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회: 8권 - 4장. 란즈헬 백작의 심계 -->
“어휴, 정말 얄밉다니까. 큰 일 하는 남자만 아니었어도 확 이혼하고 쫓아내는 건데.”
“얘야, 잊었나본데 이 저택 짓는 비용의 절반 이상은 내 돈이라고.”
“뭐예요? 그럼 날 쫓아내겠단 말이에요?”
줄리아가 도끼눈을 뜨자 뜨끔한 나는 즉시 말을 바꿨다.
“아,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쫓아내겠대?”
“그러니까 앞으로 부부싸움 해서 한쪽이 집 나갈 일 생기면 단주님이 나가기예요. 알았죠?”
“시, 싫다, 이 요망한 것. 죽을 때까지 평생 옆에서 붙어 살 테니 어림없는 소리 마라!”
“깔깔깔! 이 진드기 같은 남자.”
줄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몰랐니? 내가 얼마나 진드기 같은 남편인지 평생에 걸쳐 알게 될 거다. 아니지. 죽어서 다음 생에서도 진드기처럼 너희들에게 달라붙을 테니 그리 알아.”
“에엑. 다음 생에는 다른 남자도 좀 만나고 싶은데.”
“커헉! 얘야!”
“후훗, 농담이에요.”
줄리아는 내 품에 꼬옥 끌어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아아, 행복해.
이대로 평생 놀고 싶다.
“그런데 평생 이곳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우리.”
줄리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왕실에 입관했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레던 왕성에서 살아야지. 왕궁과 쿤트 영지를 매번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제 난 리간드 가문의 가주야. 왕실에서 물러나게 되더라도 이곳 쿤트 영지가 아닌 리간드 영지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살아야 돼.”
“그럼 전 어떡해요?”
“잉?”
“뭐가 잉이에요? 전 카록 병기점 사장이라서 여길 떠날 수 없잖아요!”
헐, 그러고 보니 그러네.
현재로서 카록 병기점의 경영을 맡을 사람은 줄리아밖에 없었다.
끄응, 어쩌지? 그럼 하는 수 없이 줄리아는 이곳에 두고 시스만 데리고 레던 왕성으로 상경해야 하나?
그런데 그때 줄리아가 도끼눈을 뜨고 날 노려보았다.
“지금 날 여기 혼자 놔두고 시스만 데리고 갈 생각 했죠?”
“허억!”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지금 날 혼자 놔두고 시스랑 둘이서 알콩달콩 신혼생활을 즐기려고 했어요? 웃기지 마요! 누굴 기러기 부인으로 알고……! 이럴 거면 이혼해요!”
난 진땀을 뻘뻘 흘리며 심통이 난 줄리아를 달랬다.
“얘, 얘야. 설마 내가 널 혼자 놔두겠니? 무슨 방도를 찾을 테니 염려하지 마.”
“흥! 저도 사장 노릇 때려치우고 단주님 따라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하지만 네가 없으면 카록 병기점은 어떡하니?”
“다른 사람 찾아요.”
“너 만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네가 그동안 워낙 잘 경영해온 탓에 후임자에게 부담이 많이 갈 거야.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범상한 사람은 감당 못한다고.”
“에이, 대충 아무한테나 맡겨버려요. 이미 번 돈도 충분한데 망해도 상관없잖아요?”
“허영심이 충만한 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걸로 만족한단 말이야?”
“호호호, 생각해보니까 내 남편이 장차 재상이 될 텐데 뭐가 아쉬울 게 없는 거 있죠? 잘나가는 여사장보다는 재상의 부인이 훨씬 끗발이 세잖아요. 이제 카록 병기점 같은 건 굿바이라고요.”
“…….”
그러자 유능한 여사장 줄리아 대신, 사교계를 주름잡는 권력자의 부인 줄리아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 돼, 위험해. 너무 잘 어울려서 위험하다고! 줄리아는 권력을 휘두르는 일도 충분히 잘 할 애야!
“으음. 줄리아, 조만간 네 후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동안은 계속 카록 병기점을 맡아줘.”
“뭐예요. 역시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응, 한 명.”
“그게 누군데요?”
“에반 테일러라고 알아?”
내 말에 줄리아는 놀란 얼굴을 했다.
“당연히 알죠. 란즈헬 백작의 심복이라는 남자잖아요. 그 남자를 영입하려고요?”
“응.”
에반 테일러 남작. 달리 란즈헬의 청소부라 불리는 그 남자가 바로 내가 염두에 둔 인재였다.
나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직원으로 삼고 싶었었다. 똑똑하고 기민하여 일처리가 탁월하다. 탈라크 족장을 부추겨서 독립을 유도한 최근의 행보만 봐도 에반의 교섭 능력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정치공작에 치중해왔지만, 그 정도의 남자라면 상단의 경영에도 좋은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나는 시스, 줄리아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에반을 등용하는데 성공하면 상단 일을 총괄하게 할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그 남자는 란즈헬 백작가의 사람이잖아요.”
“정확히는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수족이지. 하지만 대공자인 제이슨 란즈헬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란즈헬 백작이 죽고 나면 분명히 육제후 쪽을 떠나게 될 거야.”
“그만큼 쓸 만한 남자라면 굳이 내칠 이유가 없지 않나요?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해도 말이에요.”
“아니. 그걸 알아도 제이슨 란즈헬은 에반 테일러를 곁에 두고 쓰지 않을 거야.”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난 제이슨 란즈헬 같은 타입의 남자를 안다.
지독히 센 자존심!
에반 테일러를 중용하는 것이 가문에 이롭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제이슨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워낙 자존심이 센 사람이라서 처음의 뜻을 좀처럼 굽히지 않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제이슨 란즈헬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럼 에반 테일러 남작은 란즈헬 백작가에서 축출되면 단주님에게 오려고 할까요?”
“물론이지. 미리 언질은 해뒀어.”
“에이,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껏 적대관계였던 단주님의 수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데요.”
“흐흐흐, 얘야. 아직 어리구나.”
나는 줄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어린애취급을 당한 게 싫은지 줄리아는 뾰로통한 표정이 되었다. 삐친 얼굴도 귀여워서 계속 쓰다듬었다.
“사실은 에반 테일러도 제이슨 란즈헬 못잖게 자존심이 강한 남자야.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심복으로서 온갖 굳은 일을 다 도맡아왔지만, 그는 자신의 능력을 무척 신뢰하고 있지.”
예전에 영지전에서 승리하고 교섭을 했을 적에 에반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난 에반 테일러의 성격에 대해 대강 파악했다.
“제이슨 란즈헬에 의해 내쳐지면, 에반 테일러도 오기가 생길 거야. 자신의 능력을 똑똑히 보여주어서 내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생길걸?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게 올 거야. 두고 보렴.”
“단주님.”
“응?”
“음흉해요.”
“엑?! 뭐가?”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을 빤히 알고서 에반 테일러 남작에게 쫓겨나면 오라고 언질을 준 거잖아요.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용하는 게 음흉해요. 간사한 남자는 인기 없는데.”
“어허, 얘 좀 봐라. 누가 들으면 내가 사기꾼인줄 알겠다. 그리고 인기는 없어도 되거든? 이미 결혼했답니다.”
그러면서 나는 양팔에 있는 줄리아와 시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줄리아는 꺄악 비명을 질렀지만 내 품에서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때마침 노움이 음식을 사가지고 왔다. ‘맥스의 쉬어가는 집’에서 사온 돼지고기 스튜였다. 우리는 함께 때늦은 식사를 하고 잠들었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많이 짊어지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는 모든 게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어서 안심이었다.
오리엔 왕실과의 동맹도 전망이 밝고, 혼트 제국은 유목민족에 의한 동란으로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제이슨 란즈헬과 접촉하고 대화를 나눠본 결과 란즈헬 백작가와의 관계 개선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바로 볼프강 란즈헬 백작.
죽는 날만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자신의 심복 에반 테일러를 시켜서 유목민족의 독립을 촉발시키는 등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인다.
아마도 죽기 전에 큰 전과를 하나 더 세워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모양인데, 문제는 그의 심계가 단지 카르스 황제만을 겨냥한 것이냐다. 어쩌면 또 다른 정적인 레던 왕실을 노린 정략을 구상했을지도 모른다.
으음, 만약 그렇다면 틀림없이 나를 타깃으로 삼았을 텐데. 카르스 황제와 함께 볼프강 란즈헬 백작에게 한 방 먹인 인물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바덴 강 협상 건의 복수로 나에게 쓴맛을 보여줄 심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나?”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암살 같은 시도를 해온다면야 차라리 환영이다. 상급 정령사가 된 나에게 그런 것쯤은 하나도 무섭지 않다. 왕실에는 듀론 후작과 제론, 루이가 에릭 국왕을 보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쪽도 딱히 문제는 없을 터였다.
볼프강 란즈헬 백작…….
이제 그만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인생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
삶을 투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독니를 감출 줄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란즈헬 백작도 그런 부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