.
엘레네는 레이라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 모습을 아서 형님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먼저 올라갈게요.”
“그렇게 하시오. 나는 카록 녀석과 술 한 잔 하리다.”
“과음하지 마세요.”
“별 걱정을 다 하시오.”
아서 형님은 레이라의 등을 쓸어주었다. 정다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레이라가 엘레네를 안고 사라지자, 나는 발코니로 착지했다. 내가 하늘에서 불쑥 나타나자 아서 형님은 흠칫 놀랐다.
“이 녀석아, 정문으로 똑바로 안 다니느냐?”
“에이, 편한 하늘 놔두고 뭐 하러 그럽니까, 형님.”
“쯧쯧쯧.”
아서 형님은 날 보며 혀를 찼다. 언제 철들 거냐는 표정이었다.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에는 얼음통에 보관된 포도주와 와인글라스 두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포도주를 보며 물었다.
“딸까요?”
“기다려라. 아버님도 오신다고 하셨다.”
“웬일로 밤늦게까지 수련하지 않으시고요?”
“마스터가 되신 후로 삶에 여유가 생기신 것 같더구나. 치열함과 평온함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군요.”
하기야 오러 마스터란 게 무기만 잘 휘두른다고 오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닐 터. 그만한 정신적인 수양도 함께 되어야 한다. 그런 경지에 올랐으니 아버지의 정신적인 측면도 전보다 성장했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서 형님이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아아, 그래.”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요즘 수련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다. 전에 뮤트 공작 전하와 겨뤘던 일을 곱씹으며 명상을 하고 있다. 역시나 공작 전하는 생각하면 할수록 훌륭하더군.”
“그런 공작 전하와 팽팽하게 싸우신 아버님도 대단한 것 아닙니까?”
“난 아직 멀었다.”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내 말에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신 듯했다.
아버지는 문득 아서 형님에게 물었다.
“그런데 상의할 일이 있다고 들었다. 무슨 일인데 나까지 들어야 하는 것이냐?”
보통 아버지가 관여하는 영지 일이라고는 전쟁 관련된 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의아해하시는 건 당연했다.
“저도 궁금합니다.”
그러자 아서 형님이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에 혼담이 들어왔구나.”
“릭 형님에게요?”
내 물음에 아서 형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버님?”
“그렇다.”
우리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쏠렸다.
“나 말이냐? 허참.”
아버지는 겸연쩍은지 머리를 긁적였다.
하기야, 최근에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이룬 아버지는 현재 새로운 일등신랑감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위대한 무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이 현재 아내는커녕 첩 하나 없이 홀몸으로 지내고 있다. 그러니 다른 귀족가문들이 가만 놔두겠는가? 딸 가진 가문은 죄다 찔러보겠지.
게다가 아버지의 세 아들도 하나같이 쟁쟁했다.
왕실파 핵심 인물이자 차기 재상인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릭 형님은 그 뮤트 공작의 애제자로 장래에 오러 마스터가 될 가능성이 유력했다.
가장 평범하다 싶은 아서 형님도 쿤트 가문의 후계자로서 이미 영지를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내 덕분도 있다지만, 아서 형님이 집권하고부터 쿤트 자작령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분명 보통 통치력이 아닌 것이다.
자기네 딸이 아버님의 아내가 되면, 호적상이라도 우리들 세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대단한 옵션 아니냐!
내가 말했다.
“아버님께 들어오는 혼담이 한둘이 아닐 텐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러십니까?”
내 물음에 아서 형님은 한숨을 푹 쉬고는 웬 서신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서신을 보았다.
‘쿤트 자작 바스크의 위대한 성취에 축하를 표합니다.’ 라는 간단한 축하로 시작된 서신은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의 핵심 내용은 이러했다.
본 란즈헬 백작가의 미란다 제드와 귀 쿤트 가문의 가주 바스크와의 혼담을 원하는 바이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지금 란즈헬 백작가라고 쓰여 있는 것 맞지?
육제후의 일가(一家)인 란즈헬 백작가에게서 사돈 맺자는 제의를 받자니, 전생 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새로이 란즈헬 백작이 된 제이슨을 떠올렸다. 나는 그가 레던 왕실과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강수를 두었음을 알아챘다.
근데 이거, 자칫하면 24살짜리 새어머니가 생기겠군. 그 성격 나빠 보이는 제이슨과 사돈이 되고 말이야. 음, 우리 가문의 족보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내 착각이려나?
“무슨 내용인지 이리 줘봐라.”
“아, 예.”
나는 냉큼 서신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서신을 유심히 읽은 아버지는 뭔가를 유심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말문을 열었다.
“미란다 제드라는 이 여자 말이다.”
“예, 아버님.”
아서 형님과 나의 이목이 아버지의 다음 말에 집중되었다. 설마, 생각이 있으신 건가?
“예쁘냐?”
“크흠!”
“컥!”
아서 형님과 나는 순간 정신적인 타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저 양반이 근데?!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느냐? 당연한 질문 아니냐!”
“아, 뭐, 그야…….”
중요하긴 중요하지. 이왕 늦장가 가는 거, 예쁜 여자면 두말할 나위가 없지. 가뜩이나 오랫동안 독수공방을 하는 바람에 여자에 굶주린(?) 아버지 아닌가.
“그런데 이미 한 번 결혼을 했던 미망인이라는 점이 조금 걸리는군요. 물론 나이도 24살밖에 안 되었고, 그 란즈헬 백작가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지만, 아버지의 격에 맞는 혼담 상대인지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서 형님의 말에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여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다.”
“그게 뭡니까?”
아서 형님이 의아해져서 물었다. 나는 저 양반이 무슨 소릴 할지 대충 짐작이 간다.
“외모다.”
“흐음!”
아버지의 말에 아서 형님은 다시 한 번 신음을 했다.
아버지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여성관을 펼쳤다.
“출신 가문은 중요치 않다. 내가 이미 오러 마스터이고 내 아들들도 하나 같이 잘 나가는데 정략결혼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성품도 중요치 않다. 성품이 못된 여자라면 내가 몸소 버릇을 뜯어고쳐주면 된다. 그러니 젊고 예쁘면 그만이다. 그거면 된다.”
아니, 저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하지만 아버지다운 마초적인 여성관이었다.
아버지는 날 보며 말했다.
“카록. 네가 사람을 좀 볼 줄 아니, 네가 직접 가서 미란다 제드라는 여자를 보고 오너라.”
“…….”
나는 기가 막혔다. 사람 볼 줄 아는 거랑 예쁜 여자 알아보는 안목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데?!
하지만 그동안 고독하게 사신 아버지의 재혼이라고 생각하니, 짜증이 수그러졌다.
“게다가 네 정령술을 응용하면 그 여자 생김새를 상세하게 보여줄 수 있지 않으냐.”
아하, 그렇지. 그 점을 노리셨군!
미란다 제드를 보고 와서 흙으로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보여드리면 되니까.
“좋습니다, 아버님. 제가 아버님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님. 아버님은 어떤 타입의 여성을 좋아하십니까?”
내 물음에 아서 형님은 기가 막혀했지만, 아버지는 곧바로 대답했다.
“젊은 땐 몸매가 끝내주는 여자가 좋았지.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그런 여자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요?”
“지금은 조금 귀여운 타입도 마음에 든다. 예를 들면 며느리들 중에 시스 같은…….”
“아버님, 징그러운 말씀은 자제해주십시오. 제 사랑스런 시스를 언급하시다니, 순간 울컥했잖습니까.”
“흠흠, 역시 그건 좀 그랬지? 미안하다.”
아버지는 순순히 나에게 사과했다. 감히 내 귀염둥이 마누라를 들먹이다니!
“저, 저는 먼저 올라가보겠습니다.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져서…….”
성품이 올곧은 아서 형님은 더는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해쓱해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뒤로 아버지와 나는 포도주병을 따고 본격적으로 여성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오르자 아버지는 그간 살면서 겪은 여자 경험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들로서는 보통 정신력으로는 도무지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정신력은 이미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미있게 들었다. 아하하.
아무튼 란즈헬 백작가와의 혼담은 ‘일단 여자를 보고 판단하자’로 결론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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