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회: 8권 - 13장. 진짜 실마리 -->
아아, 지루해. 재미없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떡밥을 뿌려놓고 낚싯대를 들이민 지도 벌써 사흘째다. 사흘째라고!
빨리 좀 낚여달란 말이야!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한마디로 나는 흙으로 만든 왕좌에 앉은 채 둥실둥실 허공에 떠서 깊은 상념에 잠긴 포즈를 사흘 내내 유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디 그뿐인 줄 아는가?
흙과 물과 불이 내 주위를 뱅뱅 휘돌게 하는 환상적인 연출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정령친화력이 매일매일 쪽쪽 빨려나가고 있다. 내가 상급 정령사가 아니었으면 진즉에 탈진했겠지.
내가 이런 얼간이 같은 짓을 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오리엔 국왕의 눈길을 끌어서 동맹 협상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최상급 정령술의 실마리를 잡아서 수련에 돌입했다고 하면 오리엔 국왕은 화들짝 놀라서 자기 오른팔(브리튼 공작)과 왼팔(레이몬드 후작)을 소집할 것이다.
셋이서 대책회의를 쑥덕쑥덕 하다가 마지막에 병적인 호기심을 가진 대마법사 레이몬드 후작이 나서겠지. 자기가 직접 확인해보겠다고 말이야.
그럼 나는 레이몬드 후작과 정령술에 대해서 이런저런 토론을 하며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다가, 동맹 협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진짜 떡밥을 던져서 협상을 유발할 것이다.
자, 어떠냐?
이것이 나의 장대한 계획이다.
가짜 수련을 시작할 때, 나는 일부러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문틈으로 몇몇 시녀들이 엿볼 게 틀림없었다.
그녀들은 특유의 가볍고 빠른 입으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니겠지. 그럼 이 일이 사교계에 금세 소문이 쫙 퍼져서 내가 화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주목 받을수록, 나를 일부러 기피하는 오리엔 국왕에게는 부담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이틀째 되던 날, 웬 시녀 하나가 문틈으로 날 엿보더니 ‘제 딸이 건강을 되찾게 해주세요.’ 라고 몰래 기도를 하고 달아났다. 그리고 다음날인 오늘 아침, 그 시녀가 딸의 감기가 나았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하여 오늘 오후, 벌써 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열세 명으로 늘어났다.
모든 상황을 노움과 공유된 감각으로 지켜본 나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 보니, 난 영락없이 어떤 종교의 성화(聖畵)에 나올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령술은 마법이나 무예에 비해 알려진 바가 없어서 신비한 이미지가 더욱 많았다.
이제 살다 살다 사이비 종교까지 만들어냈다.
남의 나라 궁정에서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게 되다니, 오래 살다 보니 정말 내가 맛이 간 게 아닐까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미친놈은 자기가 미친 줄 모른다잖아. 내가 딱 그 짝이 아닐까?
혼자 이러고 있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그때였다.
내 정신이 붕괴되려는 찰나에 때맞춰 레이몬드 후작의 기척이 나타났다.
오케이! 어서 오세요, 영감님. 제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다고요.
“얘들아, 알고 있지?”
-응.
-응.
-크헤헤! 재밌겠다.
세 정령이 대답했다.
마침내 레이몬드 후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가 차례로 한마디씩 했다.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
-방해하지 마라!
경고를 받은 레이몬드 후작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 이건 대체……. 정말로 수련 중이란 말이냐?”
-우리는 대자연의 의지의 파편.
-정령과 정령사의 관계는 함께 대자연의 의지로 가겠다는 약속.
-접속한다! 크헤헤! 위대한 의지에 접속한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예전에 보았던 라울 리간드의 저서(로 추정되는) ‘진화의 정령술’을 인용한 것이었다.
즉, 아예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에 대마법사인 레이몬드 후작이 듣기에도 꽤 그럴 듯하다는 뜻이었다.
예상대로 레이몬드 후작은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이내 열의로 번뜩이는 눈빛으로 정령들에게 물었다.
“대자연의 의지란 곧 우주의 진리, 그것이 정령들의 존재 근원이라는 뜻이로군. 그래, 그건 이해했다. 그런데 어떻게 정령사와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냐?”
우주의 진리.
그것은 정령술에서 말하는 대자연의 의지와 같은 맥락으로, 마법사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였다.
7서클 대마법사인 레이몬드 후작은 오랜 세월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랬군.
그래서 정령술에 관심을 가졌던 거였어.
-정령과 정령사는 하나의 영혼으로 연결되어.
-정령의 진화는 곧 정령사의 진화로 연결되어.
-우리는 함께 위대한 의지에 연결된다! 크헤헤!
다들 잘하고 있는데, 샐러맨더야. 넌 그 재수 없는 웃음 좀 어떻게 안 되겠니?
“그랬구나. 정령 계약은 곧 영혼을 연결시키는 속박. 정령이 진화하면 당연히 정령사도 진화하는 거였어. 그리고 정령의 진화의 최종목표는 존재 근원인 대자연의 의지에 닿는 것. 정령이 닿으면 정령사도 함께 닿는다! 과연! 그게 정령술의 진의였군. 엘프는 인간에게 대자연의 의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정령술을 가르쳐주었구나!”
나 저 영감님 무서워.
정령들이 개소리 하는 것 같아도 엄연히 라울 리간드의 이론을 응용한 것인데, 그걸 단번에 이해하는 것을 보면 과연 대마법사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처음에는 불, 물, 바람, 흙 네 가지 정령 계통이 사람의 신체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인간과 정령의 관계를 추측했었는데, 이제 보니 정령술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도가 깊고 대단한 것이었군.”
레이몬드 후작은 홀로 중얼거렸다.
하하. 이 영감님 상상력 한 번 풍부하시네. 꽤 그럴듯하잖아. 불은 사람의 체온이고, 물은 사람의…… 어라?
순간 나는 무언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혈액을 포함하여서 물은 인체의 70%를 차지한다고 했다. 그럼 그 체액을 운디네로 조종할 수 있는 걸까?
오오, 아주 좋은 생각 같은데 이거?
대마법사 영감님의 중얼거림에서 힌트를 얻은 나는 운디네에게 방금 떠올린 개념을 전달했다.
운디네.
내 안에 들어와.
그러자 운디네는 내 품에 꼬옥 안겼다. 그리고 그대로 모공(毛孔)을 통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온몸에 흐르는 피에서 운디네가 느껴졌다. 운디네는 물의 정령, 물과 동화될 수 있는 존재.
지금 운디네는 나의 피와 동화된 것이다!
운디네의 치유의 기운이 혈관을 통해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따스한 느낌.
요 며칠간 쇼하느라 쌓인 피로가 말끔하게 씻겨나갔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내 안의 모든 질병이 사라진 듯한 상쾌한 기분이 나를 감쌌다.
현재 운디네는 중급 정령이다.
상급 정령인 노움처럼 나와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운디네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상태는 나의 신체와 정신이 운디네와 결합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내 안에 정령이 들어와 있다니.
레이몬드 후작의 중얼거림이 아니었으면 이런 멋진 감각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운디네와 결합된 감각을 느끼고 즐겼다.
따스하면서도 맑고 시원한 청량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신비한 느낌.
동시에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뭐였더라?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낀 적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아, 맞다!
그래, 운디네와 처음 정령 계약을 맺었을 때였다. 그때 우리는 계약을 맺어서 영혼이 하나로 맺어졌고, 그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대자연의 의지가 내게로 전달되었었다. 그때 나는 까닭 없이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흘렸더랬다.
운디네와 결합된 느낌이 바로 그때의 감격과 비슷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아앗―!
나도 레이몬드 후작도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랄 사건이 벌어졌다.
뭐냐고?
내 몸 안에서 순백색의 빛이 막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안 놀랍냐?!
나 자신도 놀랐는데, 하물며 레이몬드 후작은 아예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쩌억 벌리며 경악하고 있었다.
“후, 후광?!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타난다는?! 저, 정말로 우주의 진리를 터득했단 말이냐! 이, 이, 이럴 수가!”
틀리거든요? 후광은 무슨!
나는 이 빛이 뭔지 안다.
바로 운디네가 상급 정령으로 진화하면서 발생하는 빛이었다. 그런데 운디네는 현재 나의 피와 동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내 몸에서 빛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나도 알딸딸한 상태였다. 내 몸에서 빛이 막 나오는데 제정신이겠는가?
이윽고 운디네와 서로 감각이 연결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정령친화력 역시 대폭 향상되었다. 운디네의 진화가 나의 진화로 연결된 것이었다.
맙소사.
최상급 정령술의 수련을 하고 있다고 공갈을 치려다가 운디네를 상급 정령으로 진화시켜버렸다. 이런 기묘한 우연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운디네도 노움처럼 상급 정령으로 진화시키고 싶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레이몬드 후작이 나에게 그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이다. 나는 영감님에게 사기를 치려고 했는데 말이다. 아, 내 양심…….
아무튼 이 정도면 훌륭히 쇼를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바닥으로 내려와 흙으로 만든 왕좌를 없애고 내 주위를 뱅뱅 맴도는 흙, 물, 불도 없애버렸다. 그리고 눈을 떴다.
레이몬드 후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대뜸 내 멱살을 휘어잡았다.
“이 괘씸한 놈!”
“왜, 왜 그러세요?”
나는 크게 당황했다. 설마, 사기 친 게 들통 났나?
“대자연의 의지를…… 우주의 진리를 터득해버리다니! 이런 얄밉고 부러운 놈 같으니!”
아, 그런 뜻이었냐.
“무, 무슨 말씀이세요?”
“시치미 떼지 마라! 어서 나에게 네가 깨달은 것을 가르쳐다오. 그럼 지난번에 네 샐러맨더로 날 골탕 먹인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 어서!”
“후, 후작님! 오해입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눈앞에서 깨달음의 후광이 쏟아지는 걸 봤는데, 내 눈이 동태 눈깔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 전 최상급 정령술을 터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뭐라고?”
“방금 그 빛은 후광이 아니라, 운디네가 상급 정령으로 진화한 겁니다. 아쉽게도 최상급 정령술은 얻지 못했지만, 그 대신 운디네가 영향을 받아서 진화했지요.”
내가 생각해도 참 좋은 변명이었다.
그러자 레이몬드 후작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 찼다.
“죄, 죄송합니다. 기대에 부응해드리지 못해서.”
“그럼 그 최상급 정령술의 실마리가 무엇이었는지 그거라도 가르쳐다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어째서냐!”
“제가 가진 실마리는 바로 정령 계약을 했을 때 대자연의 의지를 잠시 받아들였던 느낌입니다. 그때의 느낌을 다시 떠올렸던 덕분에 최상급 정령술로의 수련을 시작했던 것이죠.”
“즉,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군.”
“예.”
“끄응.”
레이몬드 후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며 온몸으로 실망하였다. 저렇게 실망감을 잘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아무튼 최상급 정령술 사기는 들키지 않고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슬슬 이곳에 온 목적을 이뤄볼까.
***
“아버님! 급보입니다.”
브리튼 공작가의 삼공자 라엘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브리튼 공작은 손을 내밀었다.
“보여 다오.”
“여기 있습니다.”
라엘은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펴보니 짤막하게 한 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급보: 쿤트 자작가의 가주 바스크, 오러 마스터가 됨.
“뭐?”
브리튼 공작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카록 리간드 자작은 최상급 정령사가 되네 마네하고 있고, 이젠 그 아버지까지 오러 마스터가 되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8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