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회: 7권 - 1장. 연회장에서 -->
나는 세렌스 공주와 라엘 브리튼 자작을 태운 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쿤트 영지의 정경은 제법 아름다웠다.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들의 생활풍경이 보기 좋다.
하지만 달리 표현하자면 촌구석 분위기가 솔솔 풍긴다는 뜻이지. 정말인지 우리 가문의 영지지만 시골은 시골이구나. 최근 몇 년간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멋진 영지네요.”
그렇게 상냥하게 말하는 세렌스 공주의 말을 나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댁은 저게 멋져 보이쇼? 내 눈에는 그냥 시골 영지인데. 인구 백만의 엄청난 대도시인 왕도 오리엔에 사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봤자 현실감이 없거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에서 오신 분께 칭찬을 들으니까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군요.”
“어머, 진심이에요. 물론 우리 왕도 오리엔이 훨씬 부유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때때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전 이곳이 훨씬 마음에 들어요. 훨씬 온화하고 생기발랄해요.”
“아, 그렇군요.”
나는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미약하지만 정령친화력을 가진 여자였다. 분명히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자연을 사랑하는 정령사의 천성이 어느 정도 있을 터.
그런 그녀에게 대륙 최대의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 그것도 엄격한 왕궁 생활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저도 이런 곳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역시나, 전형적인 정령사의 마인드다. 나는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했다.
“간단하군요. 저희 쿤트 가문에 시집을 오시면 됩니다.”
그러자 그녀 또한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은근히 말한다.
“후훗. 정말 그럴까요?”
“마침 쿤트 가문에 임자 없는 사내들이 꽤 있는데 아무나 골라잡아 보시죠. 공주님이 시집오신다고 하면 넙죽 절을 할 테니까요.”
세렌스 공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는 슬쩍 뒷자리에 앉은 라엘을 바라보았다.
저 브리튼 공작가의 모범생 삼남께서는 왠지 얌전하다.
공주와 내가 좀 진한 농담을 하는 걸 들으면 ‘그런 경박한 말씀은 안 됩니다, 공주 저하!’라고 지적을 해야 하는 캐릭터 아니었나?
사실 난 세렌스 공주보다는 라엘 브리튼 자작 쪽이 더 신경이 쓰인다.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자.
오리엔 왕실의 다섯째 공주 세렌스. 그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들어본 바가 없었다.
기껏해야 뛰어난 미모를 가져서 한 번 본 남자들은 다들 사랑에 빠져버린다는 등, 그래서 오리엔 국왕이 무척 아낀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녀가 전생 때 누구와 결혼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상인으로 살다 보면 어지간한 소문은 다 들어보았을 텐데, 내가 모른다는 것은 그녀의 결혼이 정치적으로 그리 큰 화제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 생각보다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을 테지.
즉, 세렌스 공주는 왕실의 일원이지만 정치에 관심을 갖는 성격이 아니라서 향후 정계의 거물급 인사가 될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그러나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 라엘 자작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 모범적인 성격에 놀리기 좋은 청년은 그 겉모습처럼 순진하지 않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전생의 나조차도 모를 수가 없었던 거물이었다.
얼마나 거물이었냐고?
놀라지 마라. 전생에 라엘은 브리튼 공작가의 다음 대 가주였다. 조엘 브리튼 공작의 뒤를 잇는 후계자였던 것이다!
가문의 삼남이지만 라엘은 서자인 나와 달리, 조엘 브리튼 공작의 첫째 부인이 낳은 적통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용병술은 물론이고 정치, 상업, 외교 전반에 걸쳐서 다재다능함을 자랑한다.
검술은 말할 필요도 없다. 20대 후반은 현재에 벌써 오러 엑스퍼트 상급이니, 우리 릭 형님에 버금가는 천재라 할 만 하지 않은가.
심지어는 잘생긴 얼굴까지. 그야말로 질투 나고 재수 없어서 치가 떨릴 정도의 완벽함! 바로 부친인 조엘 브리튼 공작의 기질을 쏙 빼닮은 만능형 천재인 것이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조엘 브리튼 공작이 은퇴하자 라엘은 약 40세의 나이로 차대 가주의 자리에 올랐고, 그 뒤로 오리엔 국왕을 보필하는 최측근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리엔 왕국에서 브리튼 공작가는 정치, 경제, 군사력, 외교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가문인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권력이 왕실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브리튼 공작가의 가주가 된다는 건 오리엔 왕국의 국왕이 되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대단한 위치에 오른 라엘은 60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기까지 한다. 사실 20대 후반인 현재에 이미 오러 엑스퍼트 상급이었고 대단한 천재성을 주목 받은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늦은 편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는 평생 연마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경지를, 가문과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와중에 이루었다니 실로 재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가주 직책을 이어 받지 않고 검술에만 매진했었더라면 훨씬 빨리 오러 마스터가 되었겠지.
쳇, 하여튼 천재란 족속들은…….
어라? 가만.
생각해 보니 난 20대 초반에 벌써 상급 정령사잖아? 거기에 차기 재상으로 지명까지 받았으니, 그보다 더한 천재로 불릴 수 있군. 질투할 필요 없잖아 이거.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노릇이었다.
세상에나.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전생 때는 라엘 브리튼 같은 거물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다시 사니까 이런 어마어마한 인생을 살게 되다니.
“뭘 그렇게 웃으시죠?”
“아, 아닙니다.”
“흐응, 무슨 재미있는 생각을 하셨기에 그렇게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신 거죠? 저도 가르쳐주세요.”
세렌스 공주는 불임성 좋게 채근했다.
나는 대충 둘러댔다.
“라엘 자작께서 어디서 이런 예티 코트를 구하셨을까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그만.”
“그죠? 정말 불가사의라니까요. 천금을 줘도 못 구할 것 같은 코트를 냉큼 사오다니, 라엘 경은 은근히 별나다니까요.”
“큭. 예티 코트가 아닌데…….”
뒷자리의 라엘은 얼굴이 빨개진 채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아하하. 저렇게 놀리기 좋은 남자가 오리엔 왕국 최고의 거물 정치인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브리튼 공작가의 가주에 오러 마스터까지 되었으니, 그 후로 오리엔 왕국의 정계는 그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조엘 브리튼 공작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 있다면, 궁정마법사단장이자 7서클 마스터인 레이몬드 후작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레이몬드 후작은 워낙 마법에 미친 탓에 후계자도 키우지 않았고, 조엘 브리튼 공작이 가주 직을 내놓고 은퇴할 때 함께 일선에서 물러나버렸다.
아참, 깜빡할 뻔했군.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전생 시절 오리엔 왕국에서 브리튼 공작가의 가주가 된 라엘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치가가 딱 한 명 있긴 했다.
그게 누구냐고?
누구긴 누구겠어. ‘오리엔 왕국의 마지막 장벽’이라 불렸던 천재 정치가 제론 폴만, 지금은 레던 왕실의 관리인 제론 데커드지.
카르스 황제의 침공을 막아낸 업적을 세운 제론은 능히 라엘과 함께 오리엔 왕국의 핵심 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의욕이 없는 탓에 일찌감치 은퇴해버렸지만.
제론에게 조금이라도 야망이 있었더라면 오리엔 왕국이 라엘 브리튼의 판도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후세의 지배적인 견해였다. 하여간 전생이나 지금이나 정말 의욕 없는 녀석이다.
잠시 이야기가 딴 데로 샜는데, 아무튼 중요한 점은 현재 시점에서 라엘은 이미 후계자로 낙점된 상태라는 사실이다.
현재 겉으로 보기에는 위의 두 형과 치열한 후계자 경합을 벌이는 양상으로 보이지만, 아마도 조엘 브리튼 공작의 머릿속에서는 라엘이 후계자로 확정된 상태일 테지.
오랫동안 후계자로서 준비된 상태가 아니면, 두 형을 재치고 라엘이 가주가 되었을 때 그토록 신속하게 가문을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을 터였다. 이미 조엘 브리튼 공작이 알게 모르게 라엘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한 밑 작업을 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자, 정리해보자.
오리엔 국왕은 애지중지하는 막내딸 세렌스 공주를 보냈고, 조엘 브리튼 공작은 자신이 후계자로 점찍고 있는 라엘을 우리 가문의 연회에 참석시켰다.
이게 무슨 뜻일까?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겨우 쿤트 가문의 연회에 참석하기에는 무척 대단한 사람들 아닌가. 물론 쿤트 가문의 삼남인 내가 상급 정령사에 레던 왕실의 주요 인물이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세렌스 공주와 라엘은 일개 자작가의 손님으로는 과분했다.
뭐, 일단은 좋은 징조로 봐도 되겠지? 이유야 어쨌든, 그만큼 오리엔 왕실 측이 우리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제 슬슬 돌아갈까요?”
내 물음에 라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지금쯤 일행도 슬슬 저택에 도착했겠군요.”
“그래요.”
세렌스 공주도 찬성하자 나는 저택으로 방향을 돌렸다.
저택 앞뜰에 도착해서 착지를 하려고 할 때였다.
팟!
라엘이 먼저 훌쩍 뛰어내렸다. 가볍게 내려선 라엘은 우리가 지상으로 내려오자 세렌스 공주를 에스코트했다. 역시 참 모범적인 귀족이란 말이야. 릭 형님도 보고 배워야 할 텐데.
세렌스 공주는 날 보며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참 고마웠어요. 멋진 경험을 시켜주신 것과 이 코트까지도요.”
“어이쿠. 드리는 거 아니니까 연회가 끝나면 돌려주셔야 합니다.”
“호호호, 알았어요.”
내가 과장되게 놀란 시늉을 하자 그녀는 깔깔 웃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인들에게서 들었는지, 아서 형님이 곧 뛰쳐나왔다.
아서 형님은 내 행색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이상한 옷차림은 뭐냐? 부끄럽지도 않은 게냐?”
“이게 바로 그 귀하다는 예티 코트입니다, 형님.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옷이죠.”
나는 자랑스럽게 북슬북슬 두꺼운 흰털 코트를 펄럭거렸다.
“……예티가 아니란 말이오.”
라엘은 또다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제야 아서 형님의 시선이 라엘과 세렌스 공주에게로 옮겨졌다.
“아.”
세렌스 공주가 나의 레드 미스릴 코트를 입고 있는 걸 보고 그제야 상황을 대충 파악한 아서 형님이었다.
아서 형님은 서둘러 인사했다.
“쿤트 자작가의 대공자 아서라고 합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오리엔 왕실의 다섯째 공주 세렌스입니다.”
아서 형님의 얼굴에 살짝 경악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는 태연하게 인사를 한다.
“왕실의 고귀하신 분이 우리 쿤트 가문의 연회에 참석해주시다니 크나큰 영광입니다.”
“호호호, 딸을 얻으신 것을 축하드려요. 정말 좋으시겠어요.”
“물론 좋고말고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아서 형님은 라엘을 쳐다보았다.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 라엘 자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