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회: 8권 - 9장. 바스크 쿤트의 수련 -->
하지만 이 정도는 실력이 뛰어난 베테랑 기사라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과 함께 훈련을 한 기사들 아닌가. 그들의 스타일을 평소부터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바스크 정도의 연륜이 없으면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 오러 마스터의 수준은 아니었다.
‘뭘 조바심 내나. 이제 시작인 거다.’
바스크는 계속 대결을 관찰했다.
리처드는 훌륭한 전투 센스의 소유자였다. 그는 정면에서 공격을 계속해봐야 하딘의 라운드 실드를 뚫을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리처드는 사뿐사뿐 발을 움직였다.
하딘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콰앙! 쾅! 쾅!
하딘 역시 제자리에서 조금씩 회전을 하며 맞대응했다.
하딘의 센스도 범상치 않았다.
겉보기에는 거북이처럼 웅크린 단순한 방어 전법 같지만, 가끔씩 모닝스타를 휘둘러서 리처드를 요격하는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철통같은 방어에다가 좋은 타이밍에 날아드는 날카로운 요격. 훌륭한 혼연일체였다.
‘하딘도 훌륭하군. 아무튼 카록 녀석……. 그 녀석은 마스터도 아닌 주제에 무슨 재주로 저런 재능을 알아본 거지? 녀석이 데려온 리처드와 하딘 두 사람은 하나같이 놓쳤더라면 땅을 치며 후회했을 인재들 아닌가.’
리처드와 하딘의 공방은 결코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리처드는 격렬하게 움직였다.
왼쪽으로 돌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공격하기도 했고, 이동속도도 빠르게 했다가 느리게 했다가를 반복하며 변칙을 보였다.
콰콰쾅!
하딘은 이를 막아내면서도 조금씩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 방어적인 스타일이다 보니 주도권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딘이 그대로 패배를 기다릴 리가 만무했다.
‘하딘이 승부를 걸겠군.’
바스크는 하딘의 얼굴 표정과 뒷발의 미묘한 변화를 보고 판단했다.
예상대로였다.
하딘은 불쑥 한 걸음 나아갔다.
리처드는 계속 일정 거리를 두고 하딘의 주위를 돌고 있었기 때문에, 원의 중심인 하딘이 움직일 때마다 리처드가 그리는 원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원이 일그러지자 그만큼 충돌도 거세어졌다.
쾅쾅쾅! 까아앙! 챙!
리처드는 하딘의 라운드 실드를 마구 두들겼다. 하지만 방패만 두들겨서는 끝이 안 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리처드도 승부수를 띄울 것이다.’
바스크는 리처드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폈다.
잠시 후, 리처드의 미세한 이상 동작을 발견했다.
‘몸의 무게중심을 한 발로만 지탱하고 있다? 그럼 다른 발은……!’
그 순간,
퍼엉!
리처드는 벼락같이 발차기를 펼쳤다. 그의 발이 하딘의 라운드 실드 끝을 강타했다.
“큭!”
하딘은 깜짝 놀랐다. 발차기에 라운드 실드가 옆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굳건한 방어가 살짝 열리자, 그 틈으로 리처드는 롱 소드를 찔러 넣었다.
롱 소드가 하딘의 가슴팍에 살짝 닿은 채 멈추었다.
리처드의 승리였다.
“하아. 역시 형님은 당해낼 수 없군요. 졌습니다.”
하딘은 라운드 실드와 모닝 스타를 내리며 패배를 시인했다. 리처드는 그런 하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도 지껄이는군. 내가 찌르는 순간 모닝스타로 맞받아치려 한 주제에. 진짜 싸움이었다면 내 검은 네 가슴을 꿰뚫고 네 모닝스타는 내 어깨뼈를 부숴놓는다, 정도 되겠군. 흥, 상처투성이의 승리라니. 하딘 주제에 건방져.”
“하하,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그러자 바스크 역시 관찰을 마치고 조언을 해주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주군께선 어떠셨습니까?”
리처드가 물었다.
바스크는 리처드에게 말했다.
“둘 다 훌륭했다. 리처드, 네 경우는 테크닉은 내가 따로 지적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빠르고 화려하지만 파괴력이 부족했다. 네가 고전한 이유는 방패로 잘 막으면 문제없다는 안도감을 하딘에게 주었기 때문이지. 때로는 방패로 방어를 굳힌 하딘을 정면으로 공격해도 타격을 입힐 정도의 파괴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상대에게 정면에서 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심어서 혼란을 줄 수 있다.”
리처드는 아 하고 감탄했다.
“그렇군요. 좌우는 물론 정면까지 공격의 폭을 넓히면 그만큼 더 교란시킬 수 있으니…….”
“그리고 하딘은 방어는 무척 좋았지만, 공간 장악력을 높여서 상대에게 압박을 주는 테크닉이 더 필요하다. 또한 모닝스타의 요격 궤도를 좀 더 다양화해야 기습적인 반격이 효과를 거둘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당장 수련을 시작해라. 다음에 다시 겨룰 땐 보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옛!”
리처드와 하딘은 각자 바스크에게 지적당한 사항을 보완하기 위해 수련을 개시했다.
‘어느 정도 싸움의 흐름을 예측했군. 하지만…….’
결국 주의 깊은 관찰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측일 뿐이었다. 미세한 동작에 담긴 힌트를 빠르게 포착해서 계산한 것이다.
오러 마스터처럼 한 번 본 순간 모든 것을 꿰뚫어볼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을 본 건가. 그때 뮤트 공작 전하는 무엇을, 어떻게 보았단 말이냐! 제기랄!’
뿌옇게 서리가 낀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저 너머로 분명히 뭔가가 있는 게 느껴지는데 흐릿해서 볼 수가 없었다.
대체 오러 마스터란 인종들은 뭐냔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단 말인가. 인간과 다른 감각기관이라도 있단 말이냐!
무슨 수로 상대를 일순간 파악하는 눈과 오러 블레이드를 오랫동안 집약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느냔 말이다!
‘……가만 있자. 오러?!’
그러고 보니 깜빡했다.
오러 블레이드.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는 안목과 오러 블레이드에 무언가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고 가설을 제기한 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이런 멍청한! 벌써 까먹고 있었다니.’
그렇다.
오러다!
지금까지 바스크는 리처드와 하딘의 대련을 지켜볼 때 그들의 육체만 살펴보았다. 사물의 본질을 보지 않고 겉면만 훑어본 꼴이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군. 이래서야 정말 아들들한테 바보 아버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군.’
어떻게 겉모습으로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방의 오러의 흐름을 볼 수만 있다면, 상대에 대해서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오러는 의지에 따라 흐른다.
즉, 상대의 오러의 흐름을 본다는 것은 상대의 의지를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정확히는 보는 게 아니고 느끼는 것이지. 자신의 오러도 무기를 통해 발출하기 전까지는 육안으로 볼 수가 없는데, 하물며 타인의 오러는 말할 필요도 없지.’
그래서 오러 마스터는 상대의 무(武)를 단숨에 파악한 것이다.
싸우기 전부터 이미 오러를 통해 느끼고 있었으니까!
가설들이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자 바스크는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는 수련을 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리처드에게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리처드, 오러 컨트롤에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원채 호쾌한 성격인 리처드는 겸손도 떨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바스크는 씨익 웃었다.
“오러 브레싱을 가장 오래해본 게 몇 시간이냐?”
“음, 어릴 때 한창 분위기 탔을 땐 6시간까지 해봤습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는데 눈을 뜨니 저녁이더군요.”
“난 네 나이 때 하루 종일도 해봤다. 끈기가 없군.”
리처드는 눈매를 꿈틀하더니, 승부욕을 느꼈는지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군요.”
“네가 나 정도의 자질이 있다면 말이지.”
“좋습니다!”
리처드는 제자리에 털썩 앉아서 자세를 잡고 두 손을 양 무릎에 얹었다. 그리곤 천천히 호흡을 시작했다. 대기 중의 마나를 체내에 받아들여서 신체에너지인 오러로 변환하는 오러 브레싱이었다.
‘단순하기는.’
바스크는 아들들한테 단순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자신보다 더 단순한 리처드 벅에게 황당함을 느꼈다.
뭐, 아무튼 덕분에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바스크 역시 리처드를 마주보고 앉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오러 브레싱이 아닌, 리처드의 오러의 움직임을 느끼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바스크가 감지할 수 있는 건 리처드가 가진 오러의 양 정도였다.
보통 오러 엑스퍼트의 실력을 가진 무인이 상대방의 무위를 파악할 땐 오러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를 감지한다. 바스크가 리처드의 오러를 탐지하는 것 역시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좀 더 집중을 하면 되는 건가?’
바스크는 오기가 생겨서 혼신의 집중을 하였다.
리처드의 체내에 오러가 꿈틀거리는 것이 아스라이 느껴졌다. 안개 너머를 보는 것처럼 흐릿하고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게 있다, 딱 그 정도.
그래도 계속 노력하면 잘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방해물이 나타났다.
그건 바스크 자신의 오러였다.
오러는 본래 혈액순환처럼 계속 몸을 순환하는 성질의 기운이었다.
이를 테면 흘러가는 시냇물이지, 잔잔한 호수가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의 오러가 기감(氣感)을 방해했다. 소음 때문에 다른 소리가 안 들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바스크는 남을 알려면 먼저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기본적인 교훈을 새삼 깨달았다.
‘일단 나의 오러를 잔잔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그렇군. 그게 바로 평정심이라고 하는 건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의지는 오러도 고요하게 만든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바스크는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