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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55화 (155/529)

<-- 155 회: 7권 - 1장. 연회장에서 -->

정신과 육체는 상호 영향을 주는 법. 몸이 약한 사람은 정신력 또한 심약하며, 건장한 육체를 가진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무튼 노움이 나에게 조언을 해주다니,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노움에게 또 물었다.

“그럼 역시 줄리아와 결혼해야 하는 걸까?”

노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어.

“엥? 왜 또 몰라?”

-여자가 하나 더 있잖아, 아빠.

“…….”

순간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맞다. 시스가 있었지.

생각해 보니 줄리아의 청혼을 받아들이는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시스였다.

시스 또한 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나 역시 약간이지만 그러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나와 줄리아가 결혼을 해버리면, 시스는 혼자가 되어버린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시스가 외톨이가 되게 놔둘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모두가 해피해지는 방법이 없을까?

그러자 노움이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둘 다? 아빠 결혼 두 번 하고 싶어?

“커헉!”

나라는 놈은…… 나란 녀석은!

정곡을 찔린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안 돼! 사랑스런 노움이가 내 마음을 읽고 있을 텐데! 순진무구한 노움에게 이런 음흉한 마음을 보여줄 수는 없어!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음을 비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노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빠. 바람둥이가 뭐야?

“끄아악!”

나는 노움이 말릴 때까지 머리로 땅을 찧었다.

*   *   *

연회 첫날 오전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공적인 자리라면, 오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연회를 즐기는 시간이었다.

지난 90년의 전생을 살면서 느낀 게 있다면, 난 사람이 많은 자리일수록 피곤해진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날 보고 싶어 하는 손님들이 워낙 많아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상당수는 카록 병기점으로부터 병장기를 정기적으로 납품 받는 중요한 고객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자리라면, 훌륭한 마케팅의 기회였다. 상단의 오너로서 안 갈 수가 없었다.

젠장, 언젠간 반드시 은퇴하고 말 테다.

손님들 중에서는 우리와 사돈지간인 후디니 자작도 있었다.

“잘 있었나? 오랜만에 보는군.”

레이라의 아버지이자 몬스터 박제 수집이 취미인 이 양반은 어째 날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일전에도 제가 신세를 졌습니다.”

“아아, 유란 상단 말이로군. 나에게 빚을 져놓고 파산해버린 녀석들이었지. 자네가 빚을 대신 갚아주었으니 나야 좋네만, 유란 상단을 인수하다니 의외로군.”

“아하하, 한 번 쓴맛을 봤지만 노예로 팔아버리기에는 아까운 친구들이잖습니까.”

“날 매정하다 탓하지는 말게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후디니 가문은 계산은 확실히 하는 게 철칙일세. 이익을 보나, 손해를 보나 항상 계산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했지. 그 덕분에 지금의 후디니 자작가가 있는 것이고.”

“물론이죠. 훌륭한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별로 훌륭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족까지 전부 노예를 파는 건 매정하지 않나?

“유란 상단을 인수할 걸로 보아 혼트 제국 시장으로 진출할 모양인데, 마침 바덴 강 통행세 협상도 이루어져서 시기가 절묘하군. 안 그런가?”

“하하, 그렇죠.”

“자네가 인수한 유란 상단은 곧바로 혼트 제국으로 떠난 듯한데, 상당히 오래 전부터 혼트 제국 진출을 준비한 모양이군. 마치 사전이 미리 바덴 강의 통행세가 낮아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아하.

이것 때문에 이 양반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은 바덴 강 협상을 추진하기 전부터 수출할 물량을 확보해두었죠.”

“그런 좋은 정보가 있으면 당연히 나에게도 알려주어야 할 게 아닌가? 우리 사이가 남도 아닌데 정말 매정하군!”

후디니 자작은 날 쏘아보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예전에 밀 4만 포대부터 시작해서 나 때문에 배 아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군. 눈앞에서 나 혼자 대박을 터뜨리는 걸 몇 번이고 봤으니 말이다.

“이것 참 죄송하네요. 하지만 저도 물론 그러고 싶었지만, 협상이 타결될지, 안 될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박이었다 이 말인가?”

“예. 도박은 남에게 권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말은 잘 하는군. 다음에 또 도박을 하거든 꼭 나도 껴주게나. 자넨 도박에서 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군.”

“하핫, 알겠습니다. 약속드리죠.”

“내 두고 볼 걸세. 또 혼자만 재미 보면 내 딸을 도로 친정으로 데려가겠네.”

“어휴, 그랬다간 아서 형님께서 땅을 치고 통곡하실 텐데요.”

“흥, 그러니까 잘 하란 말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참을 달랜 끝에야 후디니 자작은 화가 조금 풀어진 기색이 되었다.

후디니 자작은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듣기로 아직 혼트 제국 쪽에서는 곡물이 좋은 값에 팔린다던데 정말인가?”

“예. 아무래도 열악한 치안 탓에 유통망이 원활하지 않아서 모든 물가가 비쌉니다.”

“그럼 마침 자네가 혼트 제국 시장에 진출했으니 잘만 되면 내가 보유한 곡물도 좀 팔아주게.”

후디니 자작령은 이 나라 최고의 곡창지대.

곡물의 시세가 바닥으로 떨어진 현재, 가장 골머리를 썩는 사람은 바로 후디니 자작이었다. 팔 데도 없이 남아도는 곡물을 가만히 창고에서 썩게 놔둘 수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굴리는 실정인 것이다.

“팔 것이 많으면 저야 좋지요. 안정적인 유통망을 확보하는 대로 자작님의 창고에 쌓여 있는 곡물들도 팔아치워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일이 잘만 성사된다면 곡물을 판매한 순이익의 40%를 자네에게 주겠네.”

“하하, 50% 주시죠? 혼트 제국이 어디 보통 험한 동네도 아닌데 절반은 주셔야지요. 혼트 제국에 간 상인 열 명의 이야기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한 놈 빼고 다 쫄딱 망했다는 그 이야기 말인가? 집어치우게. 자네, 대흉년 때도 그랬고 내 덕분에 크게 한 탕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닐 텐데 끝까지 섭섭하게 나오는군.”

“그걸 감안했으니 5대 5이지요. 자작님께서는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재고로 쌓인 곡물을 털어내고 이익도 챙기시는 건데 그만하면 충분하실 텐데요. 다 된 스튜에 스푼만 얹는 일이잖습니까.”

우리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였다.

이윽고 후디니 자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는 수 없군. 좋네.”

“역시 계산은 확실히 하는 후디니 자작가로군요.”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후디니 자작에게 말했다. 후디니 자작은 코웃음을 쳤지만, 이내 따라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내 조카딸은 어디냐?!”

누군가가 덜컥 연회장으로 뛰어 들어와 활기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떤 얼간이이기에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엘레네를 안고 있는 레이라와 함께 있던 아서 형님이 이 소란스런 난입자를 보더니 황당해져서 말했다.

“릭?”

그랬다.

바로 릭 형님이었다.

릭 형님은 매의 눈으로 휙휙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서 형님 내외를 발견하고는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오오, 형님! 축하합니다. 이야, 힘 좀 쓰셨나보네! 형수님도 오랜만이고 축하합니다. 그 아이가 엘레네로군요! 내 사랑스런 조카! 크하하!”

“멈춰! 저, 접근하지 마라!”

마치 릭 형님이 엘레네를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기 때문에 아서 형님이 당황하여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릭 형님은 뮤트 공작의 수제자다운 날렵한 몸놀림으로 아서 형님을 건너뛰고, 엘레네를 안고 있는 레이라에게 다가왔다.

레이라는 엉겁결에 릭 형님에게 엘레네를 건네주고 말았다.

“으하하! 이 아이가 바로 나의 첫 번째 제자다!”

엘레네를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고 당당히 선언하는 릭 형님.

연회장의 모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흐아앙!”

결국 엘레네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 어라? 얘야, 그땐 기쁘게 웃어야지? 내 제자가 될 아이가 그렇게 쉽게 울면 못써요.”

릭 형님은 당황해서 엘레네를 달래려고 애썼다.

결국 내가 나섰다.

“노움, 운디네. 뺏어와.”

-내놔 바보야.

-바보야.

노움과 운디네는 엘레네 탈취에 나섰다.

노움은 어스 핸드로 삽시간에 릭 형님의 팔다리를 붙들었다. 그 바람에 릭 형님은 엘레네를 놓쳤다. 운디네는 미지근한 온도의 물웅덩이를 만들어 엘레네를 받아들었다.

정령들이 나타나자, 비로소 엘레네는 울음을 뚝 그쳤다. 정령친화력을 타고난 탓에 정령들에게 친숙함을 느끼는 탓이었다. 덕분에 가끔 레이라가 정령들을 빌려줄 수 없냐고 부탁까지 한다니까?

소란이 벌어지기 전까지 이웃 영주들과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던 아버지가 걸어오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우리 가문에 얼간이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거늘.”

릭 형님은 노움에게 붙잡힌 채 뻔뻔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를 말씀하시는 건 아닐 텐데, 누군가요? 우리 쿤트 가문의 얼간이는. 카록, 일단 네 귀여운 정령더러 날 좀 놓으라고 하는 게 어때?”

나는 대꾸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님, 이 얼간이 형님을 어떻게 할까요?”

“일단 수련장에 갖다놓아라. 나중에 내 친히 예법 교육을 다시 시켜줄 생각이다.”

“네. 노움.”

-응!

노움은 여러 개의 어스 핸드로 릭 형님을 번쩍 들었다.

“어엇? 얌마, 이거 안 놔? 나중에 후회한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릭 형님을 노려보았다.

“릭 형님. 정말로 쓰라린 경험을 하고 싶으시다면야 계속 그렇게 소란을 피우셔도 됩니다. 이 동생이 직접 오랜만에 형님의 대련 상대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릭 형님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릭 형님도 내가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나랑 싸워봐야 질 것이 뻔한 사실을 아는 이상 한 번 붙어보자고 큰소리 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좀 자중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자, 가자. 어서 날 수련장에 데려다줘야지.”

릭 형님은 금방 얌전해졌다.

나 참,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반응이 아버지와 똑같았다.

강한 적을 만나도 굽히지 않지만, 강한 동생 앞에서는 자존심 구길 까봐 슬그머니 꼬리를 마는 특성 말이다.

나는 노움을 시켜서 릭 형님을 수련장으로 보내버렸다. 저 얼간이 같은 작자는 잠시 바람이나 쐬며 흥분을 진정시켜야 한다.

아버지 또한 어수선해진 연회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더니 휙 밖으로 나섰다.

“난 릭과 이야기 좀 하고 오마.”

아버지가 달아나버리자, 이 연회의 책임자가 된 아서 형님은 당황했다.

일단 이상해진 이 분위기부터 수습해야 했다.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는 수 없지. 내가 나서야지 어쩌겠어? 언제나 우리 가문에 위기가 닥치면, 이 위대한 정령사님이 나서서 해결했잖아?

나는 노움과 감각을 공유하고, 정령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엇? 저게 뭐지?”

“흙?”

열린 창문으로 진흙덩어리가 둥실 떠다니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이목이 그 진흙덩어리에 집중되었다.

진흙덩어리는 두 개로 갈라지더니 두 명의 사람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령술이다!”

“카록 쿤트 남작이 재주를 부리고 있어!”

“정령술을 직접 본 것은 이번에 처음이군.”

진흙으로 만들어진 두 명의 사람은 바로 뮤트 공작과 할슈타인 백작이었다.

전에 아버지와 기사들에게 보여준 바 있었던 두 오러 마스터의 대련을 다시 연출한 것이다. 이만큼 모두의 흥미를 끄는 이벤트는 없으니까 말이다.

“어엇? 저건 뮤트 공작 전하인데?”

“정말이다! 그럼 다른 사람은 누구지?”

“어라? 두 사람이 싸울 태세인데…….”

이윽고 두 진흙인형이 싸우기 시작했다. 대련이 펼쳐지자, 연회장의 사람들은 비로소 그것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뮤트 공작과 할슈타인 백작의 대결이라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숨을 죽이고 대결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대결이 끝나자 나는 두 진흙인형을 다시 덩어리로 뭉쳐서 밖에다 버렸다.

“우와아! 최고다!”

“대단해! 정령술이란 것은 실로 멋지군!”

“설마 말로만 들었던 그 대결을 보게 될 줄이야.”

사람들은 흥분해서 우레 같은 박수를 나에게 보냈다.

“저렇게 봐도 대단한데, 실제로 오러 블레이드가 충돌했던 그 대결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그런데 결국 무승부인가? 뮤트 공작 전하께서 약간 우세하셨던 것 같은데.”

“에이,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가 레던 왕국의 귀족이라서 뮤트 공작 전하의 편을 드는 것뿐이지, 할슈타인 백작도 만만치 않았네. 무승부일세, 무승부.”

사람들은 누가 더 강했냐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연회 분위기는 다시 한껏 달아올랐고, 더 이상 릭 형님의 행패(?)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아서 형님은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세우며 감사와 칭찬을 표했다.

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잠시 바람이라도 쐬러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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