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회: 7권 - 7장. 가정을 이루다 -->
저택으로 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기쁠 수가!
여러분, 나 결혼한답니다! 이번엔 젊은 치기에 그냥 혹해서 결혼해버린 게 아니라고요.
“랄랄라, 즐거운 인생.”
휘파람을 불며 나는 저택으로 달렸다.
노움을 시켜서 뭔가 탈것을 만들어 날아가도 되지만, 왠지 기운이 넘쳤기 때문에 그냥 두 다리로 달리기로 했다. 몸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거든!
이 사실을 아버지와 아서 형님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마침 릭 형님도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었으니 결혼을 발표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오셨습니까, 카록 남작님.”
저택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인사를 했다.
“아하하, 응! 다들 수고가 많네! 모두들 축복이 있기를! 운디네.”
-응, 아빠.
나는 운디네를 불러서 병사들에게 치유를 걸어주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는 사람마다 치유의 힘을 나눠주었다.
하인들도 그런 날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덕분에 피로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기분 좋은 표정들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엘레네를 품에 안은 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오, 이 자는 모습 좀 보아라.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다니. 이게 정말 지상의 생물이 맞단 말이냐. 틀림없이 인간이 아니라 엘프일 것이다.”
아주 놀고 있네.
좋아서 흐물흐물 녹네, 녹아.
한편 그 모습을 릭 형님이 분하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크윽! 왜 내가 안으면 우는 거야.”
“녀석아. 그야 네가 연회 때 엘레네를 번쩍 들고, 시끄럽게 포효를 했잖느냐. 게다가 다 큰 사람도 널 싫어하는데, 어느 아기가 널 좋아하겠느냐.”
아서 형님의 핀잔에 릭 형님은 무척 상처 받은 얼굴이 되었다.
“혀, 형님! 은근슬쩍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연회 때 나에게 준 창피를 생각해보아라. 집안 망신은 네가 다 시키지 않았느냐.”
“아, 형님도 참. 막말로 창피한 짓을 한 건 저이지, 아서 형님이 아니잖습니까. 뭘 그렇게 체면에 신경 쓰고 사십니까, 번거롭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마땅한 법도가 있는 법이다.”
“으하핫! 아서 형님은 참, 여전히 꽉 막혔다니까.”
아서 형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리석은 릭 형님. 아서 형님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릴 하다니.
“아무래도 너처럼 예의 없는 녀석은 우리 엘레네에게 접근시켜서는 안 되겠구나. 불손함이 옮을라.”
“혀, 형님?! 그게 뭡니까? 이건 제 성격일 뿐입니다. 옮지 않아요! 흑혈병이 아니라고요.”
“시끄럽다.”
“치사하다! 조카딸을 인질로 날 협박하다니?”
“무슨 헛소리냐. 네 조카딸이든 뭐든, 일단 내 딸인데.”
“크아악.”
“흐아앙.”
어이쿠.
릭 형님이 너무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엘레네가 잠에서 깨버렸다.
마구 울음을 터뜨리는 엘레네를 달래면서 아버지가 화를 냈다.
“이 멍청한 녀석! 모처럼 내 품에서 잠들었던 엘레네가 깨지 않았느냐. 엘레네, 엘레네. 뚝 그치려무나. 이 할애비가 여기 있어요.”
“흐앙!”
“아버님, 그냥 이리 주세요.”
레이라가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버지는 결국 눈물을 머금곤 엘레네를 레이라에게 건넬 수밖에 없었다.
“엘레네를 안으려고 검술 수련도 빼먹었거늘…….”
빼먹지 마! 이 인간아!
댁은 오러 마스터가 되어야 한단 말이야!
전생과 달라져서 이번 생에서는 아버지가 오러 마스터가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던 나였다.
그런데 엘레네가 태어나더니 저 양반이 손녀딸 팔불출이 되어서 슬슬 걱정된다. 전생 때 같은 투철한 투지가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란 말이야.
릭 형님도 아버지를 억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저런 바보 같은 아버지한테 지다니…….”
그러자 아버지가 릭 형님에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무인이 알아야 할 정신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죽음’ 그리고 ‘사랑’이다.”
“엥?”
“너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선 칼날 위의 싸움을 모른다. 또한 너는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지켜야 할 것을 위하여 물러섬 없이 싸우는 마음가짐을 모른다. 그러고도 날 이기겠다고?”
“크윽……!”
릭 형님은 분한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피식피식 비웃음을 날리며, 그런 릭 형님을 약 올렸다.
“훗, 엄마 쭈쭈나 더 먹고 오려무나.”
“으으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한 판 더 붙읍시다, 아버님!”
“싫다. 난 명예를 아는 기사이니, 약자를 괴롭히지 않겠다.”
“크아악! 약자라고요?!”
릭 형님은 분해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아버지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저 바보 부자 같으니…….
엘레네는 레이라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았다.
슬슬 내가 등장한 시간이군.
“엘레네가 앙앙 울 땐 언제나 달려오는 막둥이 삼촌 카록 등장.”
나는 신나게 외치며 달려갔다.
좋아, 예술적인 타이밍이다. 다들 놀라서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걸 봐라.
그대로 레이라가 안고 있는 엘레네에게 다가갔다. 엘레네가 날 보더니 울음을 뚝 그쳤다.
“어이쿠, 우리 예쁜 엘레네. 오빠한테 올래.”
“꺄아.”
엘레네가 날 보며 방긋 웃었다. 나에게서 정령친화력에 의한 친밀감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난 엘레네를 받아들고, 번쩍 들었다. 빙빙 돌린 뒤에 와락 품에 안았다. 엘레네는 자지러져라 웃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아버지와 릭 형님이 부러움과 패배감이 반씩 섞인 복잡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뭘 봐, 패배자들. 으하하.
“엘레네는 할아버지도 둘째 삼촌도 싫어, 싫어. 카록 막내 삼촌이 제일 좋아, 그치?”
“꺄아!”
“어휴, 우리 예쁜 것.”
“꺄아아.”
아버지와 릭 형님은 정답게 웃고 있는 나와 엘레네를 보며 부르르 떨었다.
레이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휴우, 정말 카록 도련님은 어쩜 그렇게 엘레네를 잘 돌보는지.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평소에도 정령들하고 이렇게 놀거든요. 우리 엘레네, 예뻐, 예뻐.”
“꺄아.”
엘레네와 놀아주면서 나는 문득 내뱉었다.
“아참, 그리고 나 결혼해요.”
“뭐라고?”
“뭐?”
“결혼?!”
아버지와 두 형님이 기겁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결혼할 나이가 됐잖아요. 아참, 아내는 두 명이에요. 합동으로 결혼식을 해버릴까 생각 중이에요.”
“잠깐, 잠깐! 뭐가 그렇게 진행이 빠른 거냐? 차근차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봐라.”
아서 형님이 말했다.
나는 엘레네를 품에 안은 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물론 오리엔 왕국이 날 노리고 있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아서 형님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세렌스 공주는 아주 친근하게 우리에게 접근했다. 심지어는 엘레네도 그녀를 아주 좋아했고.”
“아, 그건 당연한 거예요. 세렌스 공주도 정령친화력을 약간 가지고 있거든요. 말씀드렸었죠? 정령친화력을 가진 사람끼리는 친밀감을 느낀다고.”
“그게 정말이냐?”
내 말에 다들 또 깜짝 놀란다.
“왜 나에겐 그게 없는 것이지!”
아버지는 분하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쥔다. 쯧쯧. 그럼 댁이 기사지 정령사유?
“그러니까 오리엔 왕실의 데릴사위로 끌려가기 전에 결혼을 해버린다 이거지? 그것도 한 번에 두 여자랑. 이야, 카록 너도 참 인생 재미있게 산다.”
릭 형님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재미있냐?!
아무튼 다들 나의 결혼을 찬성하는 눈치였다.
“뭐, 줄리아 로렌은 좋은 여자였지. 성격도……. 음, 아무튼 간에 똑 부러지는 여자더구나. 성격이 헐렁한 너를 잘 돌봐줄 거다. 그리고 시스는…… 뭐, 시스지. 아무튼 축하한다.”
아서 형님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축하해주었다.
“녀석, 드디어 결심했구나. 잘 생각했다. 결혼식은 되도록 빨리 하는 게 좋겠다.”
아버지도 날 축하해준다.
“축하해요, 도련님.”
레이라까지.
“에에? 그럼 또 손님들 잔뜩 불러다가 결혼식 올리고, 연회 여는 건가? 그건 좀 그렇지 않나?”
릭 형님은 축하 대신 불쑥 딴죽을 걸었다.
“뭐가요?”
내 물음에 릭 형님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축하는 한데 말이야. 이제 막 엘레네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또 네 결혼식 축하 연회를 열어봐라. 사람들이 우리 쿤트 가문이 참 극성맞은 집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냐?”
“아…….”
확실히 그건 그랬다.
우린 육제후처럼 돈만 많은 문벌귀족이 아니라, 정통 있는 기사 가문이었다. 그런 성대한 연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근데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손님을 잔뜩 초대해서 연회를 연다니, 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럼 기다렸다가 내년 봄에 결혼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
아서 형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 전에 오리엔 왕국이 선수 치면 큰일이라고요.”
그러자 아버지가 의견을 말했다.
“네가 그리 화려한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데, 그냥 우리끼리 조용히 치르는 건 어떠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러고는 싶지만, 확실하게 공인된 자리에서 결혼을 올리지 않으면 오리엔 왕국을 납득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혼담을 거절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요.”
아서 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즉, 오리엔 왕국에까지 알려져서 혼담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공개적인 결혼식을 열자는 뜻이군.”
“네.”
그때, 가만히 듣던 레이라가 제안했다.
“그럼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고, 다만 그 자리에 증인이 되어줄 사람만 몇 명 초대하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