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회: 8권 - 3장. 쿤트 영지의 유목민족 -->
후디니 자작가가 가진 식량과 오리엔 왕실이 투자 실패로 쌓아놓고 있는 식량을 혼트 제국에 팔아치우면, 나는 중간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다.
뭐, 사실 이제 와서 이익 같은 건 크게 상관이 없다. 지금도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후디니 자작가와 오리엔 왕실에도 그 이익을 나눠줌으로서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 주군. 그런데 유목민족들의 처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민 끝에 말했다.
“글쎄? 내 영지로 데려가야 마땅하지만, 알다시피 내 영지는 온통 숲 지대라서 말을 탈 수가 없거든.”
말을 탈 수 없고 기를 수도 없는 유목민족이라니. 그건 그냥 난민이잖아?
내 조그만 영지의 인구수를 좀 늘리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2백여 명의 식충이를 데려갈 마음은 없다.
게다가 레던 왕국 사람과 혼트 제국의 유목민족은 민족도 문화도 달라서 융합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한데 모아놓기보다는 따로 구분해서 거주 지역을 정해주는 편이 좋다.
“아무래도 이곳 쿤트 영지의 서부 황야지대에서 계속 주거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아서 형님께 허락을 받아야겠어. 뭐,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걱정하지 마.”
“알겠습니다.”
유란, 패트릭과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아서 형님과 만나 상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곧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모여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아버지, 아서 형님, 레이라, 엘레네, 그리고 나와 줄리아, 시스까지. 릭 형님을 제외한 쿤트 일족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왕실에 다녀간 일은 어떻게 됐느냐?”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레던 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내가 리간드 자작이 된 사실을 알자 다들 놀라면서도 감탄을 했다.
“카록 네가 한 가문의 수장이 되었구나. 더 이상 쿤트가 아니게 되어서 섭섭한 마음도 들긴 하지만, 축하할 일이다.”
아서 형님이 축하의 말을 건네주었다.
“에이 형님도 참. 이제 다른 가문 사람이니 남남 취급하는 건 아니죠? 전 언제까지고 쿤트 가문의 귀염둥이 막둥이가 될 거라고요. 아직 가문의 신세를 져야 할 일이 산더미 같거든요.”
아서 형님은 그런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내를 둘이나 책임져야 할 녀석이 언행하고는……. 맹세컨대 너는 열두 살 이후로 귀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보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댁보다 훨씬 늙은이 같은 언행을 구사할 수 있거든?
아서 형님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가장 최근에 네가 나에게 신세 지게 된 문제를 논해보자꾸나.”
유목민족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하하. 그 유목민족들 말인데요, 그냥 쿤트 영지에서 살게 하면 안 될까요, 형님?”
“뭐라고?”
아서 형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일단 쿤트 성에서 떨어진 곳에 주거하도록 임시조치를 취했다만, 영지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목민족 무리가 영지에 있다는 게 얼마나 불안감을 조성하는지 모르느냐?”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민족이니까요. 말하자면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님.”
“그렇지.”
“하지만 유목민족의 아낙네들이 매일 같이 아이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와 시장에서 식료품을 사간다면 어떨까요? 며칠간은 이질감과 불안이 섞인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겠죠. 하지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그들 역시 그냥 사람이고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요.”
“으음…….”
“유목민족의 거주지에 드나드는 상인이 하나둘 생길 겁니다. 인구 2백여 명이 있는 엄연한 마을이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와 더불어 그들 역시 쿤트 가문에 세금을 납부할 겁니다. 뭐, 그들이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는 생활비 전액을 제가 지원하니 염려 마세요.”
그때, 아버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어째서 유목민족들을 데려온 게냐? 그리고 네 영지로 데려가도 되는데 왜 굳이 이곳에서 정착시키려고 하는 것이냐?”
“전 유목민족의 유민을 흡수해서 대륙 최강의 기병대를 조직하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제 영지는 온통 숲이라서 기병을 기를 수가 없거든요.”
내 말에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카르스 황제와의 대립으로 유민이 된 유목민족으로 기병대를 만들겠다고? 과연, 정말 멋진 계획이구나.”
아서 형님의 칭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사실은 거기까지 기대하지 못했는데 패트릭이 혼트 제국에서 잘 해줬어요.”
“과연 그렇군. 확실히 유목민족을 기병으로 쓰면 그 파워가 막강하겠지! 그래서 카르스 황제가 유목민족을 황실의 휘하로 통합시키려는 것이고. 거기에 너도 슬쩍 숟가락을 얹어보겠단 생각이구나. 과연 카록 너답다.”
아버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약삭빠름을 칭찬하였다. 음, 분명 칭찬이겠지?
아서 형님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유목민족 수백 명 정도야 영지 내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네가 더 이상 쿤트 가문의 일원이 아니며, 엄연한 리간드 자작가의 가주라는 사실이지. 지금이야 너와 나는 형제 사이인데 기꺼이 받아주고말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쿤트 자작가의 영지 내에 존재하는 리간드 자작가의 군대라는 게 상당히 거슬리게 느껴질 것 같지 않으냐?”
아서 형님의 말은 옳았다.
지금이야 나와 아서 형님이 우애 좋은 형제지간이지만, 나와 아서 형님이 죽고 나면 이 유목민족은 그저 쿤트 영지에 존재하는 다른 영지의 무력집단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갈등의 원인이 될 여지가 있었다.
“기간을 40년, 아니 30년까지로 제한하면 어떨까요?”
“30년?”
“예, 형님. 그 뒤에는 제가 유목민족의 거취를 처리하겠습니다. 뭐, 앞으로 출세할 몸인데 설마 30년 안에 유목민족들이 살 만한 평원지역 하나 못 얻겠습니까?”
“이 녀석, 꽤나 자신만만하구나.”
“에헴, 이래봬도 차기 재상감이라 불리는 몸입니다, 형님.”
“뭐, 그럼 그렇게 하자. 네가 앞으로 30년이나 살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아주 악담을 하시죠? 전 90살까지 살 거라고요.”
전생대로라면 말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혼트 제국의 미치광이 황제와 마주칠 때마다 수명이 뭉텅뭉텅 깎여나가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괜찮아.
이번에는 빨리 은퇴해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거거든. 제대로 된 가정을 꾸렸으니 전생 때처럼 가족 문제로 마음고생을 할 염려는 없어. 어쩌면 이번에는 백 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아이,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시고 다른 얘기를 해봐요.”
엘레네를 안고 있던 레이라가 끼어들었다.
뭐, 충분히 협의가 됐으니 정치 얘긴 이제 그만 해도 된다.
형수 레이라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카록 도련님도 이제 결혼을 하셨는데, 혹시 가족계획은 따로 있으신가요?”
“가족계획이요?”
“네. 자식은 몇 명이나 가지실 생각이죠?”
“어, 그, 그게…….”
달리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호호, 그래요? 그럼 줄리아, 네 생각은 어떠니? 자식은 몇 명이 좋겠어?”
줄리아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그러니까 전 아직……!”
줄리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허둥지둥했다.
“호호호, 그럼 시스는?”
우리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레이라는 이어서 시스에게도 물었다.
그러나 시스는 나나 줄리아처럼 당황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열 명.”
뭐, 뭣?!
“……!”
“여, 열?!”
우리는 충격에 빠졌다. 다들 경악한 얼굴로 시스를 바라보았다. 시스는 뭐가 이상하냐는 표정으로 모두를 빤히 보고 있었다.
열 명이라니? 통이 너무 크잖아!
어색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듯 아서 형님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흠흠, 그, 그래. 듣자하니 리간드 자작가가 아주 번성할 것 같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님?”
결국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그래, 이거 자칫하면 20여 년이 지나기 전에 리간드 가문이 우리 쿤트 가문을 머릿수로 능가할 지도 모르겠구나. 하하핫! 분발해라, 카록!”
“형님…… 아버님…….”
나는 울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시스, 줄리아와 한 번 진지하게 가족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