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회: 9권 - 6장. 승리의 행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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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왕도 오리엔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란은 무사히 곡물을 싣고 혼트 제국으로 출발했고, 지금쯤 거래를 잘 성사시켰으리라 생각된다. 함께 간 패트릭도 갈 곳을 잃고 떠도는 유목민족들을 거두고 있겠지.
얼마 전에 성공적으로 스카우트를 한 닐 페리는 추천서와 함께 카록 병기점이 있는 쿤트 영지에 보냈다. 줄리아는 내가 쓴 추천서를 보고 그를 부사장으로 임명할 것이다. 능력이 좋은 인물이니 줄리아에게 큰 힘이 되리라 생각된다.
하아.
보고 싶다 줄리아, 그리고 시스.
내 귀염둥이 마누라들.
생각 같아서는 주머니에 넣어놓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라고. 왜 정령은 언제 어디서든 소환할 수 있는데 마누라는 그게 불가능한 것일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오리엔 왕실과의 동맹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지금은 오리엔 국왕과도 자주 접견하여서 여러 가지 담소를 나누고 식사도 했다. 브리튼 공작가에도 자주 방문해서 브리튼 공작이나 라엘을 만나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물론 레던 왕실 쪽이 신경 쓰인다.
브리튼 공작가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알게 된 소식인데, 지금 레던 왕실은 혼트 제국의 내전에 개입할지 말지의 문제로 격하게 대립 중이라고 했다.
특히 칙령 문제에 얽혀서는 듀론 후작이 군사부상서 클레비우스 백작과 직위를 건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 영감님이 그런 일을 벌일 정도로 공격적인 성격이 아님은 나도 잘 알았고 있었다.
게다가 칙령은 내 제안인데 듀론 후작은 자신의 의견으로 개진하였다.
아마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나대신 책임을 뒤집어 쓸 생각일 것이다.
그 마음이야 감사하지만 말이야. 내 말을 100% 믿지 못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냐. 그 영감님도 참 어지간히 불안하셨던 모양이다.
물론 나도 불안하지.
혼트 제국 쪽에서는 카르스 황제의 6군단이 첫 전투에서 기습을 받아 절반의 병력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 파다했다. 카르스 황제의 판단 미스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말이다.
난 카르스 황제가 패배하여 무릎 꿇는 상황이 도저히 상상 되지 않는다.
작금의 상황을 연출한 장본인도 그 괴물 황제인데, 어떻게 그가 패배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가 만든 시나리오에 자시의 실패를 넣는 사람도 있나?
게다가 카르스 황제가 직접 친정(親征)에 나섰으면, 그의 승리는 더욱 확실하다.
전생의 카르스 황제는 자기가 직접 나선 전쟁에서는 한 번도 져본 일이 없었단 말이다!
물론 그도 인간인 이상 실패가 없었겠냐마는, 그가 군림할 당시 혼트 제국군의 패전은 그의 부하들의 실책에 의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카르스 황제를 막아낸 제론 데커드(전생 땐 제론 폴만)가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의 제론 폴만도 카르스 황제의 가공할 전쟁 수행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이 나라에 카르스 황제를 상대로 야전에서 맞붙어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을 지키는 싸움이라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을지도 모릅니다.”
훗날까지 회자된 제론의 충격 발언이었다.
야전(野戰)에서 그에게 승리를 따낼 방법은 없다고 단언한 제론은 그 유명한 ‘전면적 수성(守城) 전략’을 개진했다.
요약하자면 그 작전은 처음부터 국토의 1/3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성에만 병력을 집중시켜서 수비만 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오리엔 왕국은 멸망을 면했다. 카르스 황제가 수명을 다해 숨질 때까지 버티는데 성공했다!
결론이 뭐냐고?
그만큼 카르스 황제가 대단하다는 것이다.
뭐, 그러니 혼트 제국에 괜히 개입해봐야 좋을 게 없다. 빌미만 제공할 뿐이니까.
그는 전쟁으로서 그의 각본을 완성해나가듯이,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각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왕도 오리엔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저녁이 되었다.
내내 열심히 돌아다녔던 나는 하늘에 붉은 황혼이 끼자 왕궁에 마련된 내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날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정말 의외의 손님이었다.
“대체 어딜 싸돌아다닌 건가?”
바로 랜달 스페이 백작이었다. 검술을 사랑하고 술은 그보다 더 열렬히 좋아하는 로열나이츠의 부단장. 에릭 국왕의 경호를 해야 하는 이 양반이 여긴 또 웬일이래?
“웬일이세요?”
내 물음에 랜달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당연히 폐하의 전언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닌가.”
“중차대한 일이라도 벌어졌나보죠?”
“카르스 황제가 또 패전을 했네!”
“예?”
저게 웬 자다가 한센이 삽질하는 소리야?
“첫 전투에서 6군단이 패퇴한 건 아는가?”
“예, 들었습니다.”
“그 뒤에 카르스 황제는 직접 군대를 끌고 출진했네. 하지만 병력을 네 개로 분화시키는 어리석은 전략을 펼친 까닭에 격파당하고 후퇴했네.”
“그러니까, 카르스 황제가 두 번이나 패배해서 후퇴하고 있다고요?”
나는 기가 막혀서 물었다.
랜달 스페이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우리 왕실도 난리도 아니네. 폐하와 재상 각하께서는 그대의 의견을 알고 싶어 하셔서 급히 나를 파견하셨네.”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식이야. 이제 막 오리엔 국왕이 동맹 협약을 채결하려던 찰나였는데.
그런데 카르스 황제가 두 번이나 패배?
탈라크 족장에게?
너무 이상하잖아!
말했다시피 전생에 카르스 황제는 패배를 몰랐고 특히나 야전에서는 무적이었다. 오리엔 왕국은 카르스 황제가 병으로 요절할 때까지 버텨낸 덕분에 간신히 멸망을 면한 것이다.
그런 카르스 황제가 야전에서 두 번이나 패해 달아나고 있다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뭐가 재미있어서 웃는 건가?”
랜달이 답답하다는 듯이 묻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확신이 생겼습니다. 전쟁은 카르스 황제의 승리입니다. 폐하께 그리 전해드리십시오.”
랜달은 미심쩍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그럼 제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이세요?”
“끄응, 영문을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렇게 확신을 하니 믿음이 가야 말이지…….”
“제 직위를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카르스 황제의 승리입니다.”
물론 목숨이나 마누라를 걸고 장담할 수 있냐고 하면 못하지. 내가 점쟁이냐?
하지만 내 직위를 걸고 장담할 수는 있다.
카르스 황제가 두 차례나 패전했다면 그건 분명히 속임수다.
“휴우, 알겠네. 폐하께 그렇게 전하지. 하지만 자네의 그 결정에 우리 왕실의 정치 판도가 걸려 있음을 명심하게.”
“압니다.”
듀론 후작은 참 똑똑한 일을 했다.
클레비우스 백작과 직위를 걸고 내기를 한 것이다.
내기에서 이기면 육제후의 대표적인 끄나풀인 클레비우스 백작을 쫓아내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와 동조한 다른 상서들 역시 이번 일을 빌미로 사퇴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결과를 한 번 볼까?
카르스 황제는 내전에서 승리하여서 유목민족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넣는다.
그리고 에릭 국왕은 왕실 내부의 육제후 끄나풀들을 모조리 가지치기 해버리고 왕권을 확립한다.
그리고 나?
나는 탈라크 족장에게 막대한 곡물을 팔아서 금전적인 이익을 얻고, 내전 여파로 발생한 떠돌이 유목민족들을 흡수해 콘돌 기병대를 성장시킨다.
그야말로 윈-윈-윈.
“뭐, 그건 됐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세.”
랜달은 뜬금없이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뭐래?
그럼 지금까지는 본론이 아니었어?
영문을 몰라 하는 나에게 랜달은 미리 준비해둔 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간신히 한 병 구했네. 자, 솜씨를 부려보게나.”
아하하.
나는 피식 웃었다.
퀸즈 블러드였다. 진짜 포도주 사랑이 어지간하구나, 이 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