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회: 7권 - 5장. 청혼 -->
‘정말, 단주님 말대로 시스는 어떡하지?’
만약 자신이 카록과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특이한 정신세계를 가진 시스라 해도 분명히 부담감을 느낄 것이다.
때마침 4서클 마법에 대한 실마리까지 얻었으니, 마법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마법길드로 떠나버릴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그런 건 싫은데.’
생각만으로도 가여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저 아이가 혼자서 어떻게 산단 말인가. 돈 쓸 줄도 몰라서 700레디나를 1년 치 식비로 쏟아 부을 정도로 바보 아닌가.
그 덕에 줄리아가 운영했었던 고급 레스토랑이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만.
아무튼 카록을 만나서 등용되어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시스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시스도 카록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줄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록이 그녀를 귀여워할 때마다 무진장 질투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결국 먼저 프러포즈를 한 것은 줄리아 자신이었다.
시스 덕분에 오늘날의 자신이 있었는데, 자신 때문에 시스가 떠나게 되는 것은 싫었다.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고, 또한 이미 가장 친한 친구가 된 시스를 잃고 싶지도 않았다. 비록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관계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좋지…….’
그런데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창문을 두들겼다.
“응.”
대체 누가 2층 창문을 두들기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런데 창문에 얼굴을 쏙 내비친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전신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동글동글한 뺨이 귀여운 노움이었다.
“왔구나.”
놀란 줄리아는 재빨리 창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쏙 들어온 노움은 줄리아에게 말했다.
-시스도 데려오랬어.
“응? 아, 알았어.”
줄리아는 옆방의 수련장에서 마법을 연마하는 시스를 불렀다.
평소에 마법을 연마하는 중에는 먹을 것으로 유혹을 해도 눈길 한 번 안 줄 정도로 집중하는 시스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카록이 불렀다고 하자 순순히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자, 여기 타.
노움은 흙으로 2인승 의자를 만들었다.
“잠깐, 어딜 가는 거야.”
-하늘.
“하늘?.”
놀란 줄리아에게 노움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어서 타. 빨리 데려오랬어.
“그, 그래.”
줄리아와 시스는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2인승 의자가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창문이 너무 작아서 통과되지가 않았다.
노움은 크게 당황했다.
-어? 잠깐 내려 봐.
줄리아와 시스가 내리자 노움은 의자를 없애버리고, 창밖에서 다시 2인승 의자를 만들었다.
-이제 타.
“얘도 실수를 할 때가 있구나.”
줄리아는 창밖에 둥실 떠 있는 의자에 힘들게 올라타야 했다. 시스도 올라타자, 비로소 노움은 하늘을 향해 출발시켰다.
얼마나 하늘을 날았을까.
“저, 저게 뭐야?.”
“……섬.”
줄리아는 경악을 했다. 시스도 표정은 뚱했지만, 눈동자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늘에 작은 섬이 둥실 떠 있었다.
크기는 직경 10미터쯤 되는 작은 섬이었지만, 아무튼 저런 거대한 땅덩어리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저, 저거 단주님이 한 거야?”
-응.
“……정령친화력, 대량 낭비…….”
시스의 중얼거림에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힘들어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 데려오랬어.
“하하하…….”
하여튼 터무니없는 짓만 하는 단주였다.
* * *
이제 슬슬 오는군. 피곤해 죽겠으니까 빨리 좀 데려와라. 후딱 해치우고 쉬게.
10미터짜리 작은 섬.
하늘에 둥실 떠 있는 아무도 오지 못하는 섬이라니. 이 얼마나 로맨틱하냐. 이 정도면 괜찮잖아?
섬의 한가운데에는 운디네를 시켜서 만든 작은 샘이 있었고, 심지어는 활엽수가 세 그루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가 심어진 땅을 통째로 들어내어서 하늘에 띄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다음날이면 직경 10미터짜리 큰 구덩이를 발견한 영지민들이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다. 이거 끝나면 다시 원래대로 해놔야지.
노움과 샐러맨더가 합작해서 만든 흙으로 구워 만든 아담한 집까지 한 채 있다. 이 얼마나 멋지냐.
근데 멋진 건 둘째 치고 정령친화력이 쭉쭉 빠져나가서 정신적인 피로가 밀려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린델 백작령으로 다녀온 뒤였기 때문에 남아 있는 정령친화력도 별로 없었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대략 세 시간 정도. 빨리 해치워(?)버리고 자자.
마침내 노움이 두 사람을 데려왔다.
“와앗! 여기 너무 멋져요! 여기서 살고 싶어!”
줄리아는 잔뜩 들떠서 섬 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시스도 여기저기 홱홱 둘러보다니 샘에 얼굴을 처박고 물을 마셨다. 하하, 저러니까 꼭 야생 토끼 같다. 아, 귀여워.
아름다운 두 사람이 이 하늘의 섬으로 오자 갑자기 이곳이 동화 속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저기에 정령들까지 한쪽에서 노닥거리며 놀고 있었으니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줄리아도 그런 분위기에 취했는지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자, 이제 슬슬 시작이다.
“줄리아, 시스.”
그녀들은 흠칫하여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음, 좋은 분위기다.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나는 입을 열었다.
“실은 난 결혼이 무서웠어.”
둘 다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내 아내와 자식을 혼란이 찾아드는 시대로부터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차라리 가족을 만들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고 웅크려버린 거야.”
“그럼 지금껏 망설인 건 그것 때문이었나요?”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젠 용기를 내려고 해. 그건 자신감이라기보다는, 그 모든 불안을 감수해서라도 꼭 한 가족이 되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야.”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하진 않을게. 행복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과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하나는 약속할게. 이 세상에서 너희를 가장 사랑하겠어.”
나는 품속에서 준비한 반지 목함 두 개를 꺼내 둘에게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줘. 둘 다.”
줄리아도 시스도 멍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내밀어진 목함을 바라보았다.
“……둘 다, 인가요?”
줄리아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거절하면, 나는 깨끗이 둘 모두를 포기할 거야.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잃을 바에는 차라리 지금까지처럼 셋이 함께 지내는 편이 좋으니까.”
줄리아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뭐, 좀 뻔뻔한 건 알지만, 그게 나의 진심이다.
그리고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잖아? 귀족이 둘 이상의 아내를 갖는 것은.
“……계속 함께 할 수 있어?”
시스가 물었다.
“물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는 망설이지 않고 목함을 받아들었다. 그 안에 있는 반지를 꺼내 약지에 끼었다.
이를 본 줄리아는 한숨을 푹 쉬더니, 역시나 목함을 받아들었다.
“이럴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동시에 프러포즈라니,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니에요?”
“하하, 미안.”
“뭐, 좋아요. 단주님이 대단한 남자가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몰락 귀족 출신에 불과했던 제가 그런 단주님을 독점하는 것은 욕심이겠죠.”
목함에서 반지를 꺼내 끼우는 줄리아.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예요. 더는 용납 못해요. 아셨죠?”
“으응.”
나도 이 이상 여자를 감당할 만한 그릇은 아니라고. 전생 땐 한 여자도 감당 못했던 못난 남자이거든. 하물며 줄리아 로렌과 시스, 둘 다 나에게는 과분한 여자들이다. 이 이상 욕심 낼 이유가 없지.
그런데 그때, 시스가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응? 시스, 왜 그래?”
“……키스.”
“엑?”
“안 해?”
아, 그래. 생각해 보니 지금은 프러포즈의 순간이잖아? 사랑을 확인한 순간이니 그만한 스킨십은 당연한 건데, 깜빡 했다.
“아아, 그래. 그럼…….”
“응.”
난 시스에게 다가가 상체를 약간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그런데 막상 키스를 하려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뭘 부끄러워하는 거야, 두 여자에게 동시에 프러포즈를 한 뻔뻔한 놈이!
“아앗?! 왜 시스 먼저 하는 거예요? 내가 먼저라고요!”
줄리아가 벌컥 화를 냈다.
응? 이 상황, 왠지 친숙한데.
줄리아는 내 턱을 붙잡고는 확 끌어당겨 그대로 입맞춤을 해버렸다. 과연 황금의 여인다운 터프함이었다. 내가 환자행세 할 때 자기 입으로 직접 물을 먹여줄 정도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
그러자 이번에는 시스까지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듯이 키스를 했다.
달콤한 감촉이다. 말랑한 입술과 맞닿은 느낌이 너무나 행복하다.
아아.
정말로 난 결혼을 하게 되었구나.
맞닿은 입술을 통해 시스와 나의 맥박이 느껴진다. 정말로 이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구나, 라고 나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행복하다.
이번엔 전생 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익! 왜 시스랑 키스할 때 더 황홀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넌 대체 뭐가 불만인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