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회: 9권 - 1장. 오리엔 왕실의 갈등 -->
기본적으로 오리엔 왕국은 동맹이 시급한 입장이 아니었다. 혼트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쪽은 레던 왕국이다. 혼트 제국과 레던 왕국이 서로 싸워서 국력이 약화되면 오리엔 왕국으로서는 이익이다.
다만 문제는 혼트 제국이 레던 왕국을 공격할 시, 타깃은 분명히 물류가 집중된 바덴 강 유역이라는 점이었다. 이미 카슈텔 성을 침략의 교두보로 삼고 있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예전에 카록이 말했던 그대로 이루어진다.
바덴 강 유역을 점령한 혼트 제국은 오히려 레던 왕실에게 동맹을 신청하고, 동시에 바덴 강을 보급로 삼아 오리엔 왕국을 침공한다.
이에 오리엔 왕국 역시 레던 왕실에 동맹을 청하지만, 레던 왕실은 양국 중 더 강력한 혼트 제국의 손을 잡고 만다.
국제정세는 체스와도 같아서 한 수만 잘못 두어도 순식간에 판도가 뒤집힌다.
그래서 오리엔 국왕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과연 혼트 제국은 바덴 강 유역을 점령하고 오리엔 왕국을 침공할 정도로 강력한가? 지금이 레던 왕국과 동맹을 맺기에 적기인가?
오리엔 국왕도 야심이 있었다.
수년 전 왕위가 걸린 레던 왕국의 내전에 개입하려 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오리엔 왕국은 한때 대륙 최대의 대제국이었다. 그때 누린 황금기를 오리엔 왕실은 아직 잊지 못했다.
레던 왕국이 아슬아슬한 선에서 혼트 제국의 침략을 막아낸다면, 대륙 패권의 기회는 오리엔 왕국에게 돌아간다. 힘이 빠진 레던 왕국과 혼트 제국을 어부지리로 격파하고 대륙의 패자가 되는 시나리오가 펼쳐지는 것이다.
“으음…….”
오리엔 국왕은 갈등을 거듭했다.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잘못 두면 판세가 송두리째 뒤집어져 돌이킬 수가 없어진다.
갈등하는 그의 기색을 본 브리튼 공작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국왕 폐하. 리간드 자작의 알현 요청을 허가하시지요.”
“뭐라고?”
“리간드 자작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는 분명 약삭빠른 인물이나 협상에 있어서 거짓말로 상대를 속이는 자는 아닙니다. 공식석상이 아닌 비공식 담화로 그를 만나보심이 어떠신지요?”
오리엔 국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알겠네.”
창밖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좋은 빛깔로 이른 저녁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좋은 달빛이군. 정원에서 산책하기에 좋은 밤 아닌가.”
브리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
심란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 남자가 이곳에 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렇게 설레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미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세렌스 공주는 창가에 앉아 하늘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쿤트 자작가의 연회에 참석하여 그와 그의 가족을 만난 것이 엊그제 같았다. 아직도 우스꽝스럽게 생긴 예티 코트(?)를 입고 농담하며 웃는 카록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엊그제’ 사이에 그는 결혼을 해버렸다. 두 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고 리간드 자작이 되었다. 그의 아내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던 세렌스 공주는 그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혀서 멍하니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하고 담담히 넘어갔는데, 며칠이 지나자 스멀스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싫어서 일부러 다른 여자들과 결혼한 걸까?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여자들과 결혼한 건 아닐까?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 그렇듯 수많은 의심이 생겨났다.
그럴 때마다 세렌스 공주는 달빛을 받으며 정원을 산책하곤 했다. 홀로 밤하늘을 거닐면 또다시 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침대에 누워 있을 때보다는 차분하게 그 감정을 되새길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오랫동안 사귀어온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동질감, 친밀감……. 덕분에 혼인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졌다. 이 남자라면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의 아내가 된다면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남자가 이곳에 와 있다. 어느덧 일주일째. 당연히 세렌스 공주는 그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우연히 마주치지는 않을까, 맞닥뜨리게 되면 그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웃으며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하고 인사하겠지.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가 상심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는 말아야 할 텐데.
세렌스 공주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녀는 침대 맡에 있는 종을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에 밖에서 시녀가 들어왔다.
“부르셨나요, 공주 저하.”
“잠이 안 와.”
“휴우, 오늘도요?”
“응.”
“정말 큰일이네요. 그럼 오늘도 산책을 하시겠어요? 달이 밝고 예뻐요.”
“응, 그러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시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갈색 하프 코트와 숄을 들고 나타났다. 숄로 둘러주고 하프 코트를 입혀주었다. 세렌스 공주는 시녀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다과를 가져다주면서 시녀가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대전 뒤편의 장미정원을 가보셨나요?”
“응? 아니.”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떠세요? 달빛을 머금은 장미들이 그렇게 아름답대요.”
그러면서 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낸다.
엄격한 왕궁에서 근무하는 시녀는 결코 타국의 사신에게 사적인 잡담을 건네지 않는다. 즉, 누군가가 거기서 조용히 만나자고 전하는 것이렷다? 오케이. 이런 것도 알아듣지 못0하면 사신 노릇 때려치워야지.
“그래? 그럼 몇 시에 가야 가장 좋을 시간이지?”
“9시 이후가 사람도 없고 좋을 거예요.”
“그래, 그러지.”
비공식 대담인가. 만날 사람은 오리엔 국왕이겠지?
뭐, 적어도 내 의견을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니 감지덕지해야 할 일인가. 좋은 기회다.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차와 다과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회중시계를 보니 8시30분이었다. 뭐, 미리 약속장소에 나가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말마따나 동그란 달이 아름다운 밤이니까.
다만 나의 산책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지.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틀로 올라가 창밖의 허공에 발을 내딛었다.
운디네의 능력으로 내 몸의 체액을 조종해서 몸을 허공에 둥실 띄웠다. 그렇게 나는 허공을 걷기 시작했다.
두 발로 걷는 것은 세밀한 균형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급 정령이 된 운디네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정교한 수준의 컨트롤이 가능했다.
“이야, 정말 좋은 달빛이다. 그치?”
-응!
-응.
-불타는 달빛, 크헤헤!
머리에 앉은 노움과 몸속의 운디네, 샐러맨더가 대답했다. 하하, 귀여운 녀석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참 멋진 일 같다. 정령술은 정말 멋져.
하늘을 걷는 산책이라, 정말 멋지다. 발아래로 까마득하게 펼쳐진 풍광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나중에 시스, 줄리아랑 같이 이렇게 놀아야지. 히히.
나는 신나게 산책을 했다.
달을 향해 똑바로 걷기도 하고, 위아래를 거꾸로 해서 걷기도 했다. 머리를 땅을 향하게 하고 걸으면 피가 머리에 쏠려서 불편하지만, 나는 운디네의 힘으로 혈액순환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관계없었다.
때로는 왕궁의 벽에 발을 붙이고 걷기도 했다.
아참, 이것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나는 왕궁 벽을 박차고 허공에서 손발을 휘저으며 수영을 했다. 우아한 자유형으로 허공을 쭉쭉 가로지른다. 그렇게 나는 헤엄(?)을 치면서 대전 뒤편의 장미정원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