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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222화 (222/529)

<-- 222 회: 9권 - 8장. 채결 -->

‘애당초 내가 낄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남자가 가장 비참할 때는 자신의 무능이 드러났을 때다. 클레비우스 백작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지위였다.

‘이, 이대로라면 왕실에서 쫓겨나도 만다!’

클레비우스 백작은 열심히 잔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대책은 없었다. 함께 내전 개입을 주장했던 상서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 생각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비겁한 놈들에게 의리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보나마나 자신들까지 물갈이를 당할까봐 몸을 사릴 것이다.

‘육제후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뻗어볼까?’

하지만 그것도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혼트 제국의 내전 결과로 곤란해진 건 육제후도 마찬가지였다. 내전을 종용하고 티란 탈라크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주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실패하지 않았는가.

물로 카르스 황제의 6군단이 전멸한 게 성과라면 성과였지만, 카르스 황제는 대신 유목민족의 힘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즉, 처참한 실패였다. 그런 마당에 자신에게 도움을 줄 여유 따위도 없을 것이었다.

“무슨 대책을 찾아야 해! 이렇게 물러날 순 없어! 내 정치인생은 이렇게……!”

바로 그때였다.

하인 하나가 노크를 하곤 그에게 말했다.

“주인님, 왕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신다고 합니다.”

“허억!”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클레비우스 백작은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에릭 국왕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명백했다.

‘빌어먹을. 이 첩보가 벌써 국왕의 귀에도 들어갔구나!’

이미 늦었다.

‘이렇게 된 이상 국왕 폐하와 재상 각하께 아량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용서를 빌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면 어쩌면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현재 국왕에게는 사람이 별로 없지. 날 사퇴시키면 내 후임으로 군사부상서 자리에 앉힐 믿을 만한 인재가 없다. 내가 납작 엎드려서 용서를 빌면서 잘만 구슬리면…….’

에릭 국왕은 아직 젊다. 그리고 듀론 후작은 너무 늙었다. 그 둘을 구슬리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클레비우스 백작은 또 다시 좋은 쪽으로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행복한 앞날을 꿈꾸고 있었던 그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좌절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클레비우스 백작은 터덜터덜 왕궁으로 향했다.

국왕 집무실로 향하는 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대전(大殿)에 이르러 복도를 지나니, 얼마 전까지 뻔질나게 자신을 찾아와 얼굴을 디밀던 왕실 관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알은체도 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벌써 소문이 돌았구나!’

하여튼, 국제정세에는 어두운 주제에 자기네들의 안위와 관련만 되면 눈치가 비상해지는 족속들이었다.

‘역겨운 놈들.’

자신도 그와 같은 부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클레비우스 백작이었다.

듀론 후작과 충돌하고 나니, 마치 스스로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싸운 투사로 여기는 착각에 빠진 클레비우스 백작이었다. 이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을 정도로, 잠깐 꾸었던 꿈은 너무나 달콤했던 것이다.

하지만 망상은 에릭 국왕과 마주한 순간, 끝이 나버렸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군사부상서.”

“……예?”

클레비우스 백작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에릭 국왕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 약속대로 그대는 사퇴해주어야겠다.”

“하, 하지만 폐하.”

“아무 염려 할 필요 없네. 그대 후임으로 적임자를 이미 찾았으니까.”

“하지만 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클레비우스 백작. 그만두게.”

듀론 후작이었다.

클레비우스 백작은 멍하니 노재상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입장에서야 갑작스러운 상황이겠지만, 폐하의 입장에서는 전혀 갑작스럽지 않네. 처음부터 예상했던 상황인 게야.”

“…….”

클레비우스 백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말 그대로였다.

에릭 국왕 측근은 내전이 시작될 때부터 이런 상황을 추측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전 개입에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고…….

“앞을 내다보는 판단력이나 성실히 폐하를 따르는 충성심, 둘 중 하나만이라도 있었더라면 자네가 군사부상서 직에서 물러날 일은 없었을 걸세. 하지만…….”

듀론 후작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묻겠네. 내전이 발생해서 작금에 이르기까지, 자네의 신념에 따른 판단은 어디에 있었던가? 권력대립과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다가 여기에 도달하지는 않았는가?”

“…….”

“물론 그런 자네를 비난하는 것은 아닐세. 대부분의 사람이 여러 가지 주변 환경에 휩쓸리며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일직선으로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을 원하신다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그간 수고가 많았네. 자네 또한 그간 군사부상서로서 열심히 살아온 인간이었음을, 적어도 이 늙은이는 기억하겠네.”

“……그동안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꾸하는 클레비우스 백작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났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클레비우스 백작이 힘없이 사라지고 난 후, 듀론 후작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휴우, 리간드 자작을 흉내 내 보았습니다만 완곡하게 포기시키기도 쉽지는 않군요. 혹시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애걸복걸하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재상의 말대로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유효한 것 같소.”

“그보다 문제는 인재의 영입입니다. 고위 관리들을 숙청하려면, 그들을 대체할 믿을 만한 인재들을 미리 영입해두어야 합니다.”

“그 점을 생각해봤는데, 후임 군사부상서로는 제론 데커드가 어떻소?”

에릭 국왕의 제안에 듀론 후작은 깜짝 놀랐다.

“데커드 준남작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허허허. 분명 제론은 군사전략적 분야에 뛰어난 식견이 있으니 군사부의 상서로 부족함은 없습니다만, 나이도 너무 젊고 작위도 준남작이라……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가 될 듯싶습니다.”

“일부러 파격을 준 인사요. 적당히 급에 맞는 작위를 가진 나이든 인물을 데려와 앉혀도 되지만, 솔직히 제론 데커드나 루이 콘체른 같은 인재에게 빨리 높은 직급을 주어서 큰일을 감당하게 하고 싶소.”

“루이 콘체른까지도 말입니까?”

“그렇소. 꼼꼼하고 정치모략에 능한 루이 콘체른에게는 재정부상서 밴델 자작을 해임해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할 것이오.”

“루이 콘체른은 아예 작위도 없습니다, 폐하.”

“제론과 루이 둘 다 작위를 주면 그만이오. 제론 데커드는 자작에, 루이 콘체른은 남작에 임명할 거요. 둘 다 이번 일에 공이 있었다고 한다면 명분도 충분하지. 루이의 경우는 재정부의 부상서로 앉혀놓고 상서를 공석으로 해놓으면 될 것이오.”

듀론 후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에릭 국왕은 과연 인사 분야에서 뛰어난 안목을 자랑하였다.

제론도 루이도 분명 왕실 최고위 관리직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인재들이었다.

더불어 파격적으로 젊은 두 사람을 최고위 관리로 임명함으로서 왕실에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명분이 생긴다.

가뜩이나 혼트 제국 내전 건에서 모든 상서들이 오판을 했으니, 그들을 모조리 쳐내고 물갈이를 단행해도 문제될 게 없었다. 두 젊은 인재의 존재는 고위 관리들에게 훌륭한 압박카드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간드 자작이 데려온 두 사람이 최고위 관리로 수직상승한다면, 당연히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운 리간드 자작은 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겠군요.”

“바로 그것이오.”

듀론 후작과 에릭 국왕은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빛냈다.

차기 재상!

카록을 재상으로 만들려는 두 사람의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카록이 오리엔 왕국에서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럼 카록을 백작으로 승작시키고 재상에 임명하면 되니까!

“폐하, 이 늙은이는 언제든 자리를 양보하고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더 참고 수고해주시오, 재상. 아직 짐은 재상이 필요하오.”

“잘 쉬던 늙은이를 데려오셔서 이리도 고생시키다니. 벌 받으실 겁니다, 폐하.”

“하하핫! 벌이야 나중에 달게 받겠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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