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189화 (189/529)

<-- 189 회: 8권 - 8장. 비제 자작과의 대담 -->

“듀론 후작 각하와 처음 만났을 때 레던 왕국의 미래에 대하여 저에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비제 자작은 강한 관심이 생겼는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제 대답은, 요약하자면 대외적으로는 오리엔 왕국과 동맹을 맺어서 혼트 제국과 팽팽한 세력의 균형을 이룸으로서 전쟁의 발발을 막고, 국내의 내정에 있어서는 상공업을 진흥시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게 제 정치적 신념인 것입니다.”

“…….”

“이번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의 동맹을 반대한 것 역시도 제 신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일 때문에 절 찾아오신 거겠지요?”

나는 대화의 주도권을 완전히 쥔 상태에서 비제 자작이 나에게 따지려 했던 화제까지 선수를 쳤다.

“듣고 싶소.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 동맹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말이오. 나는 이것이 혼트 제국에 큰 타격을 입힐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소. 그들이 독립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문제없지. 중요한 건 혼트 제국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째서 반대한 것이오? 단지 내가 건의했기 때문이오? 그게 당신의 신념이오?”

비제 자작은 다시 분노가 떠올랐는지 조금은 격해진 어조로 따졌다.

“물론 반대한 이유는 비제 자작님과는 상관없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첫 번째 이유는 지금의 형국이 카르스 황제가 처음부터 예상하고 의도한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바덴 강 협상 문제로 협조를 구할 때, 카르스 황제는 이미 이를 유목민족을 자신의 휘하로 복속시킬 계기로 만들리라 계획했습니다. 지금까지 펼쳐진 모든 상황이 카르스 황제가 의도한바 그대로입니다.”

“이 모두가 혼트 황제의 뜻 대로라고?”

“그렇습니다. 바덴 강 협상 얘기를 꺼냈을 때 유목민족 문제까지 내다본 괴물 같은 황제입니다. 그런 그가 유목민족에 의한 내전 상황에 우리가 끼어들 수 있다는 추측도 못했겠습니까?”

비제 자작은 내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황제는 우리가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오?”

“이건 제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 카르스 황제는 우리가 개입하길 원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비제 자작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군. 이 정도도 내다보지 못하는 건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카르스 황제는 우리가 군사행동으로 개입하기 전에 유목민족 독립 세력을 격파할 자신이 있는 겁니다. 어려운 혼트 제국의 재정 문제까지 고려하면 카르스 황제는 분명히 단기격파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제야 비제 자작도 내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 동맹을 맺고 개입을 선언했을 때, 그는 단숨에 독립 세력을 토벌해버리고 우리가 반란 세력과 동조한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한다는 시나리오로군.”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달리 손 써보지도 못하고 명분만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대의 말은 마치 카르스 황제가 유목민족 독립 세력을 단기 격파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잖소.”

“양측의 전력을 단순하게 비교해보아도, 카르스 황제는 수십만의 대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유목민족의 절반 이상이 황실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에 비해 탈라크 부족을 중심으로 뭉친 독립 세력은 전력이 부족합니다. 유리한 면이 있다면 육제후로부터 비밀리에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지요.”

“전쟁은 단순히 숫자로만 하는 게 아니잖소?”

“그래서 더 문제입니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독립 세력의 우두머리인 탈라크 족장은 굉장히 성격이 폭급하고 사나운 자입니다. 그들이 독립에 성공하려면 장기전밖에 없는데, 장기전에 능한 성격이 아닙니다.”

비제 자작은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말고 날 노려보았다.

그렇게 쏘아보면 어쩔 건데?

“……두 번째 이유는 뭐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 신념입니다.”

“신념…… 또 그 이야기요?”

“예. 대외적으로 오리엔 왕국과 동맹을 맺어 세력의 균형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상공업에 장려해서 경제적인 진흥을 이끄는 것. 여태까지의 제 행보는 그 두 가지 틀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잘난 신념이란 게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요?”

“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으니 하나 묻겠습니다. 만약 유목민족을 이용해서 혼트 제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다면,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까?”

“…….”

비제 자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국력을 회복하면 곧바로 복수하려 들겠죠. 여태껏 혼트 제국과의 관계는 늘 그랬으니까요. 혼트 제국은 우리의 악의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되갚으려 할 겁니다.”

“하지만 유목민족의 독립이 성공한다면 혼트 제국도 경거망동을 하지 못할 게 아니오!”

“유목민족이라…….”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저 사람은 지금 외교적인 실적을 쌓고 싶어서 눈에 뵈는 게 없나보다.

“알고 계십니까? 대륙 사람들은 흔히 혼트 제국을 야만인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모를 리 없잖소.”

“그럼 그러한 좋지 않은 인식의 대부분이 혼트 제국의 유목민족 때문이라는 것 역시 아시겠군요?”

“그, 그건…….”

비제 자작은 크게 당황했다. 그제야 자신이 간과한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혼트 제국과 교류가 좀처럼 없는 이유가 바로 그 유목민족의 약탈 때문입니다. 혼트 제국에 대한 안 좋은 인식 역시 유목민족에게 약탈을 당해 크게 낭패를 본 민간 상인들을 통해서 퍼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유목민족의 독립을 돕는다고요? 대체 무슨 명분으로?”

“…….”

“백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상공업을 진흥시키려는 왕실이 왜 혼트 제국과의 교역을 방해하여 경제의 진흥을 해치는 유목민족을 돕는 것인지 말입니다.”

아아.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목이 아프다.

나는 얼그레이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계속 말했다.

“바람의 일족이라지요. 바람처럼 자유롭게 초원을 누비는 민족이라고 그들 스스로는 꽤나 자부심을 갖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국법도 지키지 않고 빠른 기동력으로 넓은 초원을 무대로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혼트 황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고요?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비제 자작은 사색이 된 채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런 나라와 우방이 된다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할 식량을 얻을 생산성이 없기 때문에 약탈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독립 국가를 세운다면, 그들은 대체 어떤 수단으로 국가의 틀을 유지할 것 같습니까?”

유목민족이 하나의 나라를 세워서 세력을 형성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약탈도 국가적인 규모로 커질 게 분명하다. 그때 그들의 타깃은 혼트 제국뿐만이 아닐 것이다. 혼트 제국보다는 보다 식량 생산을 많이 하는 우리 레던 왕국이 훨씬 좋은 먹잇감일 테니까.

그런 그들을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명분상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명분.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 같지만, 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 나라의 왕실은 정의로워야 한다. 그래야 백성들이 따른다.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육제후가 아직도 레던 왕실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은 귀족으로서 왕실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왕실은 정의로운 존재로 결코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이 지겨운 대화도 끝을 내야겠다.

나는 비제 자작에게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비제 자작님께서는 오랫동안 외교부상서를 지내셨는데, 대체 어떤 신념을 갖고 계시는 겁니까?”

“나는…… 나는…….”

비제 자작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을 못하겠지.

애당초 신념이란 게 없었을 테니.

사실 나는 그런 비제 자작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비제 자작은 전생의 나와 비슷했다.

아니, 아주 똑같다.

아서 형님은 장남이자 후계자로서 가문의 번영을 이끈다는 신념을 가졌다. 릭 형님 또한 좀 단순하긴 하지만 무인으로서 강해지겠다는 신념을 가졌다.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존재감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이든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점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이었다. 무언가 쓸모 있는 특기가 하나 생기면 그게 나의 존재를 증명할 거라고 착각한 것이다.

한참 나이를 먹어서야 나는 그게 헛된 망상을 쫓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 존재는, 자기 인생의 의미는 타인의 시선에서 찾으면 안 되는 거였다.

남들과 상관없이 나는 그저 나였을 뿐이다.

비제 자작은 전생의 나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외교적인 실적을 쌓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 존재감의 부재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존재가 부정될 것 같아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발버둥치고 있는 거겠지.

사실 정치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함정에 빠진다.

신념이 없는 정치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해 권력을 추구한다. 권력을 손에 넣어서 남들에게 권력자로 대접을 받을 때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그래서 무섭도록 권력에 집착하는 것이다. 권력을 잃으면 자신의 존재 또한 사라질 거란 두려움 때문이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죠.”

나는 멍한 표정을 한 비제 자작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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