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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패퇴
발라트 성은 본래 서북부의 소국에 불과했던 혼트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요새였다.
발라트 성의 남쪽은 유목민족들의 영역인 초원지대이고, 동쪽으로는 당시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던 오리엔 제국의 영토였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정착되었던 지도를 완전히 뒤바꿔버린 인물이 바로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이었다.
오리엔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베잘리우스 대공은 패배가 확정시 되었던 전쟁의 판도를 뒤엎고 드라마틱한 연승행진을 시작하였다. 남쪽으로는 유목민족과 화합하여 그들의 초원지대까지 혼트 왕국령에 복속시키고, 오리엔 제국을 격파하며 동쪽으로 영토를 무서운 속도로 넓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혼트 제국은 드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군사강국이 되었다.
그리고 영토의 급격한 확장으로 발라트 성은 더 이상 국경지대의 요새가 아니게 되었다. 혼트 제국의 중심지역에 덩그러니 선 커다란 요새는 더 이상 전략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발라트 성은 그 뒤에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로 인정받았다.
바로 혼트 제국의 수도 지역과 유목민족의 초원지대의 경계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발라트 성은 초원지대의 유목민족들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비록 혼트 제국의 국민으로 복속시켰다고는 하나 유목민족들은 여전히 황실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언제든 황실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카르스 황제가 이끄는 15만 반란토벌군의 거점이 됨으로서 발라트 성의 가치는 다시금 증명되었다.
발라트 성의 성주 관저는 당연히 카르스 황제의 관저가 되었다.
그림자처럼 따르는 할슈타인 백작과 함께 있던 카르스 황제는 가만히 지도를 바라보았다.
초원지대의 지도였다.
유목민족 반란군의 예상 진로, 그리고 반란 전의 부족들의 이동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르스 황제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카이슨 백작을 불러라.”
“예.”
할슈타인 백작은 밖으로 나가 병사에게 명을 전달했다.
이윽고 카이슨 백작이 안으로 들어와 부복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반란토벌군의 인선은 그대가 편성했지.”
“예, 폐하.”
“군단장들 중 가장 침착한 인물을 꼽는다면 누구겠는가?”
“매사에 냉정하기로는 6군단장 쥬르덴 백작이 최고입니다.”
“그 다음은?”
카이슨 백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11군단장 발도로프 자작입니다.”
“둘 다 불러라.”
“예.”
이윽고 쥬르덴 백작과 발도로프 자작이 카르스 황제 앞에 대령하였다.
6군단장 쥬르덴 백작. 마른 체격과 차가운 눈빛을 가진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대대로 혼트 제국군의 고위 군지휘관으로 복무해온 쥬르덴 백작가의 당대 가주로, 침착과 냉정과 실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11군단장 발도로프 자작은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 많은 인물이나 체격은 다부졌다. 본래는 몰락귀족이었으나 일반 병사로서 군복무를 시작, 밑바닥에서 차례차례 전공을 세우며 올라온 끝에 군단장이 된 입지전적인 베테랑이었다.
그렇듯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이었으나, 황제의 면전 앞에서는 긴장한 듯이 보였다. 하기야, 그 누구라도 무표정 무감정의 카르스 황제 앞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으리라.
“쥬르덴 백작.”
“예, 폐하.”
쥬르덴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전방 일주일 거리쯤 떨어진 초원지역에 반란군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를 설치하라.”
“예, 폐하.”
“아마 반란군의 습격이 있을 것이다. 아군의 역량을 시험해보고 싶을 테니까.”
이에 쥬르덴 백작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유목민족의 기습 전법은 확실히 위협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면 무리 없이 격퇴할 수 있습니다. 기필코 사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쥬르덴 백작의 두려움 없는 담담한 태도는 신뢰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카르스 황제의 말은 그의 침착성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지고 와라.”
“……옛?”
순간 쥬르덴 백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카르스 황제는 냉정하고 확연한 어조로 말했다.
“패배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반란군 놈들에게 승리를 헌납하란 말씀이신지요?”
“그렇다. 패배를 당함으로서 그들의 사기를 충분히 높여주어라.”
그제야 쥬르덴 백작은 황제의 의중을 어느 정도 짐작한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로 패해야 하는지요?”
“절반쯤. 전멸은 면하라. 그대 자신의 목숨 역시 온전히 보존하라.”
쥬르덴 백작은 나직이 신음했다. 옆에서 듣던 발도로프 자작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군지휘관에게 전장에 나가서 병력의 절반이나 잃는 대패를 당하고 돌아오라니.
물론 적을 기만(欺瞞)하기 위한 거짓 패배야 역대 전쟁사에서 얼마든지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4만 병력이 편성되어 있는 6군단의 절반은 무려 2만여 명! 그 많은 목숨을 일부러 잃고 오라니,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쥬르덴 백작은 고개 숙여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카르스 황제는 이어서 발도로프 자작에게 명했다.
"발도로프 자작의 11군단은 6군단과 하루쯤 떨어진 거리에서 대기하라. 쥬르덴 백작이 패배하여서 후퇴하거든 반란군의 추격으로부터 보호하라."
카르스 황제는 특유의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물러나는 반란군의 뒤를 쫓다가 허탕을 쳐도 좋겠지. 중요한 건 적의 사기를 높여주는 일이다."
“예, 폐하!”
발도로프 자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군지휘관으로서 치욕적인 일을 당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
반란군으로 지정된 유목민족 독립 세력의 우두머리 티란 탈라크는 ‘바람의 왕국’의 건국을 천명했고, 스스로를 ‘대왕’이라 칭하였다.
그 휘하의 각 부족의 족장들은 그대로 족장이라고 부르게 했다.
모든 유목민족 부족의 위에 군림하는 대왕의 권위를 확립시킨 것이다.
과격하고 잔인무도하며 오만하기까지 한 티란 탈라크 대왕이었지만, 이렇듯 혼란스러운 시기에서는 그러한 기질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작용했다.
게다가 육제후의 자금 지원까지 받아서 순식간에 여러 부족을 완벽하게 휘하에 넣은 그의 카리스마는 범상하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거사가 진행되니, 자연히 탈라크 대왕은 의욕이 충분해지면서 하루빨리 혼트 황실의 애송이 황제를 격파할 날만 고대하였다.
“이름이 카르스 혼트라고 했었던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전쟁 경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건강도 좋지 않은 병약한 황제라고 들었다.
탈라크 대왕의 시중을 들어주는 알몸의 여인들이 대접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 이를 벌컥벌컥 한 번에 들이킨 탈라크 대왕은 클클클 웃기 시작했다.
“웃기는 노릇이야. 우리 부족의 사내였다면 말도 제대로 못 타는 낙오자로 취급당할 놈이 이 나라의 황제라니. 그따위 황제에게 충성한다니 이 나라의 귀족 놈들은 자존심이란 것도 없나?”
그런 약자가 다스리는 군대는 15만이 아니라 50만 대군이 몰아쳐 와도 두렵지 않았다.
대가리만 쳐내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 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우두머리는 가장 강한 자여야 한다.
‘전쟁의 쓴맛을 보여주지.’
물론 탈라크 대왕은 바보가 아니었다.
카르스 황제는 나약하고 형편없지만, 15만이나 되는 대군이 그를 보호하고 있으니 그 목숨을 손쉽게 취할 수는 없다. 보나마나 그 병약한 황제는 대군의 뒤에 숨은 채 부하들만 앞세우는 겁쟁이일 것이었다.
당분간은 후퇴였다.
정면충돌을 하면 안 된다.
독립을 지원해주는 육제후 쪽에서도 장기전을 노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더랬다. 오만한 탈라크 대왕은 그런 참견이 달갑지 않았지만, 확실히 혼트 제국의 정예 대군과의 정면충돌이 이롭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들 바람의 일족은 말 그대로 바람이다. 빠르게 몰아치는 바람!'
바람의 일족다운 싸움으로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정면대결을 피한 채 계속 기습 공격을 가하여 놈들을 지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르스 황제가 직접 전장에 나온 순간,
콰드득!
탈라크 대왕은 다 마신 대접을 쥐어서 깨뜨렸다. 놀란 여인들은 그의 손을 닦아주고 깨진 파편을 치우는 등 허둥거렸다.
"죽여 버려야지. 그 연약한 모가지를 닭 모가지처럼 비틀어야지!"
탈라크 대왕은 여인 하나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여인은 수줍어하면서도 그의 품에 안겨 들어왔다.
이윽고 하얀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며 색정적인 율동을 시작했다. 달콤한 교성이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한 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왕님! 제국군 일부가 머지않은 곳에서 전진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탈라크 대왕은 여인을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하고 계속 허리를 격렬히 움직였다. 여인은 자지러져라 신음을 질러댔다.
"그게 몇 놈이냐?"
"병력은 일개 군단으로 약 4만 가량으로 보입니다!"
그 말에 탈라크 대왕은 클클 웃었다.
"크흐흐, 그럼 황제 놈에게 전쟁의 쓴맛을 한 번 보여줄까?"
그리하여 그날 밤, 탈라크 대왕은 전진기지를 건설하던 6군단에 직접 기습을 단행했다.
갑작스런 야습에 6군단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허둥지둥 후퇴하였다. 다행히 하루거리에 대기하고 있던 11군단의 지원으로 전멸은 면하였다.
11군단이 나타나자 탈라크 대왕이 이끄는 반란군은 썰물처럼 후퇴하였다. 11군단은 6군단의 복수를 위하여 뒤쫓았지만 후퇴할 때도 질풍처럼 빠른 유목민족을 따라잡을 수 있기 만무했다. 결국 달아나는 반란군의 꽁무니를 닭 쫓던 개처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첫 전투와 혼트 제국군의 체면 구기는 패전.
이 소식은 반란토벌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각 나라의 첩자들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