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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72화 (172/529)

<-- 172 회: 7권 - 8장. 입관, 카록 리간드 자작 -->

-응.

운디네의 모습이 안개처럼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따스한 치유의 힘이 우리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비로소 줄리아와 시스의 심장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카록 쿤트 남작 부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녀가 말했다. 안에서 에릭 국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라 하라.”

“예.”

시녀는 나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로열나이츠의 기사 둘이 궁정 회의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안으로 입장하였다.

에릭 국왕이 보였다. 그 옆자리에는 듀론 후작도 보였고, 뒤에는 호위를 선 로열나이츠의 단장 그라함 백작과 부단장 랜달 스페이 백작이 서 있었다.

양옆에는 커튼처럼 왕실의 고위 관리들이 주르륵 도열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우리가 나아갔다.

우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내가 말했다.

“쿤트 자작가의 남작 카록, 폐하의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잘 왔다, 카록 쿤트 남작. 오늘 짐은 그대의 공적을 치하하고자 이 자리에 불렀다.”

에릭 국왕은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서 자신의 보검을 뽑았다. 이 젊고, 건장한 국왕보다 더 검에 잘 어울리는 군주가 있을까?

이미 오러 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을 자랑하는 에릭 국왕의 강한 이미지는 옆 동네의 오리엔 국왕도 부러워할 정도였다.

“레던 왕국의 국왕으로서 선언한다. 그대는 바덴 강의 통행세 협상이 채결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웠기에 자작으로의 승작(陞爵)을 명한다.”

에릭 국왕은 칼등으로 내 머리와 어깨를 두들겼다.

뭐, 사실 자작이 된 건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비공개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또한 서자인 그대의 신분을 감안하여서 먼 옛날의 위대한 대정령사의 성(姓)을 본떠 ‘리간드’라는 성을 하사하겠다. 이에 따라 카록 쿤트 자작은 리간드 자작이 되고, 그의 두 아내 또한 리간드 자작 부인이 되며, 통치령인 바탄 영지는 ‘리간드 자작령’으로 명명한다.”

헐, 맙소사!

이래서 줄리아와 시스를 데려오라고 한 것이었군.

설마 하니 성을 하사 받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대정령사, 라울 리간드의 성을 말이다!

하긴, 라울 리간드는 후손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리간드라는 성을 자처하는 이들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 없었다.

다만 라울 리간드는 최상급 정령사로서 세간에 신비로운 이미지가 컸기 때문에 약간 문제시 될 수는 있지만, 나 역시 정령사! 나보다 더 리간드라는 성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나에게 리간드라는 성을 하사함으로서 얻는 의미는 컸다.

우선 라울 리간드라는 성을 이어 받은 나에 대해 신비함과 존경을 갖게 하고, 결과적으로 그런 나를 부하로 둔 레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아마도 명재상 듀론 후작의 아이디어일 것이다.

나는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지만, 사실 귀족사회에서 서자라는 신분은 많은 불평등을 감내해야 하는 신분이었다. 이를 테면 귀족과 평민의 중간 계층이라고도 볼 수 있었고, 흔히 몰락 귀족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서자 출신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로서 쿤트 가문의 서자에서 리간드 가문의 가주로써 신분이 상승된 셈이었다.

“리간드라니…….”

“그 대정령사의 성을 카록 쿤트에게 하사한단 말인가?”

“하기야, 그도 정령사이니…….”

고위관리들은 에릭 국왕의 결단에 놀라 수군거렸다. 그때,

“조용.”

듀론 후작이 테이블을 탕 치며 주의를 주자, 순식간에 회의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과연 노재상의 카리스마!

에릭 국왕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다들 조급해하는군. 아직 짐의 명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보검을 검집에 꽂으며 계속 말했다.

“카록 리간드 자작.”

“예, 폐하.”

“그대를 왕실의 관리로 임명하는 바, 외교부 부상서로 임명하며 동시에 재상 보좌 직책을 겸한다. 이에 따르는가.”

고위 관리들은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부르르 떨었다. 마침내 내가 왕실에 입관하게 되었으니,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한 것이리라.

내가 대답했다.

“예, 폐하. 충성을 다 하겠나이다.”

일단 약속을 했으니 왕실의 고위 관리가 된 건 좋은데, 두 직책을 겸직하게 되다니! 얼마나 날 골고루 부려먹으려고 그러는 거냐?!

“마지막으로 라울 리간드 자작에게 한 가지 과제를 내리겠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에릭 국왕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1년 안에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을 채결케 하라. 할 수 있겠느냐?”

“……!”

“……?!”

고위 관리들은 또다시 놀랐다.

이미 바덴 강 통행세 협상도 크나큰 공적이었다. 그런데 또 1년 안에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이라니.

내가 이것마저 해결해버리면, 그 공적과 왕실 내의 입지는 거대해지는 것이었다.

으음, 어차피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은 내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1년 안이라……. 이거 가능할까?

오리엔 왕실의 입장에서는 날 데릴사위로 데려오지 못하는 이상, 굳이 동맹을 서두를 필요를 못 느낄 것이다.

결국 우리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쪽이 먼저 하자고 나서면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그만큼 많은 대가를 주어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계산을 해보았다.

……한 번 해볼까?

내 계산에 따르면,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숙고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하겠나이다.”

“좋다! 짐은 그대의 활약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의심 좀 해라.

날 너무 믿지 말란 말이야. 부담스러워!

*   *   *

아아. 정말 충격적인 왕실 정계로의 데뷔였다.

자작으로서 공식화된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전설의 대정령사 라울 리간드의 성을 하사 받았고, 왕실에 입관하여 ‘외교부 부상서’와 ‘재상 보좌’ 두 직책을 겸하게 되었다. 둘 다 2급 관리 이상의 고위직인데, 그걸 혼자서 독점한 것이다.

게다가 화룡정점은 1년 이내에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을 채결하라는 과제!

이런 충격적인 요소를 연속으로 배치하여서 나의 존재감을 강하게 인식시킨 것은 노련한 정치가인 듀론 후작의 연출이었을 게 분명했다.

궁정 회의가 끝나고 나는 줄리아와 시스를 먼저 숙소로 돌아가 쉬게 했다.

그리고 에릭 국왕 일행을 찾아갔다.

“어서 와라, 리간드 자작. 이제야 비로소 어엿한 나의 사람이 되었군.”

“원래부터 폐하의 충성스런 가신이었습니다.”

“하하하. 뻔한 소리는 말아라. 그대가 마침내 왕실에 입관해주어서 짐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이번 연출은 재상 각하의 생각이셨겠지요?”

내 물음에 듀론 후작이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리간드라는 성을 하사하는 건 내 생각이 맞네. 하지만 난 자네를 그저 재상 보좌로만 임명하자고 제안했었는데, 다른 사람이 겸직과 과제라는 아이디어를 냈지.”

“그게 누구……?”

나는 의아해하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듀론 후작과 함께 있는 루이를 바라보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생각이었습니다.”

루이 콘체른.

전생 때 레던 왕국령의 총독이었던 그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한 모양이었다.

루이가 설명했다.

“이번 일은 폐하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내 존재감을 각인시켜서 고위 관리들을 압박하는 것?”

내 물음에 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한 사람을 타깃으로 하였습니다.”

“누구?”

“외교부상서 비제 자작입니다.”

“아!”

그제야 나는 루이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교부상서 비제 자작은 전형적인 부패한 고위 관리로 육제후와 연줄이 닿은 인물이기도 했다.

날 외교부 부상서로 임명함으로서 비제 자작에게 심적인 압박을 가할 셈인 듯했다.

가뜩이나 현재 육제후는 란즈헬 백작이 투병중이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 육제후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비제 자작은 그렇지 않아도 여러모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을 터였다.

루이가 말했다.

“지난번 바덴 강 협상 때, 비제 자작은 외교부상서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폐하와 리간드 자작께서 모두 처리해버려서 끼어들 틈도 없었겠지요.”

그렇지.

그땐 믿을 만한 왕실 고위 관리가 없어서 우리끼리 해야 했다.

“거기에 바덴 강 협상을 주도하셔서 지대한 공을 세우신 리간드 자작님이 부상서라는 직책으로 외교부에 침투했으니, 비제 자작에게 강한 압박을 가한 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타로 리간드 자작님께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을 추진하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비제 자작에게 끼어들 틈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루이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에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 채결에 성공하실 경우, 비제 자작을 좌천시키고 리간드 자작님을 외교부 상서로 승진시킬 수 있는 명분이 서게 됩니다. 아마 그 전에 충분한 압박감에 시달린 비제 자작이 먼저 물러날 겁니다. 결과적으로 외교부는 폐하의 통제 하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루이 콘체른!

전생 때 총독으로 군림하는 동안 레던 왕국의 귀족들을 가차 없이 숙청시켰던 권력투쟁의 달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어떠냐. 실로 훌륭한 계책이 아니냐.”

에릭 국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역시 콘체른을 천거하실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루이의 속내는 또 있을 것이다.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을 내가 성사시키면, 난 아마 백작으로 승작할 것이다.

듀론 후작이 날 차기 재상으로 만들기 위해, 재상의 최소 요건인 백작으로 올려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루이는 이미 바덴 강 협상 때 날 따르겠다고 약속한 상황이기 때문에, 날 최대한 빨리 왕실 내의 1인자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재상 직에 올라 에릭 국왕 진영의 1인자가 되면, 루이는 재빨리 2인자의 포지션을 확보할 것이다.

사실 제론 데커드도 있긴 하지만, 그 녀석은 야망은커녕 만성적인 귀찮음으로 가득한 녀석이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뭐, 내 밑에 저렇게 의욕 충만한 녀석이 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나 다음의 2인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할 테고, 기회를 봐서 내 자리를 넘기고 일찌감치 은퇴할 수 있으니까.

듀론 후작이 은퇴를 위하여 날 차기 재상으로 키우고 있다면, 난 조기은퇴를 위해서 루이를 키운다고나 할까? 아하하.

“그건 그렇고, 리간드 자작.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을 성사시킬 자신은 있느냐?”

에릭 국왕이 물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리진 못합니다만, 일단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예. 우선 현재 시점에서 오리엔 왕실은 아직 제가 결혼을 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동맹을 제안하기 위하여 사자를 이쪽으로 파견했을 겁니다. 절 데릴사위로 데려가기 위해 급히 움직일 테니까요.”

“그럴 걸세. 시기적으로 빠르게 움직였을 경우, 벌써 오리엔 왕실의 사자가 국경을 통과했을 걸세.”

듀론 후작이 끼어들어 한 마디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기회가 생깁니다.”

“호오?”

에릭 국왕은 뭔가 알 것 같다는 듯이 흥미를 보였다.

난 계속 설명했다.

“오리엔 왕실의 사신이 제 결혼 사실을 도중에 정보를 입수하여 눈치 챘을 경우, 다시 되돌아가버리면 일은 실패입니다.”

그땐 동맹을 성사시키는데 우리가 먼저 제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협상 테이블에서 이런 일은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는 법.

“하지만 반대로 오리엔 왕실의 사자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대로 폐하를 배알하여 동맹을 제안한다면, 우리는 그 탄력을 받아서 동맹을 강력하게 추진하면 됩니다.”

“하하핫, 과연! 오리엔 왕실은 그대를 얻지 못하게 되었지만, 일단 먼저 동맹을 하자고 이야기를 꺼냈으니 싫다고 딴 소리를 하진 못하겠구나!”

“바로 그겁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듀론 후작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리엔 왕실의 사자가 도중에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사람을 붙여두어야겠군. 폐하, 사람을 파견해서 오리엔 왕실의 사자를 맞이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다! 랜달 스페이 백작과 로열나이츠 10명을 국경 쪽으로 보내겠다. 오리엔 왕실이 보낸 사자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내어서 이곳으로 데려오도록 말이다.”

그러나 내가 에릭 국왕을 만류했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대가?”

“예. 제가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오리엔 왕실의 사신을 쉽게 발견 가능합니다.”

난 하늘을 날아다니기 때문에 당연히 이 대륙의 누구보다도 빠르다.

“그럼 그리하라. 이 일은 리간드 자작 그대에게 맡기겠다.”

“예!”

난 즉시 움직이기로 했다.

이번 일은 빠를수록 승률이 높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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