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회: 8권 - 2장. 리카도 백작과의 협상 -->
국왕관저의 에릭 국왕의 집무실에는 에릭 국왕과 듀론 후작은 물론 왕실의 참모격인 제론과 루이도 보였다. 여기에 에릭 국왕의 또 다른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로열나이츠의 단장 그라함 백작과 부단장 랜달 스페이 백작도 보였다. 그들과 나까지 포함하여 총 6인이 에릭 국왕을 보좌하는 왕실파의 핵심인사였던 것이다.
으음.
이렇게 보니 상당히 빈약하다. 에릭 국왕이 거리낌 없이 마음을 터놓고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정도라는 뜻인데,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것 갖고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서 고위 관리들을 몰아내고 왕실의 행정부터 모두 장악해야 한다. 무능하거나 불손한 놈들을 모두 쳐내고 요직을 유능한 젊은 인재들로 팍팍 채워 넣어야 할 텐데.
“왔는가, 리간드 자작.”
“예, 폐하. 배려해주신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하핫, 별 말을 다 하는구나. 그대 덕에 리카도 백작이 동맹 협상을 하자고 먼저 제의해왔다. 협상은 사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그대에게 맡기고자 함인데 자신 있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했다.
“예. 그러나 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동맹보다 먼저 오리엔 왕실과 협정을 맺어야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관세 협정입니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세 협정은 양국 간의 교역을 활발하게 할 것이고, 경제적인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동맹은 굳건해질 겁니다. 이번 기회에 동맹과 함께 관세 협정까지 채결되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제론이 앞으로 나섰다.
“감히 발언을 해도 되겠는지요, 폐하.”
“허락한다.”
허락을 받은 제론은 나에게 물었다.
“오리엔 왕실은 리간드 자작님을 얻기 위해 일부러 동맹을 먼저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리간드 자작님의 혼인 사실을 결국 협상을 통해 알게 될 테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리카도 백작은 속았다는 것을 알고 발을 빼기 위해 협상 진행을 최대한 더디게 할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그렇다면 무언가 오리엔 왕실에게도 이익이 될 만한 조건을 주지 않는 이상은 동맹 채결이 쉽지 않을 텐데, 특별한 복안이 더 있으십니까?”
“있지.”
“듣고 싶습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리엔 왕실은 아마 지금쯤 곡물에 대량으로 투자했다가 크게 손해를 보는 바람에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지.”
이것은 내가 전생에 곡물 상인이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이맘때쯤이었다.
전생 시절, 지금쯤 되는 시기에 나는 곡물에 투자했다가 크게 파산을 하고 말았다. 아서 형님과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빚을 갚았다. 빚을 갚지 않으면 빚쟁이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버릴 정도로 위태롭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자책하며 시름에 잠겨 있었는데, 그때 오리엔 왕실도 곡물에 지나치게 투자했다가 곡물의 시세가 똥값이 되는 바람에 크게 낭패를 봤다는 소문을 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 그런 큰 나라의 왕실까지 손해를 볼 정도였는데 나 같은 일개 상인이 별 수 있었겠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더랬다.
“아마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서 낑낑대며 노력을 하고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럼 리간드 자작님께서 재정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제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소유한 카록 상단은 현재 혼트 제국에 진출해서 판로를 개척하고 있지. 유통망만 확보되면 오리엔 왕실이 짊어지고 있는 잉여 곡물을 내가 처분해줄 수 있다는 뜻이야.”
가뜩이나 혼트 제국 쪽은 이미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뚜렷했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면 그 동네의 곡물 가격이 크게 상승한다. 즉, 오리엔 왕실의 곡물을 팔아주면 내 상단도 덩달아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제론은 수긍을 했는지 한 걸음 물러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이가 발언 허락을 요청했다. 에릭 국왕이 허락하자 루이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발생한 오리엔 왕실이 관세 협정을 받아들일지 의문입니다. 관세 협정은 곧 양국 간의 관세를 낮추자는 것인데, 장기적으로는 이롭다고는 하나 이미 곡물 투자 실패로 재정 부담을 졌는데 당장 관세 수입까지 줄어든다면 필시 난색을 표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도 옳았다.
관세 협정은 결국 관세를 낮춰서 교역량을 활발하게 함으로서 양국의 총생산량을 증대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국경에서 관세를 거두는 것은 왕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장기적으로 보면 교역량이 활발해져서 국익을 얻겠지만, 당장 재정 수입이 더 떨어진다니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동맹 자체를 재정이 좀 여유로울 때로 미루자고 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라고 그 생각을 못한 건 아니다.
나는 루이 대신 에릭 국왕을 보며 말했다.
“폐하, 루이 콘체른의 지적이 옳습니다. 그 점을 고려해서 저는 공상(公商)제도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공상제도?”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당연하지.
이건 전생대로라면 훗날 40여 년쯤 뒤에야 등장하게 되는 정책이다.
“공상이란 왕실의 공인을 받은 상인이라는 뜻입니다. 공상 자격을 얻은 상인에게만 관세 협정의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않은 상인은 기존의 관세를 그대로 부과하는 제도입니다. 공상에게는 관세 혜택을 주는 대신 따로 왕실에 세금을 부여하는 의무를 주면 됩니다.”
내 설명에 머리가 번개처럼 잘 돌아가는 제론과 루이는 벌써부터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더 자세히 듣고 싶군.”
듀론 후작이 관심을 드러냈다.
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리엔 왕실이나 레던 왕실의 공인을 받은 공상에 한하여 협정관세의 혜택을 입게 하고, 대신 각 왕실은 자국의 공상에게 따로 공상세를 거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존의 관세가 40%라고 해보자.
그럼 레던 왕국의 상인이 오리엔 왕국에 물건을 수출하려면 국경을 건널 때 오리엔 왕실에게 40%의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관세 협정이 채결되어서 관세가 10%로 낮아지고, 더불어 공상 제도가 도입된다면?
공상 자격을 획득한 상인은 우선 국경을 넘을 때 자국 왕실에 20%의 ‘공상세’를 납부하고, 오리엔 왕국의 국경검문소에서 오리엔 왕실에게 협정관세 10%를 납부한다.
공상 자격이 없는 상인은 그냥 협정 이전의 세율인 40%의 관세를 오리엔 왕실에 납부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비록 공상세와 관세를 둘 다 내야 하지만 총 30%만 납부하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공상의 자격을 보유한 상인이 더 유리해진다. 결과적으로 기존보다 10% 세금을 덜 내는 셈인 것이다.
물론 상인과 달리 왕실의 입장에서는 관세를 덜 걷게 되어서 단기적으로는 손해이지만, 그 손해는 공상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적다.
게다가 달리 생각하면 아주 큰 이익을 볼 수도 있다.
상공업 계층을 왕실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왜냐고?
상인이 공상의 자격을 보유하려면 왕실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왕실에게 밉보인 상인은 공상 자격을 박탈당한다.
즉, 상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좋든 싫든 왕실과 동반자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공상이라는 신분이 왕실과 상인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껏 영지를 통치하는 귀족들은 상인들에게서 어떻게든 통행세를 많이 뜯어내려고 안간 힘을 써왔다. 혜택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육제후가 상인들 사이에서 ‘바덴 강의 강도들’이라 불렸던 것을 보면 알지 않은가?
그런데 왕실이 떡하니 상공업 계층에게 혜택을 주는 제로를 도입한다면?
당연히 왕실에게 마음이 기울어질 것이다.
시대 흐름은 상공업 계층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웬만한 귀족들보다도 훨씬 재산이 많은 거상들이 속속들이 출연한다. 소위 ‘부르주아’라 불리는 신흥계층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영지에서 걷는 세금에 의존해온 구시대적 봉건 귀족들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살아남는 귀족들은 이전부터 상업에 투자를 해온 일부 가문뿐이다.
그런 신흥계층을 왕실의 편으로 만들면, 분명 장기적으로 왕권은 더없이 강력해진다.
휘하의 귀족들은 더 이상 상공업 계층의 지지를 받는 왕권을 감히 넘볼 수 없게 된다.
“정말 대단하군.”
에릭 국왕은 무릎을 탁 치며 흥분했다. 내 말대로 이루어진다면 왕권의 강화는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육제후 같은 귀족들이 감히 맞서려 들지 못하는 강력한 왕권! 아마 에릭 국왕이 무엇보다도 바라는 꿈일 터였다.
“공상 제도를 도입해서 공상들로부터 공상세를 거두면 당장의 관세 수입 감소로 인한 손해도 어느 정도는 만회될 겁니다. 게다가 시대의 흐름을 왕권의 강화로 가져올 수만 있다면 그 정도쯤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왕권’은 오리엔 국왕이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폐하, 리간드 자작의 의견이 옳은 것 같습니다.”
듀론 후작도 찬성하고 나섰다.
기사들인 그라함 백작과 랜달 스페이 백작은 무슨 소린지 당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말이다.
에릭 국왕은 결정을 내렸는지 나에게 말했다.
“좋다. 동맹이든 관세협정이든 공상제도이든 모두 그대의 뜻에 맡기겠다. 리간드 자작, 오리엔 왕국과 동맹을 채결해보이도록 해라.”
“폐하의 어명을 받듭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드디어 시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