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195화 (195/529)

<-- 195 회: 8권 - 11장. 카록의 존재감 -->

나는 정령술을 이용해서 빠르게 왕도 오리엔까지 날아갔다. 귀찮아서 국경도 검문을 받지 않고 그냥 날아서 통과해버렸다. 물론 국경검문소의 병사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 밀매업자로 전향해도 크게 성공할 것 같군. 하지만 귀찮으니 관두자.

왕도 오리엔이 보이자 나는 과감하게도 곧장 왕궁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과연 오리엔 왕국의 왕궁은 경계가 삼엄했다.

오리엔 왕실이 자랑하는 궁정마법사단까지 왕궁 경비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들키지 않고 통과하기란 무리였다.

야밤에 침입하거나 노움의 힘으로 땅굴을 파서 들어간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

자.

내가 왔다는 사실을 요란법석하게 알려줘 볼까?

오리엔 국왕을 향한 일종의 시위다. 내가 왔으니 어서 동맹 협상 하자는.

「누구냐!」

「멈춰라!」

마법사들이 음성증폭마법으로 쩌렁쩌렁해진 목소리로 경고했다.

뭐, 그러지요.

난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그냥 절차가 귀찮았을 뿐이지.

그나저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주 멋지게 등장해주어야겠군.

나는 어스 핸드 세 개를 만들어 하늘에 띄웠다.

어스 핸드 세 개가 차례로 층층이 계단처럼 내 발밑을 받쳤다. 나는 어스 핸드를 계단 삼아 밟고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갔다. 한 번 밟은 어스 핸드는 다시 움직여서 다음 계단이 되는 식이었다.

“저, 저게 뭐야?”

“하늘에서…… 거, 걸어 내려온다?”

“저런 마법도 있었던가?”

지상에서 놀란 병사들의 웅성거림에 노움과 공유된 감각에 감지되었다.

오리엔 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로브 차림의 마법사 두 사람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건 정령이군. 카록 리간드 자작이 분명해.”

“그런 것 같네. 그러고 보니 단장님께서 카록 리간드 자작이 조만간 뻔뻔한 낯짝을 드밀 거라며, 나타나면 파이어볼 한 방 갈겨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헉, 저게 뭔 소리래?

저들이 말하는 ‘단장’은 곧 궁정마법사단장인 7서클 대마법사 레이몬드 후작이었다. 샐러맨더의 피닉스 행세에 껌뻑 속아 넘어가 일을 그르친 그 영감님 말이다.

으음, 예상은 했지만 정말 크게 화나셨나 보네, 그 영감님.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마법사들의 대화 소리는 계속 들렸다.

“정말 한 방 갈겨야 하나?”

갈기지 마!

“관두게.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걸세.”

“하지만 그분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때가 워낙 많아서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그건 그렇지. 워낙 괴짜이시니. 하지만 타국의 귀족을 보자마자 공격하는 경우는 없지 않나.”

마침내 나는 왕궁의 앞뜰에 무사히 내려섰다. 병사들과 두 마법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병사들이 나를 포위한 가운데, 마법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누군지 알잖소.”

“……리간드 자작님. 왕도 오리엔에서의 비행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한 번 경고를 받으신 적이 있을 텐데요.”

“이러고 다니는 게 버릇이 돼서 내가 또 깜빡했소. 이해해주시오.”

“게다가 왕궁에 입궁하시려면 규정된 절차를 밟아야…….”

“깜빡했소. 그보다 상부에 내가 왔다고 보고나 좀 올려주시오. 중대한 문제로 폐하를 알현하고 싶소. 말해두지만 아주 중차대한 일이오.”

내 말에 마법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리간드 자작님.”

그들은 나를 접객실로 안내했다.

오리엔 국왕은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마 며칠 기다려야 하겠지?

오리엔 왕실의 입장에서는 동맹을 빨리 추진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를 만나주지 않고 계속 기다리게 만들어서 진을 빼 놓을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오리엔 국왕이라면, 날 이 응접실에서 하루 종일 대기하게 만들 것이다. ‘대체 언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곧 시간이 나니 대기하시라 하셨습니다.’ 라고만 답변하면서 나를 지루하게 만들 것이다.

뭐, 일단 기다려보자.

나는 시녀에게 얼그레이와 다과를 부탁했다. 향긋한 얼그레이와 초콜릿 쿠키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3시간이 흘렀다.

회중시계는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할 시간으로, 국왕이 아무리 바빠도 지금쯤 업무가 끝난 상태일 터였다.

그때, 시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리엔 국왕이 드디어 날 부르나?

반쯤 기대했는데, 예쁘장한 시녀는 나에게 물었다.

“저녁식사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무거나 갖다 줘.”

“네.”

시녀가 응접실을 떠나고, 나는 혀를 찼다.

정말 안 만나줄 작정인 듯했다.

에잉.

하는 수 없구나.

내가 기다리다 지쳐서 진이 빠지길 바라는 눈치인데, 잘못 짚었어.

난 홀로 놔두면 혼자서 아주 잘 노는 사람이라고!

***

“폐하. 카록 리간드 자작이 왔습니다.”

오리엔 국왕을 독대한 브리튼 공작이 말했다.

오리엔 국왕은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모를 수가 있겠나. 이번에도 하늘을 날아서 왔다지? 존재감 한 번 참 요란 찬란한 놈이로군.”

“어서 협상을 하자는 시위일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협상을 최대한 미루고 싶은데, 그렇지 않나?”

브리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첩보에 따르면 혼트 제국 내에 있는 유목민족들 중 일부가 황실에 반발하여 독립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내전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망해본 뒤에 동맹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목민족들의 독립이 성공할 것 같은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독립 세력을 육제후가 비밀리 지원하고 있고, 레던 왕실이 독립 세력과 동맹을 맺을지의 여부를 놓고 판단해야 합니다.”

“레던 왕실이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

“예. 육제후의 비호를 받고 있는 비제 자작이 그 동맹 건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 비제 자작이 사퇴했다는 소식은 아직 브리튼 공작가의 정보망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레던 왕실은 그 동맹에 대해 어떻게 결정한 건가?”

“아마 기각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카록 리간드 자작이 이곳에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맹을 맺기 위해 온 것을 보면,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는 손잡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본 오리엔 국왕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참고로 유목민족에 대한 첩보는 란즈헬 백작이 일부러 우리에게 흘린 정보입니다.”

“큭큭. 동맹을 방해하려는 모양이군. 타깃은 리간드 자작인가.”

“리간드 자작이 공을 세우는 게 싫겠지요. 그는 레던 왕실파의 핵심 인물로 장래가 두려운 젊은 인재이니까요.”

“그들 또한 레던 왕국의 귀족인 이상, 우리와의 동맹이 나라에 이롭다는 것을 알 텐데……. 란즈헬 백작은 유목민족 독립 세력을 이용해 혼트 황실에 타격을 입힐 자신이 있나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란즈헬 백작의 의도야 어쨌든, 저희는 동맹 협상을 최대한 미뤄야 합니다.”

“알겠네. 리간드 자작은 당분간은 나를 만날 수 없을 걸세.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고 싶어지게 만들어야겠군.”

그렇게 말하면서 오리엔 국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내 사랑스런 막내딸 세렌스와의 혼담을 회피한 건방진 녀석에게 이 정도 대가는 당연한 것이다.’

카록의 혼인 소식이 알려지고서 딸 세렌스 공주는 우울한 얼굴을 많이 보이곤 했다. 어지간히도 카록이 마음에 들었었던 모양이었다. 딸의 상심을 보니 아비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가엾게도…….’

딸이 가여운 만큼 카록이 괘씸해지는 오리엔 국왕이었다. 

***

이틀이 지났다.

아무래도 오리엔 국왕은 정말로 날 만나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으음, 곤란하게 됐다. 국왕이 안 만나겠다니 내가 어찌 손을 써봐야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혼트 제국의 내전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판단할 생각인가 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나는 동맹의 조건 중 하나로 오리엔 왕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해줄 생각이었다.

바로 투자 실패로 재고가 왕창 쌓여버린 곡물을 내가 인수한 유란 상단의 유통망을 통해 혼트 제국의 유목민족들에게 팔아치울 계획이었다. 그럼 오리엔 왕실도 곡물의 재고를 털어버리고 손해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다.

유목민족 독립 세력이 혼트 황실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식량을 모으고 있는 지금이 가장 적기였다.

그런데 오리엔 국왕은 아예 날 볼 생각도 안 하니 나의 뜻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

무슨 수로 메시지를 전달할까.

아무래도 오리엔 국왕의 측근 중 한 명을 이용해서 내 뜻을 전달해야 할 것 같았다.

누가 적당할까?

오리엔 국왕의 측근이라…….

“으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잖아! 이렇게 곤란할 땐 이용해먹기 쉬운 대마법사 영감님이!

마법의 경지는 실로 대단하지만 어딘지 어수룩하고 성격도 외골수 다혈질! 그러나 그 마법이 너무도 대단하여 브리튼 공작과 함께 오리엔 국왕의 최측근이 될 수밖에 없었던 레이몬드 후작 말이다.

그 영감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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