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회: 9권 - 10장. 이사 -->
다음날, 나는 아버지와 아서 형님께 인사드리러 갔다. 마침 아버지는 오러 마스터에 올랐다고 하니 축하 한 마디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로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노움과 운디네와 공유된 감각에 오러 마스터의 기척이 느껴졌다.
호수처럼 거대하고 잔잔한 오러의 기운.
이것은 뮤트 공작이나 브리튼 공작에게서 봤던 오러 마스터 특유의 기척이었다.
정말 마스터가 되셨구나!
나는 감동에 벅차며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오, 왔느냐?”
“예, 아버님. 그간 회춘하셨단 얘길 듣고 잽싸게 찾아왔죠.”
“회춘은 무슨…….”
하지만 정말로 아버지는 30대 중반쯤 된 젊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언뜻 보면 아서 형님과 동갑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차, 이런 말 입 밖으로 꺼내면 아서 형님이 화내겠지? 아하하.
“어떻습니까? 오러 마스터가 된 기념으로 이 막내아들과 대련이나 한 판?”
“그럼 넌 네가 개발한 그 대 오러 마스터용 전법을 내게 쓸 테지?”
“물론이지요.”
“절대로 싫다.”
“왜요?”
“애비더러 오러 마스터씩이나 된 마당에 땅에 대고 삽질이나 하란 말이냐? 내 체면을 위하여 정령사와는 싸우지 않기로 다짐한 바 있다.”
릭 형님과 똑같은 소릴 하는군. 아무튼 서로 앙숙 같은데도 하는 짓은 부전자전이라니까.
“그나저나 아서가 네게 할 말이 있던 것 같더구나.”
“아서 형님이요?”
“그렇다. 패트릭이 엄청난 숫자의 유목민족을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하던데. 아서가 크게 당황한 걸 보니 어지간히도 숫자가 많았던 것 같다.”
으잉?
얼마나 많기에 아서 형님이 당황하고 그러지?
향후 50년간 쿤트 영지 서쪽의 황야지대를 빌려서 유목민족을 유치하기로 했었는데. 웬만한 숫자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의아해진 나는 아서 형님을 찾아가보았다.
아서 형님은 마침 식사를 마치고, 형수 레이라와 엘레네와 함께 오붓한 타타임을 보내고 있었다.
엘레네는 날 보자 꺄아 웃으며 고사리같은 손을 뻗었다.
“안녕, 우리 조카딸? 삼촌이 보고 싶었지?”
“꺄아아.”
“그래그래.”
나는 레이라에게서 엘레네를 받아들고 번쩍 안았다. 엘레네는 무척 좋아하였다.
“왔구나, 카록. 그렇지 않아도 네게 할 말이 있었다.”
“예. 패트릭이 혼트 제국에서 유목민족 무리를 데려오고 있다면서요?”
“그래. 내게 미리 소식을 전하며 양해를 구하더구나.”
“대체 몇 명이나 되기에 그렇게 당황하신 건데요?”
“6천.”
“에이 겨우 6천 밖에 안…… 예?!”
나는 기겁을 했다.
6천?
6백이 아니라 6천 명?!
“네게 서부 황야지대를 50년간 임대해주기로 한 사실은 기억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6천 명이나 되는 유목민족을 쿤트 영지에 들이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님,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죠. 저도 패트릭이 설마 그렇게 많이 데려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어쨌거나 영지의 인구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들은 모두 세금을 낼 것이고,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상인들 또한 영지에 세금을 낼 겁니다.”
“그렇긴 하다만 치안 문제도 있지 않으냐.”
“유목민족의 남성은 모두가 전사입니다. 즉, 콘돌 기병대 소속이 되지요. 확실한 군기를 확립시켜놓으면 유목민족들이 쿤트 영지 내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약속하지요.”
“그래, 그렇게 말하니 널 믿으마.”
다행히 아서 형님은 그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형제라서 이럴 땐 좋단 말이야.
아무튼 6천 명이나 되는 유목민족이 이리로 오고 있다니, 콘돌 기병대의 전력도 그만큼 상승한 것임은 틀림없었다. 혼트 제국의 내전 덕분에 내 힘이 점점 강해지는 셈이었다.
***
제이슨 란즈헬은 부친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르고 가주가 되었다.
고(故)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유언으로도 남겨놓았고 생전에 이미 정리를 해놓은 상황이니 후계자 다툼이 생길 리 없었다.
제이슨이 란즈헬 백작가의 가주가 되고 백작의 작위를 계승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혼트 제국 내전의 여파를 수습하는 일이었다.
육제후는 혼트 제국의 내전에 깊이 관여하였고, 특히나 탈라크 대왕으로 하여금 독립을 꿈꾸게 한 데에는 란즈헬 백작가의 개입이 컸다.
내전이 카르스 황제의 압승으로 끝난 이상, 란즈헬 백작가의 입장에서는 내전에 개입했던 모든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육제후가 반란군을 몰래 지원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중요한 점은 물증을 없애서 국제분쟁의 빌미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이슨은 그 흔적들을 지워나가면서, 마지막으로 그 일을 주도한 주요 책임자까지 축출하기로 했다.
바로 ‘란즈헬의 청소부’라 불리는 남자, 에반 테일러 남작을 란즈헬 백작가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제이슨은 에반을 불러놓고 말했다.
“아버님은 유언에 널 중용하라고 하셨지.”
“…….”
“하지만 난 그냥 네놈이 싫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너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거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에반은 제이슨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설령 쓸모 있는 인재라 해도 결코 자신의 곁에 두지 않을 그런 인간이었다.
“그럼 어디든 가버려라. 내 눈앞에서만 사라져라. 널 보면 어리석었던 내 과거가 자꾸만 생각나서 짜증이 치미거든.”
“……강녕하십시오.”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에반은 그대로 란즈헬 백작가를 떠나버렸다.
떠나는 에반의 모습을 창문을 통해 흘깃 본 제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이제 자신의 시대였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란즈헬 백작가를 이끌 것이다.’
제이슨은 바보가 아니었다. ‘육제후의 두뇌’ 볼프강 란즈헬의 맏아들이며 후계자였다. 상황 파악을 하는 눈은 갖고 있었다.
‘이제 육제후끼리 똘똘 뭉쳐 왕실과 대립하던 시대는 끝났다.’
내전에서 승리하고 유목민족의 힘을 손에 넣은 카르스 황제는 다음 타깃으로 바로 이곳, 바덴 강 유역을 노릴 것이었다.
그 마수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레던 왕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왕실과 란즈헬 백작가를 잇는 연결고리로는 제이슨도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바로 카록 리간드 자작이지.’
카록과는 조선소 설립에 합작투자를 하면서 관계를 맺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연결고리로 조금 부족했다.
보다 더 깊은 유대관계가 필요했다.
‘쿤트 자작가!’
쿤트 자작가는 왕실파 최고의 대가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놓으면 왕실과의 접점도 그만큼 더 깊어진다.
‘혈연관계만큼 긴밀한 관계도 없지.’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20대 초반쯤 된 젊은 여인이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과 작은 체구, 그리고 동그란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려워하는 얼굴로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부르셨어요, 오라버니?”
“그래, 미란다.”
작고 귀여운 여성의 이름은 미란다 제드.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차녀로, 17세에 제드 자작가에 시집을 갔으나 4년도 되지 않아 남편을 병으로 여의고 미망인이 된 여인이었다. 그 뒤로 제드 자작가는 시동생이 이어받았고, 그녀는 친정인 란즈헬 백작가로 돌아왔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24세였다.
“네가 남편을 여읜지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네, 오라버니.”
“마침 내가 네 새로운 혼처를 생각해두었다.”
그 말에 미란다는 겁을 집어먹었다. 오빠가 자신을 정략결혼의 소재로 써먹을 생각임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염려마라. 네게도 결코 나쁜 혼처가 아니니까.”
“제, 제 혼담 상대가 누군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제이슨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바스크 쿤트.”
<9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