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회: 6권 - 9장. 세렌스 -->
……마치 정령친화력을 타고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동질감!
불쑥 의심이 든 나는 노움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노움, 혹시 이 여자에게서 정령친화력이 느껴지니?
오른쪽 팔걸이에 앉아 있던 노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게 친근하다 싶었다.
금방 서로 친해진 것도 다 정령친화력을 가진 사람끼리 느끼는 동질감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일찍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세렌스 공주가 가진 정령친화력이 엘레네보다 미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되었다.
정말 우연이다.
최근 들어서 정령친화력을 타고난 사람을 벌써 두 명이나 만났다.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서 싸웠는데 상대가 알고 보니 오러 엑스퍼트였을 확률만큼이나 희박한 우연 아닌가.
“마치, 뭔가요?”
세렌스 공주는 내가 말을 끊고 딴 생각에 잠기자 의아해져서 물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에이, 궁금해지는데.”
“정말입니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굳이 가르쳐줄 필요는 없지.
이대로 세렌스 공주와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오리엔 왕실의 다섯째 공주이고 미모도 아름다우니, 필경 엄청난 거물의 반려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녀가 대귀족의 아내가 된다면,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나 또한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는 아무리 봐도 현모양처의 자질(?)이 다분하니, 훗날 남편의 마음을 확 사로잡을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어떤 놈일지, 이런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얻을 녀석이 참 부러워지는군.
***
처음에 아버지인 오리엔 국왕이 혼담 이야기를 꺼냈을 땐 덜컥 두려움을 느꼈더랬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열여덟 살로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왕가의 여식으로서의 숙명을 감당할 차례였다.
혼담은 정치적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고, 권력지향적인 아버지는 아무리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 해도 결국은 정략결혼을 시킬 터였다.
그것이 불행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왕가의 혈통을 이어 받아 태어났으니 당연한 의무였다. 태어나서부터 당연하게 고귀함을 누리며 살았으니 그만한 짐은 마땅히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남편이 될 사람이 좋은 남자이길 바랄 뿐이었다.
“난 네 남편감으로 레던 왕국의 카록 쿤트 남작을 생각하고 있다.”
“카록 쿤트요?”
“그래. 뛰어난 정령사에다가 정치가, 경영가로서의 자질을 두루 갖춘 놀라운 인재지. 그를 네 부마로 삼아서 우리 오리엔 왕실의 가신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게다.”
“그는 어떤 남자인가요?”
세렌스 공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리엔 국왕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생긴 것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성격도 밝고 활발해 보여서 모난 구석이 없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다행인 정도가 아니라, 그를 네 남편으로 삼아서 데려온다면 이 나라의 큰 행운이 된다. 마침 쿤트 가문에서 연회가 열리니 네가 거기에 참석해서 그를 만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반드시 그의 마음을 얻도록 할게요.”
“그래야지. 분명 너도 그 친구가 마음에 들 거다.”
그리하여서 세렌스 공주는 기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레던 왕국으로 왔다.
그리고 쿤트 영지의 길에서 예상보다 더 빨리 만나 게 된 카록 쿤트 남작.
세렌스 공주는 그를 처음 만난 순간 불안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에게서는 낯선 남자에 대한 어색함과 경계심을 느낄 수 없었다.
첫 인상부터가 왠지 반갑고 친근했다.
눈에 띠게 멋진 남자를 보고 감탄한 적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런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다.
어떻게 처음 만나자마자 이토록 편안하게 느껴질 수가 있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성격도 밝고 익살스럽고 정도 많은 남자였다.
이 남자라면 결혼을 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
이토록 정답고 반가운 느낌을 줄 수 있는 남자는 다시는 없을 테니까.
“이제 다 왔네요.”
카록 쿤트 남작이 말했다. 그제야 세렌스 공주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벌써요? 너무 아쉬워요.”
“그럼 좀 더 하늘 위를 산책해볼까요?”
“정말요? 네, 그래요!”
그들은 쿤트 성 인근을 날아다니며 경치를 구경했다. 세렌스 공주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고 생각했다.
***
“엑? 저게 뭐야?”
납품 주문 계약서를 검토하다 말고 잠시 창밖을 본 줄리아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무언가 의자처럼 생긴 이상한 게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줄리아는 자연히 얼마 전에 카록이 하늘을 나는 욕조에서 목욕을 했던 엽기스러운 행각을 떠올렸다.
“단주님? 분명 단주님일 거야. 그런데 다른 두 사람은 누구지?”
줄리아는 오만상을 쓰며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기를 썼다. 하지만 잘 안 보였다.
다만,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중 한 명은 왠지 여자의 실루엣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다른 여자?!’
덜컥 불안감이 느껴졌다.
프러포즈를 한 지도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카록은 확답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그의 마음이 결혼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의 출현이라니?
줄리아는 급히 옆자리에서 회계 업무를 맡고 있는 시스에게 물었다.
“시스! 마법으로 저 날아다니는 것 좀 확인해볼 수 없어?”
“……거울.”
시스가 대답했다.
줄리아는 오랫동안 시스와 함께 했기 때문에 마법을 펼치려면 거울이 필요하다는 말뜻임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난 거울이 없는데?’
마음이 급해진 줄리아는 사무실의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야! 니들 거울 없냐?”
직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요.”
“저도요.”
“사장님과 시스 씨 외엔 다 남자잖습니까.”
“근데 무슨 여자들이 손거울 하나 없는 걸까.”
남자들이 거울을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 직원이 쭈뼛이 손을 들었다. 큰 키에 평범한 생김새의 청년이었다.
“제가 애인에게 선물하려고 손거울을 사놓은 게 있습니다만…….”
“어, 잘됐다. 갖고 와봐.”
“하, 하지만 저녁에 선물할 거라 이미 포장까지 예쁘게 해놓았는데…….”
“빨리 가져와. 잘리고 싶냐? 네 애인이 좋아하는 건 네 선물이 아니라 네 월급이야, 알간?”
“그, 그런……!”
직원은 울상을 지으며 책상 서랍에서 예쁜 종이로 포장된 손거울을 가져왔다.
줄리아는 그것을 받자마자 포장을 좍좍! 찢고는 손잡이가 달린 동그란 손거울을 시스에게 건네줬다.
“크흑!”
포장지가 찢기는 걸 보며 직원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울먹거렸다.
시스는 손거울을 두 손으로 잡고 마법 시동어를 읊조렸다.
“디텍팅 포인트(Detecting point).”
파앗!
손거울에서 밝은 빛이 흘렀다. 시스는 거울의 반대편을 창밖으로 보이는 괴이한 비행물체를 향하게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비행물체의 모습이 손거울에 영상으로 나타났다.
손거울에 비쳐진 영상은 더욱 놀라웠다.
흙으로 만든 이상 망측한 3인승 흔들의자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웬 예티를 연상케 하는 이상한 흰털 코트를 입은 카록. 그리고 카록이 무척이나 아끼는 레드 미스릴 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
예쁜 여자.
여자인 자신이 봐도 아름다운 여자!
또 다른 남자는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뒷자리에 앉혀놓은 채 카록과 여자는 자기들끼리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풍경이 그토록 눈꼴 시릴 수가 없었다.
줄리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때, 시스가 나직이 한마디 했다.
“……다른 여자.”
“으으으! 이 인간이 근데?!”
줄리아는 격노했다.
“내가 몸소 프러포즈를 하면서 안 받아주면 사직서 쓰겠다고 협박하고, 대략 5분짜리 찐한 키스까지 한 방 날려줬는데, 저 인간은 다른 여자랑 핑크빛 무드?!”
여자가 자신보다 세 살쯤 어려 보여서 더욱 열 받는 줄리아였다.
줄리아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면 줄리아 로렌이 아니지! 내 오늘 확답을 듣고 말 것이야! 시스, 너도 따라와!”
줄리아는 손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는 시스를 잡아끌었다.
뒤에서 직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장님! 시스 씨! 제 손거울은 돌려 주셔야죠!”
“시끄러! 손거울은 쓸 데가 있어서 빌려갈 거야. 네 애인한테는 비싼 반지나 하나 사주면서 프러포즈나 해! 이 값싼 손거울로 여자 마음을 얻으려는 건 도둑놈 심보야! 알간?”
“제 손거울…… 크흑!”
줄리아는 시스를 잡아끌며 용맹하게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