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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78화 (178/529)

<-- 178 회: 8권 - 2장. 리카도 백작과의 협상 -->

리카도 백작과의 협상은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작심하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왔다. 어서 동맹을 맺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밀어붙였다.

그럴수록 리카도 백작은 내심 좋아하며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그들이 진짜 원하는 바는 언급하지 않았다.

‘카록 쿤트, 바로 당신을 세렌스 공주 저하의 부마로 임명해서 데릴사위로 데려가고 싶소. 그것이 우리 오리엔 왕실의 조건이오.’

일단은 동맹 협상을 순조롭게 진행시켜놓은 후, 최후의 순간에 이 결정타를 꺼내겠다는 심산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 속내를 빤히 짐작했다.

그래서 일부러 적극적으로 협상을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맹은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군요’ 같은 딴소리를 못하도록 최대한 동맹 논의를 진전시킬 생각이었다. ‘아니, 지금껏 협의해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이십니까? 설마 애초부터 절 데려가는 게 목표였던 겁니까?’라고 쏘아붙여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양국이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서로가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신의 있는 우방임을 증명해야 하오. 그리고 때로는 그 증표가 사람이 되기도 하오.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소?”

리카도 백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모로 보낼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그리고 신의의 증거가 결혼이라는 경사로운 일이라면 더더욱 좋지 않겠소?”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나는 웃으며 맞장구쳤다.

리카도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국의 국왕 폐하께서는 세렌스 공주 저하를 동맹의 신의를 증명할 결혼식의 신부로 생각하고 계시오. 그리고 신랑은 바로 당신이오.”

“저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렇소. 그대를 세렌스 공주 저하의 부마이자 오리엔 왕실의 데릴사위로 데려가고 싶소. 양국의 굳건한 동맹을 위해서는 그 조건이 이행되어야 한다고 폐하께서는 말씀하셨소.”

나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야 정말 과분하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이거야 원 곤란하게 되었군요.”

“무슨 말씀이시오? 설마, 국가중대사를 위한 일인데 싫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지. 아니면 세렌스 공주 저하께서 그대의 반려로 부족하다는 말씀이시오? 공주 저하께서는 본국에서도 아름답고 슬기롭기로 비교할 여성이 없는 분이시오.”

“그야 물론 저로서는 과분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더욱 곤란합니다.”

“무슨 뜻이오?”

“그런 고귀하신 분을 감히 제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뭐, 뭐요? 지금 세, 세 번째라고……?”

“아니, 모르셨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두 명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리간드 자작으로 임명될 때 국왕 폐하께서 몸소 선언해주시기도 했지요. 본국 왕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째서 리카도 백작님께서는…….”

“그, 그런!”

리카도 백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비로소 자신이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좀 더 안목을 높여보시죠. 세렌스 공주 저하처럼 기품 있고 고귀한 분의 신랑감으로 어찌 저 같은 일개 가문의 서자를 지명하십니까? 이번 혼사에 어울리는 분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 그게 누구란 말이오?”

리카도 백작은 별로 궁금해 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속았음을 깨닫자 동맹 협의를 진행할 의욕을 잃은 모양이었다.

흐응, 그래?

그럼 내가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지.

“누구긴요. 영광된 레던 왕실의 주인, 이 나라의 명예로운 통치자이신 에릭 레던 국왕 폐하이시지요.”

“뭐요?!”

리카도 백작은 기겁을 했다.

“현명하기로는 이미 바덴 강 통행세 협상 타결에 성공함으로서 증명되었고, 용맹하기로는 오러 엑스퍼트 중급에 이르는 그분의 검술 실력이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잘생기고 젊고 활력이 넘치시는 나이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곁에 여인이라고는 아직 왕비 전하 한 분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신 적이 없으니, 그분의 고결함을 논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은 없겠지요.”

아아, 흥이 나니까 말이 아주 청산유수로 나오네.

내 말에 리카도 백작은 당황했다. 정말로 에릭 국왕은 세렌스 공주의 결혼상대로 부족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혼인을 한 몸이지만 귀족도 아니고 한 나라의 군주인데 그 점이 흠이 될 리 없었다. 오히려 왕비가 하나뿐인 게 더 이상한 거였다. 왕은 정치적인 이유로 타협과 포섭의 수단으로 혼인을 곧잘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에릭 국왕도 누구 못잖게 완벽한 양반이다.

젊지, 잘생겼지, 검술 실력도 뛰어나지, 국왕이지, 인품도 좋지, 왕비는 레던 왕국 최고의 미녀지…….

장점을 꼽자면 질투가 나다못해 재수가 없을 정도.

“하지만 우리 오리엔 왕국의 폐하께서는 데릴사위를 원하시는지라…….”

“아니, 설마 에릭 레던 국왕 폐하를 데릴사위로 데려가겠단 말씀은 아니실 테고, 설마하니 우리 레던 왕국의 왕비가 된다는 것을 하찮게 여기시는 것입니까?”

내가 화를 내려 하자 리카도 백작이 허둥지둥 손사레를 쳤다.

“그, 그것이 아닙니다. 다만…….”

“다만?”

“흠흠! 다만 저는 그저 폐하의 뜻을 전달하러 온 입장이라, 그대를 데릴사위로 데려오지 못하는 이상에는 이번 혼사 문제에 대하여 더는 언급을 할 수 없소. 그러니 이번 논의는 후일로 더 미루는 편이…….”

“그렇군요. 오리엔 국왕 폐하의 판단이 필요한 문제라면, 이번에는 본국이 귀국에 사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동맹의 조건이 대부분 협의가 된 마당에 어물거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아니, 아직 다 협의가 된 것은…….”

“하하핫. 모처럼 양국의 뜻이 맞아서 동맹이 거의 다 성사되었는데 기세를 타서 단번에 해결해야지요.”

나는 동맹 채결을 목전에 두었다는 듯이 떠들어댔고, 그럴 때마다 리카도 백작은 당혹스러워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게 첫 번째 협상이 종료되고 리카도 백작이 달아나듯이 오리엔 왕국으로 떠나고 난 후, 나는 에릭 국왕을 접견해서 협상 경과를 보고했다.

“하하핫! 역시 그랬군. 과연 리간드 자작답구나.”

“짓궂게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리간드 자작답습니다, 폐하.”

듀론 후작도 웃으며 장난스럽게 맞장구친다. 이 사람들이 날 뭐로 보는 거야? 나다운 게 뭔데?!

에릭 국왕은 날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럼 오리엔 왕실로 사자를 보내야겠는데, 역시 적임자는 자네밖에 없군. 이번 일은 자네가 성사시켜야 하니까. 이거, 신혼인데 자꾸 먼 길을 보내서 미안하구나.”

알긴 아냐? 내가 얼마나 집에서 마누라들이랑 알콩달콩 놀고 싶은지 알아?

……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폐하.”

“출발 시기는 언제쯤이 좋을 것 같은가?”

“일단은 쿤트 영지로 돌아가 상황을 본 다음에 2개월 이내로 출발하겠습니다.”

지금쯤 혼트 제국에 보냈던 전 유란 상단 일행이 돌아올 시기였다. 제대로 혼트 제국 쪽에 판로를 개척했는지 확인해봐야 했다. 더불어 혼트 제국의 유목민족과 황실의 갈등 국면이 어떤지도 디테일하게 들어봐야 오리엔 왕실과 협상할 때 도움이 될 듯싶었다.

“그리하라. 오리엔 왕실로 출발하거든 짐에게도 소식을 전하도록.”

“물론입니다, 폐하.”

에릭 국왕은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수고 많았다. 오리엔 왕국에 가기 전까지는 돌아가 푹 쉬도록.”

“예.”

다음날, 나는 줄리아와 시스를 데리고 쿤트 영지로 출발했다.

줄리아와 시스는 왕궁을 떠나는 걸 몹시 아쉬워했다. 줄리아는 왕궁에 또 언제 와보나 하는 아쉬움이었고, 시스는 왕궁의 요리사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요리들에 대한 미련이었다.

“히잉, 왕비님이랑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라? 듀론 후작 각하가 너희들을 왕비 전하와 만나게 해준다고 했었는데 못 만났어?”

“왕자 저하께서 감기를 앓고 있어서 못 만났단 말이에요!”

“그랬어?”

현재 레던 왕국은 수년 전의 내전으로 2왕자 브란도를 비롯하여 반란에 동참한 왕족이 전부 전사하거나 사형 당했고, 현존하는 왕가의 구성원은 딱 세 명뿐이었다.

말이 필요 없는 에릭 국왕, 레던 왕국 최고의 미녀로 불리는 시에나 왕비, 그리고 지금은 네 살이 된 어린 왕자 지렌.

지렌 왕자는 에릭 국왕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시에나 왕비 또한 지렌 왕자를 끔찍이 아낀다고 했다. 아마도 지렌 왕자가 감기를 앓자 시에나 왕비는 덜컥 놀라서 몇날 며칠이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리라. 뭐, 감기쯤이야 아무리 심한 독감이라도 힐링포션 반병만 먹이면 나을 텐데 참 극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까워요! 그 유명한 시에나 왕비 전하와 친구 사이가 되면 나도 이 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

어딜 가지 않는구나, 그 허영심은.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만약 시에나 왕비와 줄리아가 친해지면 레던 왕실과 나의 연결고리가 또 하나 생기는 셈이다. 훗날 내가 은퇴한다고 할 때, 에릭 국왕-시에나 왕비-줄리아의 루트로 날 뜯어말릴지도 모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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