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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이사
쿤트 성에 이르렀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쿤트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내 저택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고 형님이고 뭐고 일단 내 마누라들이 우선이었다.
“얘들아, 나 왔다! 혹시 벌써 자는 건 아니지?”
나는 저택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덜컹!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며 줄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꺅! 단주님!”
“부탁이니까 이제 여보라고 불러줄래?”
“여보―!”
그렇게 외치며 줄리아는 나에게 달려왔다.
얘야.
그 돌진 속도를 조금만 낮춰주지 않으련? 마치 랜스 차지(Lance charge) 같잖니.
퍼어억!
줄리아는 결국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격렬하게 내 품에 안겨들었다.
피를 토할 듯한 충격이 밀려왔지만 나는 남자로서 꾹 참고, 줄리아를 안아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남편님 일하느라 바빴잖니. 공도 많이많이 세우고 왔어요. 조만간 너희는 백작부인이 된단다.”
“꺅! 출세코스 만세!”
기뻐서 방방 뛰는 줄리아. 음, 너무 솔직해서 보는 내가 다 흐뭇해질 정도군.
그때, 2층의 창문이 덜컥 열렸다.
열린 창문으로 시스가 배꼼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요정처럼 예뻤다. 어휴, 누구 마누란데 저렇게 자다 깬 얼굴도 깜찍할까.
“잘 있었니, 시스? 여보님 왔다.”
그러자 시스는 놀랍게도 2층 창문에서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허억!”
노움! 노움!
나는 급히 어스 핸드 다섯 개를 만들어서 추락하는 시스를 받아냈다.
안전하게 착지된 시스는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와 안겨들었다.
뻐억!
커흑…….
역시나 강력한 돌진력이었다. 하지만 나는 간신히 버텨냈다. 두 마누라를 안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잘 있었지?”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시스.
“밥도 잘 먹었고?”
끄덕끄덕.
“줄리아가 괴롭히지도 않았고?”
끄덕끄덕.
“잠깐! 누굴 성질 나쁜 시어머니 취급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해주면서 시스 걱정만!”
“어휴, 그래그래. 우리 질투쟁이도 이러 오렴.”
나는 줄리아와 뺨을 맞대고 부비부비 비볐다. 스킨십에 약한 줄리아는 금세 얼굴이 빨개졌다.
우리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아직 밥을 안 먹었다고 하니 시스가 식사 준비를 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법을 응용한 요리를 하는지 부엌에서 마나의 움직임이 정령의 감각에 포착되곤 했다. 잠시 후, 시스는 팬케이크를 무려 30장이나 만들어왔다. 어휴, 참 여전히 통이 크구나, 우리 시스.
줄리아는 2장을, 나는 8장을, 나머지 20장은 시스가 먹어치웠다.
열심히 먹는 시스를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배부른 표정으로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줄리아가 사랑스럽다. 사랑이란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설거지는 운디네에게 부탁해서 간단히 처리하고,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들기며 커다란 소파에 한데 엉켜 누웠다.
시스와 줄리아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 내가 물었다.
“나 없는 동안 별일 없었지?”
“시아버님께서 오러 마스터가 되셨잖아요.”
“응, 그건 알아.”
“정말 대단해요. 뮤트 공작과 동급인 대단한 무인이 우리 시아버님이라니! 이제 마음에 안 드는 녀석 있으면 시아버님에게 이르면 되겠어요, 오호호!”
“……얘야, 오러 마스터는 마음에 안 드는 놈 두들겨 패는 깡패가 아니란다.”
물론 아버지 성격이 조금 깡패 같긴 하지만.
“그런데 시아버님께서 점점 젊어지시더니, 세상에! 지금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시는 거 있죠?”
“헐, 완전히 회춘하셨네.”
“그러게요. 오러 마스터에다가 몸도 젊어졌겠다, 얼굴도 남자답게 잘생겼겠다, 아내 없는 홀몸이겠다, 자식들도 하나같이 훌륭하겠다, 어휴 말도 마세요. 지금 사방팔방에서 혼담이 들어오고 있어요.”
“아버지한테?”
나는 놀라 물었다.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멀리 오리엔 왕국의 귀족가문에서도 혼담이 들어올 정도라니까요. 17살짜리 예쁜 딸을 줄 테니 아들을 제자로 삼아달라나 어쨌다나. 아무튼 난리도 아니에요. 시아버님이 사교계의 여자들 사이에서는 화제의 중심이라니까요.”
“그것 참 대단하네. 중년기에 다시 찾은 전성기라니.”
“덕분에 레이라 형님이 요즘 어깨에 힘주고 다니시잖아요. 친구들한테서 시아버니 좀 소개시켜달라고 난리도 아니래요.”
“헐…….”
잘하면 나보다 나이 어린 새어머니 하나 생기겠군. 뭐, 전생의 마누라가 형수가 된 판국이니, 이젠 어떤 가족관계가 생기든 감당할 자신이 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뭔가가 생각나서 슬그머니 줄리아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버지랑 나랑 둘 중에 누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해?”
“시아버님이 훨씬 잘생긴 게 당연하잖아요. 턱선 굵고 눈도 부리부리하시고. 그에 비하면 단주님은 평범하죠.”
가차 없이 대답하는 줄리아.
“…….”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얼굴로 지다니! 용납 못해!
나는 삐쳐서 줄리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자 내 가슴에 찰싹 안겨 있던 시스가 말했다.
“여보가 더 잘생겼어.”
“그치? 내가 훨씬 낫지?”
“응.”
“어휴, 역시 우리 시스가 최고야!”
나는 시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제야 줄리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뜨악한 얼굴이었다.
줄리아는 뒤늦게 변명처럼 말했다.
“에이, 그냥 농담 한 번 해본 거예요. 당연히 단주님이 훨씬 낫죠. 아무렴 더 젊은데요.”
“흥, 이제 와서? 난 시스랑 놀 테니 너는 잘생긴 시아버님에게 놀아달라고 하렴.”
나는 시스를 꼭 끌어안은 채 줄리아에게 툴툴거렸다.
“아이잉, 여보.”
줄리아는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아양을 떨며 내 등에 찰싹 붙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에 내 질투심이 스르륵 녹아들었다. 이게 어느새 미인계를 습득했구나. 무서운 것.
나는 슬그머니 다시 물었다.
“누가 더 잘생겼어?”
“단주님이요.”
“단주님?”
“아니, 여보요.”
“그치? 내가 훨씬 낫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지?”
“…….”
“왜 대답이 없어?”
“마, 맞아요. 이 세상에서 여보가 가장 잘생겼어요.”
말 더듬지 마.
“드디어 얘가 철이 들었군.”
나는 줄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줄리아는 푸훗 웃고는 내 뺨에 키스를 했다.
그런데 줄리아는 문득 놀라서 내 뺨을 슥슥 만져보더니 물었다.
“단주, 아니 여보.”
“응.”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어요? 어머머, 이마에 하나 있던 주름살도 없어졌네? 대체 무슨 화장품을 쓰신 거예요?!”
줄리아는 연신 내 얼굴을 더듬거리며 경악했다.
나는 운디네가 내 몸의 체액에 깃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운디네의 치유의 힘이 내 몸을 지배하다보니 자연히 나쁜 기운이 사라지고 피부는 점점 좋아진 것이다.
“어머나! 그럼 단주님은 저절로 대륙 최고의 피부 관리를 받는 거네요?”
“뭐, 그렇지.”
“나도 해줘요!”
“으음, 될까?”
나는 운디네를 시켜서 줄리아의 전신에 치유의 힘을 쏟아 부었다.
줄리아는 상쾌함을 만끽하고는 자기 핸드백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예전엔 자기 외모에 신경도 안 썼는데, 결혼하더니 얘가 이제야 철이 들었네.
나는 내친 김에 시스에게도 치유를 걸어주었다.
시스는 전혀 신경 안 쓰는 눈치였지만, 줄리아는 뾰루지가 사라졌다며 몹시 좋아했다.
“보렴. 남편님이 상급 정령사면 이렇게 피부 관리도 해주는데, 오러 마스터는 못하잖니.”
줄리아는 그런 날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어휴, 그만 좀 하세요. 왜 자기 아버지를 질투하고 그러세요.”
“흥. 그래 나 원래 쫀쫀한 질투쟁이란다.”
“깔깔깔!”
내 말에 줄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줄리아는 내게 더 가까이 밀착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여보가 추천서 딸려서 보내준 닐 페리 말이에요. 제법 쓸 만하던데요. 의욕도 있고요.”
“응. 경영감각이 있는 사람이니까 잘 가르쳐놔. 나중에는 네가 자리를 비워도 카록 병기점을 대신 운영할 정도는 될 수 있을 거야.”
“네. 그렇지 않아도 그 사람을 부사장 자리에 앉혀놓은 덕에 제 일거리가 확 줄었어요. 처음 일주일만 옆에 붙어서 업무 내용을 가르쳐줬더니, 다음 주부터는 알아서 척척 해내더라고요.”
“그치?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난 끝내준다니까.”
그러다가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줄리아.”
“네, 여보.”
이제 여보 소리가 입에 착착 붙나보네. 귀여운 것.
나는 줄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닐 페리에게 사장 업무 내용도 가르쳐.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널 대신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 사람한테 카록 병기점을 맡기게요? 그럼 저는요?”
“나랑 같이 레던 왕성으로 이사를 가야지.”
“정말요?”
줄리아는 눈을 빛냈다.
“내가 이제 백작이 될 테고, 조만간 재상이 될 거야. 그럼 넌 내 부인으로서 잘 내조해줘야지. 시스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도 모르니까.”
“꺅! 이제 재상 부인이 되는 거예요? 만세!”
줄리아는 방방 뛰며 기뻐했다.
정말로 이제 곧 재상으로 임명될 듯했다. 그럼 레던 왕성에서 지내야 하는데, 줄리아만 여기에 놔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 에릭 국왕에게 부탁해서 레던 왕성 근처에 땅도 임대했으니, 이제 저택만 지으면 된다. 나는 지금처럼 아담하고 소박한 집도 상관없지만, 명색이 재상이면 다른 귀족들이 비웃지 않을 으리으리한 저택이 필요했다.
“저는 그렇게 큰 저택은 바라지 않아요.”
“그래?”
“네. 그저 지금 이 저택의 10배쯤?”
“…….”
이거의 10배면 충분히 크잖니, 얘야.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마누라들과 이러쿵저러쿵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