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회: 7권 2장. 제이슨 란즈헬의 방문 -->
첫날의 연회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악단과 극단, 곡예단 등이 공연을 해서 많은 호응을 얻었고 요리와 포도주도 맛있었다고 평가 받았다.
참고로 릭 형님은 아버지와 세 차례 대련을 하여서 3연속 패배를 기록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꺾어놓고는 좋다고 연신 웃음을 터뜨리셨고, 릭 형님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아버님 같은 범재에게 지다니, 이 수모를 어떻게 참아!”
“어려서부터 천재, 천재 해줬더니 정말로 자기가 천재인 줄 알았나보구나. 괜한 착각을 하게 해서 이 애비가 참으로 미안하구나.”
“크으윽! 두고 보쇼!”
“그래, 열심히 하여라. 본래 복수의 칼을 가는 피나는 수련이란 약자의 특권이 아니냐. 난 엘레네나 보러 가야겠구나.”
휘파람까지 불며 연회장으로 가버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간 릭 형님은 검을 뽑아들고 수련을 개시했다.
당장 요 며칠 수련한다고 갑자기 오러 엑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지간히도 분했던 모양이었다. 가만 보면 부자지간이 아니라, 사이 나쁜 형제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한편, 그 대련을 구경하던 나는 옆에서 함께 구경한 라엘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아버님과 릭 형님의 대결을 본 소감이.”
“훌륭하오. 특히 쿤트 자작님의 강함은 소문 이상이었소. 설마 저렇게 강하셨을 줄은 몰랐군. 실은 바스크 쿤트 자작님과 좋은 대결이 될 것 같아서 실력을 겨뤄보고 싶었는데, 하마터면 망신을 당할 뻔했소.”
“원 겸손의 말씀도. 아버님도 그 나이 땐 라엘 남작님 같은 실력은 없었는데요.”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않소. 그대의 형님 되시는 저 릭 쿤트 역시 동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한 수 위로 보였소. 나야말로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칭찬만 받고 자랐더니 우물의 안의 개구리가 되어버린 것 같소. 돌아가면 다른 일들은 잠시 접어두고 검술에만 매진해야겠군.”
아니, 댁은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차피 댁은 60대쯤에 오러 마스터가 된다고! 그 빵빵한 가문에 생긴 것도 잘생기고 다방면에서 능력도 있는데, 엄친아도 정도가 있지!
“그리고 카록 쿤트, 그대까지.”
라엘은 날카로운 눈매로 날 응시했다.
“이제 보니 이곳은 용담호혈이었군. 사실 쿤트 가문의 인물 중 가장 두려운 게 바로 당신이오.”
“…….”
“그만한 상재와 정치 감각에, 심지어는 내 아버님과 맞설 정도의 정령술까지. 난 지금껏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버님이 신처럼 생각했는데, 당신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 그대는 대체 정체가 뭐요?”
“하하, 그렇게 물어보셔도…….”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인간이랍니다.
라고 대답할까보냐?
“뭐 그건 그렇고, 보아하니 제이슨 란즈헬도 초대한 것 같은데,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오?”
그 말에 나는 흠칫 놀랐다.
그것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대체 브리튼 공작가의 정보망은 어느 정도인 거야?
“그렇게 놀랄 것 없소. 란즈헬 백작가에 첩자를 심어놓았을 뿐이니까.”
훗날 누군가는 브리튼 공작가를 일컬어 오리엔 왕국의 눈과 귀라고 평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정말 무서운 정보수집능력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조만간 육제후의 일원이 될 사람의 됨됨이도 한 번 보고 싶었고, 잘만 하면 육제후와 레던 왕실의 관계를 연결할 만한 끈을 만들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나저나…….”
난 히죽 웃으며 라엘에게 말했다.
나만 놀랄 순 없잖아? 댁도 한 번 놀라보시지?
“그걸 보기 위해서 브리튼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실 분께서 몸소 오셨군요. 아니면 더 중요한 목적이라도 따로 있으신지요?”
“후계자? 무, 무슨 소리요?”
이번엔 라엘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난 웃으며 말했다.
“모르시겠습니까? 전 한 눈에 알았는데 말입니다.”
“뭘 근거로 날 후계자라 한 거요?”
“브리튼 공작가의 정보 수집을 담당하시는 것 같던데, 차기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눈과 귀 아닙니까. 게다가 사실 척 봐도 알 것 같더군요. 외모도, 기질도 조엘 브리튼 공작 전하와 쏙 빼닮았습니다. 완벽주의자이신 브리튼 공작 전하라면 자신과 가장 닮은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 겁니다.”
뻥이지롱.
실은 미래를 알기 때문에 아는 것뿐이지.
하지만 라엘은 진심으로 놀란 듯 날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과연 무서운 사람이오, 당신은.”
“별말씀을.”
졸지에 무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즘 이런 소리 많이 듣는다.
그렇게 첫날의 연회가 무르익어서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였다.
저택으로 웬 기사 한 명이 찾아왔다.
그 기사는 란즈헬 백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연회장으로 성큼성큼 들어온 기사는 아버지와 아서 형님을 향해 나아가 고개를 숙였다.
“란즈헬 백작가의 기사 잭 벨론 준남작입니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가 물었다.
“란즈헬 백작가의 대공자 제이슨님께서 내일 오전 경에 이곳으로 당도하실 예정입니다. 그 전에 허락을 받고자 미리 통보해드립니다.”
그 말에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대부분이 왕실파 귀족들인 손님들은 정적인 육제후파의 핵심인물격인 제이슨이 온다고 하자 깜짝 놀란 것이다.
아버지는 옆에 있는 아서 형님을 쳐다보았다.
아서 형님이 물었다.
“확실히 제이슨 란즈헬 자작님은 우리가 초대하였소. 그런데 이렇게 따로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이오?”
“제이슨 란즈헬 대공자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저를 비롯한 기사 10인과 병사 300명이 동행하였습니다. 이 일행의 쿤트 영지 진입 및 쿤트 성 입성(入城)을 허락 받고자 합니다.”
“300명씩이나?”
아서 형님은 흠칫하였다.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행원으로는 너무 많았다. 물론 위협적인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모두 이곳 성안으로 들여보낸다면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기사 10명이라니. 그 기사들 중 오러 엑스퍼트가 몇 명 끼어있다면, 일개 영지의 무력을 상회하는 것이다.
“모쪼록 허락을. 정 우려가 되신다면 병력은 성 인근에서 따로 주둔을 하겠습니다.”
기사가 재차 말했다.
아서 형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섭다면 입성을 허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은근슬쩍 우리를 도발하는 것이었다.
아서 형님은 흘깃 날 쳐다봤다.
난 아서 형님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제이슨 란즈헬이 우릴 시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구나.”
“그럼 우리의 그릇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어야지요.”
“나도 동의한다. 자칫 얕보여서는 곤란하지. 너와 아버지는 물론 릭까지 있는데 두려울 것도 없고 말이다.”
“바로 그겁니다.”
이윽고 아서 형님은 기사에게 대답했다.
“무엇을 경계하시는 것인지……. 과한 병력을 끌고 오신 점은 의아하나, 우리가 초대한 손님의 일행인데, 꺼릴 필요가 무엇이 있겠소.”
그 말에 이번에는 기사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아서 형님은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많은 병력을 데려왔냐고 받아친 것이다.
“입성을 허가하오. 그러나 불가피하게도 주둔은 성 밖에서 해야겠소. 현재 쿤트 성에 무척 많은 손님이 오셔서 300명이나 되는 병력을 더 소용할 만한 사정이 되지 못하오. 성 밖에 주둔하면 식량은 우리가 제공하고, 필요 시 언제든 성 안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하겠소.”
과연 아서 형님. 적절한 대응이다.
“……제이슨 대공자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전 그렇게 알고 이만.”
기사가 밖으로 떠나고 난 뒤, 나는 아서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제가 가서 제이슨 란즈헬 일행을 맞이하겠습니다.”
“네가 직접?”
“예. 제이슨이 우릴 시험했으니, 우리도 한 번 그의 됨됨이를 시험해봐야죠.”
아서 형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아무튼 공연한 도발로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는 말거라.”
“걱정 마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저녁노을이 지는 시각.
쿤트 성에서 서쪽으로 3킬로미터쯤 떨어진 황야에서 말을 탄 3백여 명의 기병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대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폭설이 내리는 날씨에 움직인 탓에 다들 피로가 엿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쿤트 성 인근에 다다르자 길을 대대적으로 청소라도 한 모양인지 쌓인 눈 한 점 없이 말끔하게 치워진 사실이었다.
“전군, 정지!”
기병대를 이끌던 기사가 소리쳤다.
쿤트 성까지 앞으로 약 1킬로미터 지점. 쿤트 성의 모습이 확연하게 눈이 들어오는 지점에서 기병대는 멈췄다.
마차에서 란즈헬 백작가의 대공자, 제이슨이 걸어 나왔다.
기사는 제이슨에게 다가가 말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병력을 주둔시키겠습니다.”
“군영을 세우는데 시간이 걸리겠군.”
제이슨은 눈이 쌓인 황야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눈을 치우고 막사를 세우는데 족히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았다. 기병대 병사들의 얼굴에 벌써부터 질린 기색이 떠올랐다. 겨울에 야영을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부터 당장 주둔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 하라.”
이윽고 기사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 주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삽으로 눈을 치워서 막사를 세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는 병사들이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제이슨은 쿤트 성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흔쾌히 입성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소인배는 아닌 모양이군.”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입성 허가를 요구했는데 흔쾌히 허락하다니. 일반적인 왕실파의 영주였다면 단번에 거절했을 터였다.
아니, 애당초 처음부터 정적을 연회에 초대할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아무튼 이번 쿤트 자작가의 연회 참가는 좋은 결정이었다고 제이슨은 스스로 생각했다.
왕실파의 인물들을 직접 두 눈으로 살필 좋은 기회였다. 특히 그 핵심이 될 카록 쿤트. 거기에 오리엔 왕국 측의 인물까지 연회에 참가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치적인 감각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될 터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비록 적진이긴 하나 정치무대에 제이슨 란즈헬이라는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