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회: 7권 - 5장. 청혼 -->
“단주님!”
줄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버럭 소리 질렀다. 응, 그래. 그렇게 반가웠니?
“죽었어, 아주!”
응? 저게 뭔 소리래?
왜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거야? 아니, 어째서 적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고?
“얘야. 내가 죽긴 왜 죽니? 그보다 좀 무서우니까 그 꽈악 쥐고 있는 주먹부터 풀자. 자, 착하…… 크헉!”
퍼어억!
줄리아의 날렵한 발차기가 내 정강이를 가격했다. 다리뼈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나는 바닥을 뒹굴었다.
그 주먹은 눈속임이었냐?! 이 무서운 아이!
줄리아는 그대로 쓰러진 내 배 위에 털썩 깔고 앉더니,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 올렸다.
“허, 허억! 살려다오, 얘야!”
“애들 부르듯이 얘야, 얘야 하지 말아요! 늙은이 같아!”
“그, 그래. 내가 미안하다. 그러니까 날 때리지 마.”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에요. 오늘 저한테 할 말 없어요?!”
“어라? 너 점쟁이니? 어떻게 알았지.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해봐요!”
“결혼하자.”
“죽어!”
“하하, 그래. 죽…… 응?”
퍼억! 퍽! 퍽!
줄리아는 주먹으로 망치질을 하듯이 내 안면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악! 억! 그, 그만, 컥! 왜, 왜 때리는 거니?! 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해서 폭력적 본성이 표출되고 있는 거니?!”
“누가 그딴 말에 속을 줄 알아, 이 바람둥이야!”
“바, 바람?!”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늘 낮에 보니 웬 아리따운 공주랑 오붓하게 하늘에서 데이트를 하시던데요?! 이야, 아주 한 폭의 그림이었어요! 보고 있는 제가 다 흐뭇해져서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요.”
“헉. 그걸 본 거니?”
세렌스 공주와 하늘을 날며 영지 구경 시켜주었던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데이트라니? 그게 어딜 봐서 데이트인데?!
물론 좀 오해할 만한 모습이긴 해도, 뒷자리에는 라엘도 있었단 말이야! 제 3자를 뒷자리에 앉혀놓고 데이트 하는 인간도 있니?
“그 사람들은 오리엔 왕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라 직접 모신 것뿐이야. 바람이라니, 당치도 않다고.”
“거짓말! 그 여자는 벌써부터 단주님의 가족들과 열심히 친분을 다지고 있던데요?!”
“그랬어? 아무튼 그건 내가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좀 진정하자. 분노는 인류의 평화에 아무 도움도 안 돼요.”
“10초 내로 설명해요.”
“10초?! 무리야!”
“그럼 맞든가.”
퍼억!
“꾸엑! 오리엔 왕실이 날 데릴사위로 끌고 가려고 한다!”
정말 10초 이내로 요약해버렸군. 위기에 몰린 인간은 못 하는 게 없구나.
내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줄리아.
“데릴사위?!”
“그래. 그렇지 않아도 방금 왕실로 사람을 급히 보내는 걸 봤단 말이야. 꾸물거리고 있다가는 정말 오리엔 왕실로 끌려가고 만다고!”
“그럼 그 결혼하자는 말은 진심……? 그것 때문에?”
“물론이지!”
“죽어!”
퍼억! 퍽!
“커억! 끄윽!”
줄리아는 아까보다 더 힘찬 기세로 날 때렸다. 안면, 복부, 아주 골고루 날 다지고 있었다.
“결국 오리엔 왕실로 끌려가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한다는 말처럼 들리잖아요! 날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는 거예요?”
“사랑해! 오리엔 왕실 문제를 제쳐놓고도 많이 고민했다고. 널 사랑하지 않았으면 진즉에 거절했겠지!”
“거짓말!”
“정말이야! 어디 보자, 노움!”
-응.
노움이 땅속에서 슉 튀어나왔다.
“우리 아까 결혼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었지?”
-응. 아빠는 결혼해야 해.
“그치? 그럼 내 진심을 줄리아에게 설명 좀 해줘. 쟤가 인간 불신증이라 내 말을 잘 안 믿네.”
-응, 아빠.
노움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그 거짓 없는 순진무구한 눈동자와 마주하자, 줄리아의 표정에서 분노의 기색이 점차 사그라지는 게 보였다.
역시 우리 귀염둥이 노움은 존재 자체로도 인류 평화에 공헌을 한다니까.
노움은 줄리아에게 말했다.
-아빠는 바람둥이야.
“잘 들었지? 난 바람…… 응?”
순간 뇌리로 스쳐가는 기억.
-둘 다? 아빠 결혼 두 번 하고 싶어?
-아빠. 바람둥이가 뭐야?
이런 맙소사!
“역시 죽어!”
줄리아는 버서커의 혼이 빙의된 것처럼 날 두들겨 팼다.
그 오해는 한참을 맞아가며 설명한 끝에야 해명되었다.
“하긴, 시스가 조금 걸리긴 하네요.”
줄리아도 내 고충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시스는 그동안 줄리아와 함께 나에게 많은 애정표현을 하지 않았던가.
“으응…….”
“왜 그렇게 힘이 없어요?”
네가 때렸잖니!
너무 맞은 나머지 나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노움의 감각을 통해 나 자신을 보니, 예티 코트를 입은 채 맞아서 뻗어 있는 내 모습은 누구나 쯧쯧 혀를 찰 정도로 가관이었다.
“아무튼 이 청혼은 취소예요.”
“뭐? 어째서?”
줄리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단주님은 로맨스도 몰라요? 얻어맞는 와중에 변명하듯이 프러포즈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반지라도 사와서 다시 해요!”
“로맨스라니. 뜬금없이 무슨 소리니? 넌 그런 거랑 전혀 안 어울리잖아. 네게 어울리는 단어는 현금, 속전속결, 실리주의, 현실주의라고.”
“또 맞을래요?”
“미안…….”
“아무튼 프러포즈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하세요. 그때까지 집에는 못 들어올 줄 알아요!”
그러곤 줄리아는 휙 뒤돌아 떠나버렸다.
“…….”
-아빠, 괜찮아?
“노움아.”
-응, 아빠.
“역시 결혼은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힘내 아빠.
“그래그래.”
나는 노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배시시 웃는 노움이 그나마 내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아무튼 결정이다. 오리엔 왕국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미리 결혼을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아무렴 어떠냐. 이젠 될 대로 되라 싶다. 어떻게 살든 가정 문제는 전생보단 잘 되겠지 싶으니까.
……반지나 사러 가자.
원하는 대로 제대로 프러포즈를 해주어야지. 꽤 로맨틱한 분위기도 만들어주고.
반지는 비싼 걸 사줘야지.
내가 얼떨결에 청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최소한 그런 성의로라도 보여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이곳 쿤트 영지처럼 가난한 지방에서는 귀한 귀금속을 팔지 않는다.
물론 구스 영감에게 부탁하면 미스릴로 된 반지를 만들어주긴 하겠지만, 구스 영감은 대장장이지, 보석 세공사가 아니었다.
큰 영지에 가서 값비싼 걸 사와야 할 것 같았다.
행동은 빠를수록 좋지. 오리엔 왕실의 너구리같은 작자들이 무슨 짓을 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버려야지.
나는 일단 연회장을 떠나기 전에 먼저 아서 형님께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줄리아 말대로 세렌스 공주는 우리 가족과 함께 있었다.
여태껏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정말로 그녀는 내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했다.
첫 만남부터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친근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비단 정령친화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 역시 처음부터 나와의 관계가 가까워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는 아서 형님께 말했다.
“형님, 전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어딜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아서 형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상관은 없다만, 무슨 일이냐?”
“제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돌아올 생각이냐?”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못 돌아올 것 같군요.”
아서 형님은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중요한 일인 것 같구나. 하지만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으니 더는 묻지 않으마. 잘 다녀 오거라.”
역시 눈치 빠른 아서 형님다웠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때였다.
“쿤트 남작님! 어디 가시나요?”
세렌스 공주가 놀란 얼굴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녀와 얼굴을 맞대니 나는 내심 뜨끔했다.
정략적인 목적을 지니고 접근했다지만, 세렌스 공주는 결코 속내를 감추고 거짓으로 남자를 유혹하거나 하는 그런 음험한 여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 돌아오시나요?”
무척 섭섭한 얼굴로 묻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녀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그녀의 호감은 진심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해맑은 표정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엄청난 거짓말쟁이가 아닌 한은 말이다.
그런 그녀를 애써 외면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급한 볼일이 생겨서 불가피하게 잠시 자리를 떠나야겠군요.”
“그럼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안 돌아오는 건가요?”
“예.”
“아아. 어떡해요. 이대로 헤어지자니 너무 섭섭해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별 수 없죠.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죠.”
“다음…… 말이죠.”
“예. 인연이 있다면 또 뵐 수 있을 겁니다.”
“…….”
침울하게 가라앉은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녀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난 오리엔 왕실의 데릴사위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평생 일 안 하고 한가롭게 살 수 있다면야 제법 갈등하겠지만, 오리엔 국왕 그 양반, 절대로 내가 놀게 놔두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부려먹으려 들 테지.
“아! 코트, 돌려드려야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세렌스 공주는 라엘을 불렀다.
“맡겨놓은 코트 좀 부탁해요, 라엘 경.”
“예.”
결국 난 라엘에게서 레드 미스릴 코트를 돌려받고 나서야 이 예티 코트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예티 코트를 라엘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좋은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무슨 볼일로 그리 급히 떠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라엘의 물음에 나는 씨익 웃었다.
“글쎄요. 비밀이라고 해두죠.”
“비밀이라……. 그렇군요.”
우리는 잠시 서로 눈을 마주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그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무슨 일로 어딜 가는 걸까? 혹시 우리의 의도를 들킨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쯧쯧, 어려. 날 상대하기에는 아직 어려, 이 천재 양반아.
나는 라엘을 뒤로 한 채 저택을 나섰다.
“노움.”
-응, 알았어.
내 마음을 읽은 노움은 즉시 흙으로 만든 흔들의자를 만들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흔들의자가 둥실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