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회: 9권 - 3장. 내전 발발 -->
가뜩이나 줄리아가 인력난을 호소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카록 상단을 보면 잡다한 일을 시킬 만한 직원이야 많지만, 경영 감각을 가진 인물은 별로 없었다. 줄리아나 유란을 제외하면 다들 영 중요한 경영적 판단에 도움이 안 된다.
한센 같은 어리바리한 녀석이 약재 사업의 책임자로 있을 정도의 인재난! 말 하다지 않았나?
마침 닐 페리는 경영 감각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고 본인도 그런 쪽에 흥미가 있는 듯했다. 거기에 30여 년간 용병 생활을 한 경험도 카록 병기점에 보탬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내가 닐 페리를 스카우트할 꿍꿍이에 빠져 있을 때였다.
용병 길드에 네 명의 용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 같이 체격이 건장하고 흉터 등으로 인상이 험악해보였다. 다들 전장에서 좀 놀았던 모양인지 터프해 보인다.
그들은 날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쪽이 의뢰인입니까?”
“그래. 카록 리간드 자작이다.”
“카록? 혹시 카록 상단의 그 카록님이십니까?”
“그래.”
용병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어렸다.
잘나가는 카록 상단의 단주가 하는 의뢰이니 돈 좀 만질 거라고 기대한 모양이었다.
“저희는 제프 용병단이라고 합니다. 용병 네 명을 찾으신다고 했는데 마침 저희가 딱 네 명입니다.”
단장으로 보이는 털북숭이의 사내가 말했다. 제프 용병단의 단장이니 이름은 분명 제프일 거야. 용병들은 작명센스가 단순하니까.
“레던 왕국에 가봤나?”
“물론입니다. 얼마 전까지 레던 왕국의 북부 지역에서 몬스터 사냥을 했었습니다. 쿤트 영지로 가는 길도 알고 있고, 전원 다 말을 탈 줄 압니다.”
확실히 의뢰를 맡기기에 적당하군.
“좋아. 의뢰는 이 서신을 쿤트 자작가에 머무르고 있는 카록 상단 소속의 유란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런데 서신 전달에 용병을 네 명이나 요청하셨는데, 혹시 누군가가 노리기라도 하는 겁니까?”
제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혼자 가다가 비명횡사하지 말라고 넉넉하게 뽑은 거야.”
“그럼 의뢰금은 얼마나…….”
“말 대여비까지 100오린을 주지.”
흥정이 귀찮았기 때문에 나는 대충 넉넉하게 불렀다. 제프 용병단의 안색이 환해졌다.
레던 왕국의 쿤트 영지까지는 거리가 꽤 멀지만, 호위가 아니라 그냥 서신을 전달하면 되므로 일은 더 쉬웠다. 게다가 말을 타고 쌩하니 다녀오면 되니 그 정도 의뢰에 100오린이면 많이 받는 편이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신속하게 서신을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시급한 일이니 최대한 빨리 해줘.”
“예. 그럼 내일 당장 출발하지요.”
“아아.”
나는 유란에게 쓴 서신을 제프에게 건네주었다. 10오린짜리 오리엔 왕국의 금화 열 닢을 용병 길드에 지불했다.
의뢰를 마치자 나는 예정대로 닐 페리를 만나보기로 했다.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쭉 걷다 보니, 직원의 말대로 ‘잭 하퍼의 선술집’이란 간판이 보였다.
낡아 떨어질 듯한 문짝을 보니 상당히 오래된 선술집처럼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응? 처음 뵙는 분이시군. 귀하신 분 같은데 이런 술집엔 웬일이십니까?”
카운터에 있는 주인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거한이 날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맥주 한 잔.”
“예입.”
주인장은 금방 맥주를 가득 채운 나무잔 하나를 가져왔다. 마셔보니 맛이 꽤 좋았다.
아직 낯이라서 그런지 선술집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깡마른 노인 한 명만 구석진 자리에서 술을 홀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혹시 닐 페리라는 사내가 이곳에 자주 오지 않나?”
그러자 주인장은 딱하다는 듯이 날 보았다. 뭐야, 저 눈빛은?
“나리, 그 친구를 영입하실 생각이라면 포기하시죠. 그 친구가 술만 마시면 하는 소리가 ‘이젠 싸움은 진절머리가 나!’ 입니다.”
아무래도 오러 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자다 보니 귀족들의 영입 제의가 많은 모양이었다.
“싸움 시키려고 영입할 건 아니니 걱정 마. 아마 닐 페리 그 양반도 내 제안에 솔깃할걸?”
“그렇습니까? 그럼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 친구는 매일 노을이 낄 즈음에 이곳에 와서 자정까지 마시다 갑니다.”
“알았어. 땡큐.”
회중시계를 꺼내 보니 아직 4시였다. 하는 수 없이 해가 질 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어야 할 듯했다.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시간을 때웠다.
맥주도 운디네의 힘으로 맛있게 만들어서 마시니 더욱 좋았다.
그리고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할 즈음, 마침내 한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여어, 잭! 나왔네.”
그러자 주인장은 날 턱짓으로 가리키며 대꾸했다.
“왔군. 자네 찾아온 손님이 기다리고 계시네.”
“손님?”
중년 사내, 닐 페리는 날 쳐다보았다.
닐은 키는 보통이나 체격은 다부졌다. 근육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느낌이랄까? 근육질인 왼쪽 팔뚝에는 칼자국이 서려 있어서 평범하지 않았던 인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운디네와 노움의 감각을 통해, 그의 체내에 상당량의 오러가 있음이 보였다. 과연, 오러 엑스퍼트 중급 수준의 오러량이었다.
“날 찾으셨소?”
“그렇다. 나는 카록 리간드 자작이다.”
“카록 리간드……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내 이름을 듣고 닐의 표정이 변했다.
“그런데 제게는 무슨 볼일이십니까?”
“뭐겠어? 물론 스카우트지.”
내 말에 닐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간드 자작님. 오해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제 실력을 높이 사주신 점은 감사합니다만, 전 나이가 너무 많아 더 이상 무기를 들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남의 목숨을 취해서 돈 버는 일은 피하고 싶으니 모쪼록…….”
“아니, 아니.”
나는 손을 휘휘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난 카록 상단의 단주로서 자넬 고용하겠다는 뜻이야.”
“예? 상단주로서 말입니까? 그럼 혹시 상단의 경호원이라도…….”
“아니. 자네는 무기는커녕 사무실에서 펜을 들고 일하면 돼. 카록 병기점의 경영에 참여하는 일이지.”
“경영……, 말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닐은 무척 놀란 얼굴이 되었다.
“다들 오러 엑스퍼트 중급에 달하는 그 무력을 탐내겠지만, 나는 그동안 업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용병 길드를 잘 운영해왔던 그 감각을 더 높이 사고 싶다. 강한 사람이야 내 주변에는 많아. 내가 필요한 건 경영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이다.”
“제가 용병 길드를 운영해온 방식을 높이 평가하시는 겁니까?”
“물론이지. 고객 유치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이 눈에 보이더군. 특히 왕도 오리엔에 상주하는 용병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고객에게 판매하는 방식은 아주 좋았어. 의뢰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배려를 잘 했던데.”
“그걸 알아주시는군요!”
“당연하지. 나는 그 능력을 내 상단에서 써주기를 바라는 거야. 못 믿겠으면 무기를 드는 일은 절대 시키지 않겠다고 계약서에 조항을 따로 기재하겠어.”
그제야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는지, 닐 페리의 얼굴에 점차 의심은 사라지고 기쁨이 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닐은 나와 뜻이 맞아서 신이 난 모습으로 잡담을 하게 되었다. 내가 적당히 응대를 해줄 때마다 그는 신나게 떠들었다.
“피 보는 일이 진절머리가 나서 은퇴하고 용병 길드의 길드장을 맡았을 땐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의뢰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아서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지요.”
“그것 참 당황했겠는데. 장사 한 번 안 해본 초짜 길드장의 입장에서는.”
“그러게 말입니다. 껄껄껄! 그래도 설마 죽이기라도 하겠냐는 마음으로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이야, 어떻게든 고객을 유치해서 의뢰를 따내려고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짜냈죠. 그땐 직원들도 정말 노력 많이 했습니다.”
“경영자가 열정을 보여주면 직원들도 따르는 법이지.”
“바로 그겁니다. 합심해서 어찌어찌 하다 보니 적자가 점점 줄다가 흑자로 전환되고, 조금씩 돈을 만지게 되었지요! 캬, 그때 그 성취감이란……!”
“눈물겨운 맛이지.”
“껄껄! 예, 눈물겨운 맛입니다! 뭘 좀 아시는군요?”
카운터 앞에 우리가 마신 빈 맥주잔이 쌓여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난 은근슬쩍 고용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취직할거지?”
“예예! 당장 사인합죠!”
술기운이 오른 닐은 구체적인 조건은 확인해보지도 않고 사인을 해버렸다. 쯧쯧, 내가 사기꾼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 양반?
난 계약서를 품속에 갈무리하곤 피식 웃었다.
닐 페리.
그는 아마 용병으로서가 아닌, 뒤늦게 발견한 자신의 또 다른 재능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던 것이리라.
***
혼트 제국의 정예 군대가 도열했다. 그 규모가 실로 대단하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합 약 15만!
그 엄청난 대병력을 앞에 두고, 인형 같은 무표정의 황제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할슈타인 백작이 보였다.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부사령관 카이슨 백작이 말을 타고 달려와 보고했다.
카르스 황제는 나직이 말했다.
“전진.”
“예! 전군, 전진하라!”
“전진하라!”
“전진하라!”
카이슨 백작이 명령을 외치자, 각 장교들이 큰 소리로 복창했다.
이윽고 15만 대병력이 일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아무 혼란 없이 진군하는 그 모습은 혼트 제국군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