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회: 9권 - 7장. 진면목 -->
탈라크 대왕이 말을 이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부하에게 투구와 망토까지 주고서 달아나버린 겁쟁이다! 우리 자랑스러운 바람의 왕국의 전사들이 겁에 질려 꽁꽁 숨어 있는 바보가 지키는 성도 공략할 수 없단 말이냐?!”
그러자 추격에 찬성이었던 몇몇 족장이 이때다 싶어 동조하고 나섰다.
“오오! 대왕의 말이 옳소!”
“그깟 성 하나 공략 못할 정도로 우리는 겁쟁이가 아니오!”
탈라크 대왕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우리는 바람의 왕국을 건국할 용사들이다. 성 하나 공략 못할 정도로 어디 나라를 세울 수 있겠느냐! 추격한다! 그 황제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는 그날까지 공격, 공격이다!”
“오오오!”
족장들은 흥분에 차서 호응했다. 계속된 승리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진 그들이었다.
물론 신중한 입장을 가진 족장들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보시오, 게덴 족장. 우리들 너무 흥분한 것 같지 않소? 장기전으로 가야 승리할 수 있다고 육제후가 당부하지 않았소.”
60대 초반의 나이든 달탄 족장의 말에 게덴 족장이라 불린 중년 사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구려. 혹시나 이 모든 게 황제의 유인책이면 어쩔지 걱정이오. 발라트 성을 공격하겠다니, 우리가 언제부터 공성전에 이렇게 자신 있었단 말이오?”
“으음, 아무래도 말려야겠소.”
“그만두시오.”
게덴 족장은 달탄 족장을 제지했다.
“왜 그러시오?”
달탄 족장의 물음에 게덴 족장은 한숨을 쉬며 흥분한 탈라크 대왕과 족장들을 턱짓했다.
“저 꼴을 보시오. 우리가 한 마디 한다고 먹혀들겠소? 탈라크 대왕의 성격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우리를 겁쟁이라고 매도하기만 할 거요.”
“으음…….”
달탄 족장은 신음을 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 두 족장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조차도 이틀 뒤에 벌어진 사태에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발라트 성의 동태를 정찰하고 돌아온 전사의 보고 때문이었다.
“제국군이 성을 버리고 철수하고 있습니다! 황급히 달아나려는 눈치였습니다!”
“뭐라고?”
탈라크 대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족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발라트 성!
유목 민족의 위협으로부터 황실을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성체. 게다가 이번 전쟁의 거점이 아닌가.
그런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니? 황제가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족장들이 웅성거릴 때, 탈라크 대왕은 느닷없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모두의 시선이 탈라크 대왕에게 집중되었다.
탈라크 대왕은 모두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을 때부터 용맹무쌍하게 싸웠던 자가 있느냐?”
족장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용맹해도 처음에는 제 구실을 못하지.”
“처음으로 적을 죽이고는 얼어 있었지.”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다가 말에서 떨어질 뻔했어.”
그러자 탈라크 족장이 계속 말했다.
“그렇다. 누구나 처음으로 전쟁을 겪으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겁을 집어먹지. 하물며, 카르스 혼트는 병약한 애송이! 이미 두 번이나 쓴맛을 봤으니 겁을 먹을 만도 하지 않으냐?”
“그렇군.”
“겁이 날 법도 하지.”
족장들이 동의했다.
탈라크 족장은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겁쟁이 자식은 한 술 더 떠서 성까지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 주제에 직접 전쟁터에 기어 나오다니, 그런 놈을 황제로 둔 혼트 제국이 불쌍하지 않으냐!”
이에 다른 족장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겁쟁이 황제 놈!”
“겁에 질려서 실책을 연발하는군!”
족장들은 카르스 황제가 겁을 먹고서 발라트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한 족장이 나섰다.
바로 내내 우려를 하고 있던 달탄 족장이었다.
“우릴 유인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대왕! 겁이 나면 그 튼튼한 성 안에 숨었지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자 탈라크 대왕은 불쾌해졌다.
자신의 말에 반대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탈라크 대왕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계속 승승장구를 하고 있어서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달탄 족장의 말은, 카르스 황제가 우릴 유인하려고 자기 거점인 발라트 성까지 내줬다는 뜻이로군? 오오, 그럼 6군단이 우리에게 전멸한 것도 알고 보니 전부 미끼였겠군? 참으로 놀라운 책략이군!”
탈라크 대왕의 비아냥거림에 다른 족장들도 따라 웃었다.
무시를 당한 달탄 족장은 얼굴을 붉히고는 뒤로 물러났다. 게덴 족장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반대 의견이 없자 탈라크 대왕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발라트 성을 접수한다! 빈집털이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지.”
그리하여 반란군은 쾌속으로 발라트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원이 기마병인 유목 민족 전사들이니 진군 속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발라트 성이 눈에 보이는 거리에 이르자, 탈라크 대왕은 달탄 족장에게 말했다.
“달탄 족장! 그렇게 우려스럽거든 직접 가서 한번 함정인지 아닌지 살펴보지 그런가?”
그 말에 다른 족장들이 킬킬거렸다.
달탄 족장은 순간 노기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알겠소.”
달탄 족장은 자신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발라트 성으로 달렸다.
그리곤 한 시간쯤 뒤에 돌아와 보고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소. 매복은 없는 것 같소.”
그러자 탈라크 대왕은 크게 웃었다.
“크하하! 봤느냐? 아무도 없단다.”
“와아아아!”
탈라크 대왕과 반란군은 순식간에 발라트 성을 점령하였다. 성문까지 열려 있었으니 점령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돈 될 만한 것을 샅샅이 찾아봐라!”
탈라크 대왕은 마치 약탈 나온 것처럼 외쳤다.
유목 민족 전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발라트 성 내부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량의 식량이 나왔고, 반란토벌군의 군자금으로 추정되는 돈도 나왔다.
탈라크 대왕을 가장 기쁘게 한 것은 대량의 술이었다.
“크흐흐, 이기고 나서 축배를 하려고 챙겨두었던 모양이군. 카르스 황제가 이번 전쟁에서 잘 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우리를 위해 술을 남겨둔 것이다! 황제 만세다!”
“와하하!”
“황제 만세!”
술은 반란군 전부가 마시기에 충분했다. 식량도 잔뜩 있었으니 잔치를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바탕 술판이 벌어졌다.
전사들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탈라크 대왕의 용기와 결단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족장들 역시 곧 건국될 바람의 왕국의 요직을 꿈꾸며 달콤한 망상에 빠졌다.
하지만 그 술판에 끼지 못하는 두 사람도 있었다.
바로 달탄 족장과 게덴 족장이었다.
달탄 족장은 게덴 족장에게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는 못 참겠소. 나는 이만 빠지리다.”
“빠지다니, 설마……?”
놀란 게덴 족장에게 달탄 족장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큰일이 나기 전에 어서 여기서 달아나야겠소.”
“그게 무슨 소리요, 달탄 족장.”
“황제가 식량을 놓고 간 것까지는 이해하겠소. 워낙 양이 많으니 가지고 달아날 수가 없었겠지. 하지만 재물과 술이라니. 그 많은 술이라니! 그야말로 우리보고 실컷 마시고 놀라는 배려가 아니오. 난 머저리가 아니니 이곳에서 달아나야겠소.”
그제야 게덴 족장의 얼굴에도 심각한 빛이 어렸다.
“듣고 보니 정말 함정 같소.”
“게덴 족장도 목숨을 보전하고 싶거든 이곳을 빠져나가시오. 난 갈 거요. 서둘러 내 부족민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야 하오.”
달탄 족장은 이미 결심이 확고했다. 이에 게덴 족장도 황급히 말했다.
“같이 갑시다!”
“그러시겠소?”
“암. 마침 갈 곳도 알고 있소.”
“갈 곳이라니?”
“우리 부족이 의탁할 곳이 있단 말이오.”
그 말에 달탄 족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또한 가장 고민하던 게 살아갈 장소였다. 이 혼트 제국 어디에 부족민들을 데려가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게덴 족장이 말했다.
“카록 상단이라고 들어봤소?”
“듣다마다. 얼마 전에 탈라크 대왕에게 대량의 곡물을 판매한 그 상단 아니오.”
“그들이 갈 곳 없는 유목 민족을 거둬주고 있다고 들었소.”
“그것이 정말이오?”
“탈라크 부족의 서열 3위의 전사였던 발락을 기억하시오? 탈라크 대왕의 뜻을 거슬렀다가 추방당했잖소. 그들이 모두 카록 상단을 통해서 살 곳을 얻었다는 소문이 있소. 가족들까지 전부 말이오.”
“오오, 그럼 우리도 받아주겠구려?”
“우리는 숫자가 너무 많아서 좀 걱정이긴 하지만, 카록 상단주는 대단한 부자라 몇 명이든 받아줄 것이오. 일단 가봅시다. 혹여나 받아주지 않는다면, 별 수 없잖소. 그땐 눈 딱 감고 카르스 황제에게 달려가 엎드려 자비를 구할 수밖에.”
“음, 그럽시다.”
달탄 족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달탄 족장과 게덴 족장은 자기 부족의 전사들을 데리고 몰래 발라트 성을 빠져나갔다. 그 숫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지만, 진탕 술판에 빠진 반란군은 눈치채지 못했다. 반란군의 군기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술판은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반란군은 사방으로 흩어진 혼트 제국군이 빠른 속도로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큰일이다!”
“적이다!”
발라트 성에 주둔 중인 반란군 사이에 큰 소란이 벌어졌다. 전사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다른 동료들을 깨우는 등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탈라크 대왕은 숙취에 찌든 얼굴로 성벽으로 나왔다.
충격적인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탈라크 대왕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족히 10만 명은 되어 보이는 대군이 발라트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