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회: 9권 - 7장. 진면목 -->
클레비우스 백작은 파티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혼트 제국 내전이라는 중대 사건이 없었으면 파티를 아주 성대하게 열었을 것이다. 미래의 실세로 떠오르는 자신과 연줄을 만들어보겠다고 수많은 정계 인사가 파티에 참석할 터였다.
파티를 열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할 수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클레비우스 백작은 이미 많은 손님이 찾아와 주고 간 선물들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흐흐흐. 좋으시겠소, 클레비우스 백작.”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년 사내는 바로 재정부상서 밴델 자작이었다.
‘흥, 약삭빠른 녀석이.’
클레비우스 백작은 내심 밴델 자작이 못마땅했다.
자신이 듀론 후작과 충돌했을 땐 찍소리도 안 해놓고는, 뒤늦게야 다시 혼트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위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왕실 재정부의 상서였다.
밴델 자작도 슬슬 자신을 차기 실세로 인정하는 눈치이니, 타협해서 좋은 관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좋을 게 뭐가 있겠소. 나는 왕실의 관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거늘.”
“참으로 훌륭하시오. 그런데 혼트 제국 쪽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소?”
“카르스 황제가 두 차례나 연거푸 패전을 하고 후퇴하고 있소. 탈라크 족장을 위시한 유목 민족 세력이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다고 하더군.”
군사부상서 클레비우스 백작은 기뻐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에 재정부상서 밴델 자작 또한 흥분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내 이럴 줄 알았소! 카록 그 애송이 놈의 말만 믿고 폐하께서 실수하신 게요. 이제라도 유목 민족 독립 세력과의 동맹을 추진해야 하오. 쯧, 비제 자작 그 친구도 안 됐군. 조금만 더 참고 버텼으면 사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재상 각하는 물론이고, 정세를 크게 오판한 리간드 자작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오.”
“쯧쯧쯧, 그깟 애송이를 믿은 탓에 폐하와 듀론 재상 각하의 위신이 추락하게 생겼군. 이제라도 우리들이 레던 왕실을 바로잡읍시다.”
클레비우스 백작과 밴델 자작은 서로를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
카르스 황제는 11군단만을 이끌고 간신히 근거지인 발라트 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발라트 성에는 의외의 손님이 카르스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검정색 갑옷을 하고 있는 37명의 무리였다.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털보 장한이 성큼성큼 카르스 황제 앞에 다가와 부복했다.
“폐하! 신 륭겐 후작과 흑십자 기사단 36명,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11군단의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흑십자 기사단.
그들은 륭겐 후작이 이끄는 기사들로 36인 모두 오러 엑스퍼트인 최강의 집단이었다. 흑십자(黑十字)란 이름은 륭겐 백작이 등에 걸고 다니는 거대한 검정색 투 핸드 소드를 뜻했다.
구스파트 륭겐 후작!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는 혼트 제국에 3인밖에 없는 오러 마스터 중 한 사람이었다.
막강한 실력은 물론이고, 싸움을 굉장히 좋아해서 혈기왕성한 20대 시절에는 신분을 감추고 용병 노릇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혼트 제국의 내전이라는 큰 전쟁을 놓칠 리 없었다.
본래는 반란토벌군에 끼지 못해서 크게 아쉬워했던 륭겐 후작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전쟁에 참전하면 황명을 무시한 셈이 되기 때문에 자제해야 했다.
그러다가 카르스 황제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참전을 할 좋은 명문이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냉큼 달려온 것이다.
“폐하께서 위기에 처하셨다고 하기에 앞뒤 안 가리고 달려왔습니다. 급히 오느라 많은 병력을 데려오지는 못했으니 모쪼록 이해해 주십시오.”
“그대가 이끄는 흑십자 기사단은 그 자체로 능히 일개 군단에 필적하니 지원군으로 손색이 없지. 하지만 짐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예?”
“오히려 거의 다 이겼다.”
카르스 황제의 말에 륭겐 후작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웃었다.
“무언가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이 륭겐이 괜한 오지랖을 떨었나 봅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온 충정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 이왕 온 것, 짐과 함께 승리를 감상하도록.”
“감사합니다. 가만히 구경만 하겠습니다. 다 된 식사에 스푼을 얹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말입니다.”
싸움은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예의까지 모르는 륭겐 후작은 아니었다. 전공을 다투는 수많은 군단장들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날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하도록.”
륭겐 후작은 이윽고 카르스 황제의 옆에 있는 할슈타인 백작을 바라보았다.
오러 마스터인 이상 같은 오러 마스터인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즘 명성 꽤나 날리는 할슈타인 백작인가?”
“명성은 모르겠으나, 제가 할슈타인 백작이 맞습니다.”
“크하핫, 듣던 대로 겸손한 친구군! 일전에 레던 왕국의 뮤트 공작과 한 판 했다면서? 기회가 되면 나와도 한 번 겨뤄봄세.”
“폐하를 위한 일이 아니면 검을 뽑지 않습니다.”
“어허, 이 딱딱한 친구.”
그러면서 륭겐 후작은 카르스 황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초인 같은 통찰력이 아니더라도 륭겐 후작의 속내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었다.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나거든 기회가 생길 것이다.”
“크하핫! 감사합니다, 폐하!”
상황이 정리되자, 카르스 황제는 부사령관인 카이슨 백작을 불렀다.
“카이슨 백작.”
“예, 폐하.”
“후퇴를 준비하라.”
“……예?”
카이슨 백작은 순간 그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다.
6군단장 쥬르덴 백작의 활약으로 간신히 근거지인 발라트 성까지 후퇴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후퇴를 한다니?
‘서, 설마…….’
그 설마는 현실로 이루어졌다.
“발라트 성을 버리고 후퇴한다.”
“……!”
카이슨 백작도 이를 구경하던 륭겐 후작도 놀란 얼굴을 했다.
발라트 성은 튼튼한 성벽을 가진 요새였다. 말을 탄 유목 민족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카이슨 백작은 그제야 마지막 미끼가 바로 이 발라트 성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패배자이니 도망을 가야지. 겁을 먹어서 성까지 버리고 도망가는 얼빠진 황제가 되어 주는 거다. 성에는 술과 재물을 그대로 남겨두어서 저들을 즐겁게 해 주어라.”
카르스 황제는 여전히 감정이 없는 얼굴로 지시했다.
모두들 그 의중을 이해할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했다. 할슈타인 백작만이 카르스 황제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
카르스 황제의 짧은 한 마디에 비로소 퍼뜩 정신을 차린 카이슨 백작이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1군단, 2군단, 4군단에게는 발라트 성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하달하라. 그 진군은 은밀하고도 신속해야 한다.”
“예, 폐하!”
그리하여 그날 밤, 카르스 황제의 반란토벌군은 발라트 성을 버리고 퇴각을 개시했다.
***
한편 반란군은 카르스 황제를 계속 쫓을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하고 있었다.
“늦었소이다. 지금쯤 이미 발라트 성에 틀어박혀 있을 거요.”
“그건 그렇지. 초원에서라면 자신 있지만, 성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 아니겠소?”
“으음, 우리들 바람의 일족은 공성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니…….”
“하지만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단 말이오? 현재 황제가 가진 병력은 기껏해야 3만 가량이 전부요. 뿔뿔이 흩어진 다른 병력들이 합류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하오.”
“하지만 공성은 무리잖소!”
한데 모인 족장들은 두서없이 떠들며 논쟁을 벌였다. 약탈을 일삼은 생활 습관 탓에 전쟁 경험은 풍부했지만, 성을 공략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히나 발라트 성은 그동안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과 북부의 혼트 황실을 구분지어온 경계선과도 같았다. 유목 민족의 약탈이 이 발라트 성 인근까지 손을 뻗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가만히 침묵하던 탈라크 대왕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발라트 성은 크고 튼튼하지.”
“맞소, 대왕.”
“그곳을 공략하기란 무리요.”
“하지만―!”
쩌렁쩌렁한 탈라크 대왕의 음성에 족장들은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