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회: 9권 - 4장. 황제의 출전 -->
그가 놓고 있는 수를 읽어야 한다.
바덴 강…… 육제후…… 독립 세력…… 탈라크 족장…… 레던 왕실의 개입…… 카슈텔 성…….
나는 생각나는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문득,
“아!”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카슈텔 성!
바로 그거였다.
카슈텔 성은 카르스 황제가 바덴 강 협상 때 10만 대군을 동원해 기습적으로 점거한 성채. 바덴 강 유역에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성채라서 혼트 제국의 입장에서는 침공의 교두보로 쓸 게 분명했다.
당연히 육제후의 입장에서도 카슈텔 성이 자신들을 향해 솟아나 있는 송곳처럼 느껴질 터였다.
바덴 강 협상에 의하여 혼트 제국은 카슈텔 성을 반환하지 않는 대신, 5천 명 이상의 병력을 상주시킬 수 없는 제한을 갖고 있다.
물론 카슈텔 성이 위험해지면 국경을 지키는 혼트 제국군의 11군단이 지원을 할 터였다.
그런데 그 11군단을 카르스 황제는 차출해버린 것이다.
카슈텔 성을 지키는 것은 5천 병력뿐.
과연 그걸 육제후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물론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라면 카르스 황제의 그런 의중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란즈헬 백작은 이번 내전을 통해 카르스 황제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그런 그가 과연 카슈텔 성을 가만 놔둘 것인가?
란즈헬 백작이 11군단의 부재를 틈타 카슈텔 성을 점령한다.
그리고 이것은 카르스 황제가 앞으로 레던 왕국을 공격할 대외명분으로 작용한다.
제길.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곡물 운송 건은 유란과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거요?”
라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빚은 언제고 갚겠습니다.”
“그러시오.”
나는 패트릭에게 손짓했다.
패트릭은 나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나는 패트릭에게 물었다.
“이곳에 데려온 콘돌 기병대의 대원이 열 명이었지?”
“예.”
“그중 가장 말을 잘 타는 사람 세 명을 선별해. 레던 왕실에 서신을 좀 보내야겠다.”
“국왕 폐하께 올리는 상서입니까?”
“아냐. 상서는 절차가 많아서 오래 걸려. 듀론 후작님께 전해드리는 서신이야.”
나는 브리튼 공작가의 하인에게 부탁해서 종이와 잉크, 펜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급히 서신을 적었다.
육제후에게 칙령을 내려 혼트 제국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금지시키십시오. 그들이 카슈텔 성을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이는 카르스 황제가 의도한 바입니다.
나는 패트릭에게 서신을 건넸다. 그와 동시에 50오린의 자금도 줬다.
“힐링 포션을 사서 쉬지 말고 가라고 해.”
“알겠습니다.”
패트릭은 서신과 돈을 받아들고 곧장 길을 나섰다.
유목민족 출신인 콘돌 기병대원이라면 질풍처럼 레던 왕성까지 달려갈 것이다.
이걸로 됐겠지. 늦지 않길 바라야지.
***
레던 왕실에서 카록의 위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대흉년과 흑혈병 사태 때 등장하여서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을 성공시킨 빛나는 공로의 젊은 인재! 리간드 자작이 되고 외교부 부상서 및 재상 보좌라는 겸직으로 입관함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심지어 카록의 부친인 바스크 쿤트 자작이 얼마 전에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서 레던 왕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현재 쿤트 자작가는 매일 같이 내로라하는 무인들이 방문해서 축하의 뜻을 전한다고 했다.
두려울 게 없는 막강무적의 부친을 둔 카록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계에서는 이미 카록이 듀론 후작의 뒤를 잇는 차기 재상이 될 왕실파의 새로운 실세임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카록의 높아지는 위세에 따라, 덩달아 매일 같이 위상이 높아지는 두 청년이 있었다.
“리간드 자작님께서 또 한 건 하셨군요.”
“참 이상한 작자야. 나만큼이나 일하는 걸 귀찮아하는 주제에 이 나라에서 가장 활약하고 있잖아.”
“아무튼 우리로서는 축하를 해야겠지요.”
“뭐, 그건 그렇지.”
작고 조용한 술집.
두 남자, 루이 콘체른과 제론 데커드는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카록이 직접 지명해서 재상부 소속이 된 두 사람은 최근 정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하나 같이 번뜩이는 지모와 탁월한 일처리 능력을 가진 탓에 ‘과연 카록의 심복들’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입니다. 리간드 자작님께서 혼트 제국의 내전을 카르스 황제의 압도적인 승리가 될 거라고 지나치게 확신하고 계십니다.”
루이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이에 대한 제론의 의견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그런 루이를 빤히 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카르스 황제가 유인책을 쓸 거라는 리간드 자작님의 의견에는 일부 찬성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 민족입니다. 그들이 전면전을 피해 다니면 전쟁은 얼마든지 장기화될 수 있습니다.”
“현재 첩보에 따르면 카르스 황제가 직접 이끄는 15만 토벌군은 전진하고 있고, 탈라크 족장의 반란군은 이를 피해 남하하고 있지. 자네 말대로 탈라크 족장의 머릿속에는 장기전과 게릴라 전술이 들어 있는 것 같군.”
“바로 그겁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혼트 황실은 재정에 타격을 입습니다. 리간드 자작님의 예상과 달리 막심한 타격을 입을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루이, 너는 사실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 손잡아야 한다는 쪽이었군?”
제론이 물었다.
루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예. 준남작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공격적인 성향이라 과감하게 카르스 황제에게 타격을 입힐 방법을 선호했을 겁니다. 육제후와 연계하여 탈라크 족장을 전면 지원한다면 독립에 성공하진 못하겠지만 혼트 제국에 치명타를 안겨줄 수는 있으니까요.”
“뭐, 너와 달리 방어적이고 안전주의인 내 생각을 말하자면, 카르스 황제의 묘한 태도를 언급하고 싶군.”
루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11군단 말씀이시군요.”
“역시 아는군.”
바덴 강 유역 방면의 국경지대를 지키던 혼트 제국군 11군단이 차출되는 바람에 그쪽의 경계가 허술해진 일은 레던 왕실의 정보망에도 입수되어 있었다.
“보통의 황제였다면 탈라크 족장이 딴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되는 즉시 군대를 움직였겠지. 군주에게 있어 반란처럼 무서운 건 없으니까.”
“……카르스 황제는 느긋하게 반란세력이 통합되도록 놔두었지요.”
“그래. 바로 그거야.”
제론은 맥주잔을 한 번에 들이켜 비워버렸다. 루이는 주인장에게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제론이 말을 이었다.
“카르스 황제는 우리에게 개입해달라고 유혹하고 있어. 11군단까지 빼버린 건, 육제후에게 자신 있으면 개입해보라고 도발하는 거나 다름없지.”
“마치 반란군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군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간드 자작님은 카르스 황제가 내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카르스 황제 본인 역시 자신만만하지. 묘한 신뢰관계이지. 그 점으로 보았을 때, 나는 섣불리 혼트 제국의 내전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우리는 리간드 자작님의 라인이니까 그 양반 뜻에 따라야지.”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는 평생 카록을 따를 생각이었다.
왕실 관리가 되고 나서 밑바닥 관리로 죽어라 일만 하고 대가는 얻지 못했던 루이였다. 고위 관리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아부 떨던 동기들, 혹은 좋은 가문 출신 놈들은 승진하거나 포상을 받을 때 그는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카록의 눈에 들고부터 인생 역전이 벌어졌다.
그들을 모두 재끼고 루이는 에릭 국왕의 측근으로서 권력에 몇 발짝이나 다가선 것이다.
지금껏 카록을 따라서 손해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카록의 결정을 믿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