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회: 8권 - 11장. 카록의 존재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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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몬드 후작은 마법서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괘씸한 녀석이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면 헬파이어를 날려주고 싶어서 손이 부들부들 금단현상처럼 떨렸다.
‘카록! 네놈의 장난질 덕분에 나는 수염까지 밀었다.’
다행히 수염은 마법의 힘으로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탈모로 고생하던 한 마법사가 개발한 모근촉진마법을 응용하여서 수염을 순식간에 자라게 한 것이다. 덕분에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일은 막았다.
하지만 수염은 돌아왔지만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감히 어른을 놀려?’
그래.
사실 자신의 실책도 있다.
전설로만 여겨졌던 피닉스가 눈앞에 나타나자 마법사로서의 쓸데없는 호기심이 마구 솟구쳤다. 믿고 싶었기 때문에 속아 넘어갔다.
그래도 그런 자신의 약점을 이용한 카록이 얄미운 건 얄미운 것이었다.
결국 레이몬드 후작은 마법서를 덮었다. 이따위 정신 상태로는 책을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다. 대신 어떻게 카록 놈에게 보복을 할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카록을 떠올리자 자연히 정령술에 대한 궁금증이 생각났고, 연상 작용으로 정령술의 신비를 풀어 마법에 적용하려 했던 예전의 연구 목표가 떠올랐다.
“으음……. 분명히 정령술이란 대자연의 의지가 물질계에 발현된 현상인데…….”
결국 카록에 대한 앙심도 잊고 상념에 잠긴 레이몬드 후작. 그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천생 마법사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단장님!”
그의 개인 연구실의 문을 덜컹 열고 들어오는 젊은 청년 마법사가 있었다.
레이몬드 후작은 짜증이 치밀었다.
“노크 좀 해라! 한창 기분 좋게 사유에 잠겨 있었거늘!”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나를 급히? 대체 무슨 일이냐? 브리튼 공작 전하가 옆에 붙어 있을 텐데 나를 왜 찾나.”
“그게…….”
청년 마법사는 사정을 아는 대로 설명했다.
레이몬드 후작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뭐, 뭐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텔레포트!”
급한 김에 그는 무례 불구하고 오리엔 국왕의 집무실로 단번에 텔레포트를 했다.
집무실에는 이미 오리엔 국왕과 브리튼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폐하!”
“왔는가, 레이몬드 후작.”
“그것이 사실인지요?”
“정확한 진위여부는 모르겠네. 하지만 리간드 자작이 머무는 응접실의 담당 시녀가 목격한 그대로 보고한 것일세.”
그러자 브리튼 공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이목을 끌기 위한 술책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엉뚱한 면이 많은 인물로, 속임수로 이런 소동을 벌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짐 또한 90퍼센트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나머지 10퍼센트는 혹시나 하는…… 끄응.”
오리엔 국왕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엇보다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20대 중반입니다. 상급 정령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점은 감안한다면 분명히 속임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브리튼 공작의 말을 레이몬드 후작이 반박했다.
“하지만 정령술은 마법이나 무예와 달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누군가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경지가 향상되었고, 또 누군가는 오히려 퇴보를 거듭한 끝에 정령친화력을 모두 잃고 말았지요.”
한마디로 종잡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브리튼 공작이 말했다.
“바로 그거요. 우리가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리간드 자작이 이런 술책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겠소. 시기도 너무 공교롭잖소.”
레이몬드 후작은 신음했다.
“으음. 실은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에 최상급 정령사가 되려고 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랬다.
세 사람을 심각하게 만든 소동의 원인은 카록 리간드 자작이 갑자기 최상급 정령술의 실마리를 잡았다며 두문불출한 채 수련을 하고 있는 점이었다.
사흘 전.
응접실 담당 시녀는 카록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카록이 흙으로 이루어진 옥좌에 앉은 채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그의 몸은 시뻘건 불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옷이나 살을 태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한 물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카록의 주변을 뱅뱅 휘감고 맴돌았다.
그야말로 어느 종교의 성인(聖人)을 보는 듯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시녀는 넋을 잃고 들고 있던 식사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카록은 시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최상급 정령술의 실마리를 잡아 수련을 하고 있으니, 절대로 수련을 방해하지 말아다오.”
“아, 아, 알겠습니다.”
시녀는 후다닥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시녀장에게 알렸고, 시녀장은 오리엔 국왕에게 보고했다. 오리엔 국왕은 놀라서 브리튼 공작과 레이몬드 후작을 불러들여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다.
오리엔 국왕은 심각한 얼굴로 레이몬드 후작에게 물었다.
“만약 정말로 그가 최상급 정령사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
“폐하. 최상급 정령술은 그 전설의 라울 리간드가 이룬 경지입니다. 그가 최상급 정령사가 된다면, 레던 왕실은 우리와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못 느낄 겁니다. 아니, 국제정세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최상급 정령술은 인간의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으음…….”
말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였다.
대정령사 라울 리간드의 이야기는 기록에 남겨져 있지 않아 진위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지역에 그의 전설이 구전되고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쳐서 홍수가 날 지경에 이르자, 폭풍을 일으켜서 먹구름을 다른 지역으로 치워버렸다. 통행을 불편하게 만드는 바위산을 깎아서 평지로 만들어버렸다.
대륙 모든 군주가 라울 리간드를 얻기 위해 찾아 나섰다. 심지어 대륙 동북부의 폐쇄적인 국가인 탄트라 왕국은 그를 수호신으로 섬기고 싶어 했다. 그쯤 되면 거의 반쯤은 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존재가 레던 왕실을 섬긴다?
그땐 그야말로 레던 왕실에 전성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카르스 황제가 아무리 대단해도 레던 왕국을 한 뼘이라도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 멸망당하고 싶어서 환장하지 않은 이상에는 말이다.
그뿐인가?
가뭄이 와도 홍수가 나도 리간드 자작이 해결해줄 것이다. 라울 리간드의 전설에 따르면, 최상급 정령사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으음, 그땐 도리어 우리가 동맹을 맺어달라고 해야 할 판이겠군.”
“그렇게 우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점을 노리고서 리간드 자작이 이런 술책을 부린 것입니다. 속임수임이 들통 나도 ‘경지를 이룰 뻔했는데 아쉽게 실패하고 말았다’고 얼버무리면 될 테니까요.”
레이몬드 후작도 거들었다.
“아무도 그게 거짓임을 증명 못할 겁니다. 마법사나 기사가 그런 사기를 치면 저희가 단번에 알아보겠지만, 정령술의 경우는 그 녀석보다 더 뛰어난 정령사가 없는 한…….”
오리엔 국왕은 한숨을 쉬었다.
현 대륙에서 카록 리간드보다 뛰어난 정령사라니.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잖나.
“아무튼 레이몬드 후작.”
“예, 폐하.”
“그대가 한 번 리간드 자작을 확인해보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해보게. 그나마 마법사인 그대가 우리보다는 이런 분야에 밝은 게 아닌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보고 오겠나이다.”
8서클 마법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정령술에 관심을 가졌던 레이몬드 후작이었다. 그런데 코앞에 최상급 정령사가 되려 한다고 주장하는 작자가 코앞에 있으니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텔레포트.”
레이몬드 후작은 즉시 텔레포트로 응접실 앞으로 이동했다.
응접실 입구에는 몇몇 시녀들이 모여서 안쪽을 흘끔흘끔 구경하고 있었다.
“뭣들 하느냐?”
“꺄악!”
“후, 후작 각하!”
시녀들은 고개를 조아린 뒤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레이몬드 후작은 응접실 안을 살폈다.
“허, 구경하고 싶어 할 만하군.”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실로 신비로웠다.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거대한 의자에 앉은 채 명상에 잠겨 있는 카록. 그리고 그 주위를 흙과 물과 불이 원을 그리고 휘돌고 있었다.
‘정말로 최상급 정령술을 수련하고 있는 건가?’
대마법사인 그가 보기에도 얕은 눈속임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광경이었던 것이다.
‘확인하면 될 일!’
레이몬드 후작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