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회: 8권 - 7장. 신념 -->
이틀 뒤에 에릭 국왕은 긴급 궁정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왕실 관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짐은 혼트 제국의 내전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유목민족의 독립을 도와야 하는 도의적인 명분이 없고, 둘째로 혼트 제국과의 관계를 약화시켜 차후 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정과 상관없이 혼트 제국의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예의주시한다.”
에릭 국왕의 선언에 왕실 관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에릭 국왕의 태도가 너무 단호하여서 뭐라고 반박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겨우 이틀 만에 저렇게 태도가 달라지다니.
‘카록 리간드 자작이다. 그 젊은 친구가 폐하의 마음을 저렇게 단단하게 굳혀놓은 것이다.’
비제 자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신뢰인가. 그만큼 에릭 국왕이 카록의 판단 능력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질투심이 났다.
자신과 너무나 비교되는 카록 리간드 자작에게 시기심이 솟았다.
‘그래, 카록 리간드는 나의 적이다. 자기 개인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서 나의 제안을 묵살시키도록 국왕 폐하를 옆에서 부추겼어.’
외교적인 업적을 올릴 수 있는 마지막 찬스를 잃은 탓에 비제 자작의 마음은 온통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때문에 카록이 마치 국왕에게 아양을 떨어서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간신배처럼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진정 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직접 가서 따져봐야겠어!’
긴급 소집된 궁정 회의가 끝나자 비제 자작은 곧장 카록을 찾아 나섰다.
***
유목민족 독립 세력과의 동맹 문제도 결론이 났기 때문에 잠시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뭐 하고 놀까 고민하다가 나는 산책도 할 겸 레던 왕성 시내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앞으로는 왕궁에 출근해야 하니 이 근처에 집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생각난 김에 나는 묻고 물어서 중개업자를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레던 왕성에서 가장 오랫동안 땅 중개업자로 활동했다는 노인이 나를 반겼다.
“집을 좀 보고 싶은데.”
노인은 스윽 내 레드 미스릴코트를 보았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으신 분 같군요. 집이라면 특별히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십니까?”
“레던 왕성 안에만 있으면 위치는 크게 상관이 없어. 다만 규모가 좀 컸으면 좋겠고 정원도 딸렸으면 좋겠고 마차가 다니기에 편한 대로에 위치해 있으면 더욱 좋지.”
“저기, 나리……. 여기가 레던 왕성인 것은 아시는지…….”
“응? 당연히 알지. 그럼 여기가 레던 왕성이지 왕도 오리엔이겠어?”
“레던 왕성은 타지에 영지를 가지신 귀족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땅값이 살인적으로 높습니다. 하물며 말씀하신 조건을 모두 충족한 저택이라면…….”
“이봐, 이봐. 우리 서로 능청 떨지 말자고. 아까 처음 마주쳤을 때 내가 입고 있던 미스릴 코트를 흘깃 확인한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딴 소리야? 땅값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니까 집이나 소개시켜줘 봐.”
“어이쿠, 역시 그렇습니까? 그럼 제가 나리께서 딱 원하시는 저택 몇 채를 소개시켜드리지요.”
노인도 그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 어차피 산책 겸 돌아다니고 싶었으니까 함께 가보자고.”
“예. 혹시 나리 마차를 타고 오셨는지요?”
“아니.”
“집을 네 군데 정도 볼 건데 마차가 있어야겠군요. 잠시 기다려주시면 제가 마차를 구해…….”
“아냐, 됐어.”
“예? 하지만 걸어가기에는 좀 멀고 제가 또 요즘 무릎이 아파서…….”
나는 혀를 쯧쯧 차고는 노움을 불렀다.
-불렀어?
“응. 어스 핸드.”
-알았어, 아빠.
흙이 뭉쳐져서 커다란 손바닥 두 개를 만들었다. 나는 그중 하나의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갔다. 또 다른 어스 핸드는 노인을 덥석 움켜쥐었다.
“으아악!”
거대한 흙의 손바닥에 붙잡힌 노인이 기겁하여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어스 핸드 위에 주저앉은 형국이 되자 비로소 노인은 겁에 질려 발광하는 대신 신기하다는 듯이 어스 핸드를 툭툭 쳤다.
“오오, 이건 마법입니까?”
“정령술.”
“정령술이라고요?”
그제야 노인은 경악한 눈으로 날 보았다. 노인은 자기 이마를 탁 치며 소리쳤다.
“이제 보니 그 유명하신 카록 리간드 자작님이셨군요. 아이고, 이 멍청한 머리 좀 보게! 자작님께서 입고 다니신다는 레드 미스릴 코트를 보고도 못 알아보다니.”
“뭘, 못 알아볼 수도 있지. 나도 종종 우리 둘째 형님 얼굴을 못 알아볼 때가 있다니까.”
“헐헐. 좋습니다. 부자라고 소문이 자자하신 리간드 자작님의 저택을 찾는 일이니, 제가 매물로 나온 집 중 가장 비싸고 좋은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느 쪽인데?”
“여기서 북쪽으로 3백 미터쯤 떨어져 있습니다.”
“오케이. 꽉 잡아.”
나는 노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어스 핸드를 조종해 날아갔다.
실제로 어스 핸드를 조종하는 건 노움이었지만, 노움과 나는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조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노인이 말한 저택의 앞마당에 도착했다. 어스 핸드에서 내리면서 노인이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마차로 가면 길에 워낙 행인들이 많아서 한참이 걸렸을 텐데요.”
“뭘. 그런데 그것보다, 저택이 너무 작은 거 아냐?”
나는 저택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저택이 어떠냐 하면, 쿤트 영지에 있는 우리 집을 4분의 1 정도로 압축시켜놓은 듯한 크기였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외관도 우리 집과 비교해서 별로 세련된 느낌이 없었다.
물론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건축자재로 지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지을 때 고작 500레디나밖에 안 들였으니까.
하지만 그 대신 우리 집은 노움이 평소에 놀면서(?) 만든 석상으로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엄청나게 화려했다. 앞마당을 좀 둘러봐도 노움이 솜씨를 부린 수십 개의 석상으로 눈이 즐겁다.
이 저택은 앞마당도 너무 작아서 석상이고 뭐고 여유 공간이 없었다.
나의 실망감을 눈치 챘는지 노인이 말했다.
“원래 이곳 레던 왕성은 워낙 인구도 많은데다가 웬만한 귀족 분들이나 갑부 상인들이 이곳에서 집을 사기 때문에 땅값이 타 지역보다 수십 배 이상 높습니다. 당연히 집 크기도 다른 곳보다 작지요.”
“그건 아는데, 그래도 너무 작아. 이런 좁은 데서 살다간 숨이 막힐 거야. 폐소공포증에 걸릴 게 분명해.”
“헐헐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튼 마음에 안 들어. 내 마누라 중에는 허영심이 대단한 여자도 있다고? 이런 좁은 집은 남부끄러워서 못 산다고 나가버릴 게 분명해.”
“헐헐, 줄리아 부인 말씀이시겠지요?”
“어라? 줄리아를 알아?”
“그렇다마다요. 옛날에 여기서 레스토랑을 할 때 안면을 트고 지냈지요. 워낙 발이 넓으신 아가씨라 레던 왕성에서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지냈습니다. 가격도 비싼 레스토랑에 자꾸 오라고 꾀어서 곤란했습니다만, 헐헐.”
“오, 줄리아와 잘 아는 사이였어? 그럼 얘기가 더 쉽군. 나는 번잡한 걸 싫어하고, 줄리아는 예전보다 수십 배는 더 허영이 강해졌어. 왜냐면 여기서 레스토랑을 운영했을 때보다 훨씬 지위가 상승했는데도 허영의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았거든.”
노인은 내 말에 두렵다는 듯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것 참…… 그럼 이 집 가지고는 안 되겠군요.”
“그렇지?”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레던 왕성 바깥의 빈 땅을 왕실로부터 임대해서 저택을 직접 짓는 것입니다. 대가문의 귀족 분들이 그런 방식으로 레던 왕성에 집을 구합니다. 그런 높으신 분들은 시내에 있는 작은 집이 성에 차지 않으니까요.”
“왕실에서 이 성 주변의 땅을 임대해준다고?”
“예. 내전에 대흉년에 흑혈병에, 이것저것 일들이 많았잖습니까. 가뜩이나 왕실 재정이 어려운 판국이니 어차피 쓰지도 않는 성 밖에 널린 빈 땅을 비싼 값에 임대해주는 것이지요.”
“호오, 괜찮은 장사인데. 그런 높은 인간들의 습성 중 하나가 또 경쟁적으로 큰 집을 짓는 거잖아.”
“헐헐, 그렇습니다. 다른 귀족이 성 밖에 커다란 저택을 지었는데, 자신은 시내의 조그만 집에서 살면 자존심이 상하지요. 그래서 성 밖에는 내로라하는 대가문 소유의 저택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한 전용 마차도로까지 개설되어서 왕궁에 오가기도 편리하게 되어 있지요.”
헤에, 레던 왕실도 제법 돈벌이를 할 줄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