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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50화 (150/529)

<-- 150 회: 6권 - 9장. 세렌스 -->

12월 6일.

눈이 펑펑 쏟아진다. 마치 하늘도 내일부터 시작될 엘레네의 출생 축하 연회를 축복해주는 듯했다.

……는 개뿔이?!

눈이 무릎까지 쌓이는 대형 폭설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마차가 길을 지나갈 수도 없다.

“이러다가는 정말 연회에 참석하는 손님이 절반도 안 되겠군.”

아버지는 하늘을 보며 우려했다.

아서 형님의 안색도 어두웠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영지의 군대를 총동원해서 제설(除雪)작업을 시키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아서 형님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아 놔. 또 나냐?

대흉년 때의 가뭄을 대비할 때도 그랬고, 이제 무슨 천재지변만 생기면 날 찾는 아서 형님이었다. 엘레네가 태어날 때도 그랬고, 왜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을 땐 나에게 해결하라고 하냔 말이야.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로 진입하는 길목부터 우리 가문의 저택까지 눈을 치우겠습니다.”

“가능하겠느냐?”

“눈이 계속 쏟아지는 터라 한 번 치워도 계속 쌓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해보죠.”

“그래. 네가 한 번 눈을 치우고 나면, 병력을 길목마다 배치해서 지속적으로 담당구역을 재설 작업 하도록 지시하겠다.”

“그게 좋겠네요.”

이미 이곳 쿤트 영지에서는 기적의 정령사라 불리며 영지민들의 뜨거운 인망을 얻고 있는 이 몸! 이번 활약으로 또 한 번 칭송을 받겠군. 눈을 녹여 폭설에서 영지민을 구한 카록 쿤트라. 거창해서 나 같지 않군. 아하하.

좋아, 간만에 정령친화력이 몽땅 고갈돼서 두통이 나도록 일해보자고.

나는 저택 밖으로 나섰다.

이미 아서 형님의 명령이 떨어졌는지 영지 군대가 총집결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눈 치우는 일이겠지.”

“뭔 눈이 이렇게 쏟아져?”

“대체 하늘에는 어떤 자식이 있는 거야?”

“눈 치우다 우리가 파묻히겠군.”

“그냥 농사나 지을까? 이럴 땐 정말 진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전역하고 싶어…….”

병사들은 저마다 삽을 들고 나오며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군대에서 병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작업이 제초(除草)와 제설(除雪)이라고 딘과 렉스가 술자리에서 떠들던 게 생각났다. 쯧쯧쯧, 불쌍한 것들.

보나마나 폭설로 훈련 없다고 좋아하다가 작업에 끌려나왔을 테지.

저택 정문 밖으로 나오니 하얗게 뒤덮인 마을 풍경은 날 질려버리게 만들었다.

무릎 높이 이상 눈이 쌓인 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자기 집 앞의 눈을 치우는데 몰두할 뿐이었다.

다행히 춥지는 않았다.

내가 입고 있는 레드 미스릴 코트에 온도조절마법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땐 이 귀한 걸 선물해준 정신병자 황제가 고마워진다.

“자, 그럼 눈을 치워볼까?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

눈이 일부 녹으면서 물 덩어리를 이루더니 운디네로 변했다.

-안녕, 아빠.

“그래, 운디네. 안녕.”

나는 운디네는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노움, 어디 있니?”

-나 여기.

눈 더미 위에서 쏘옥 하고 노움의 얼굴이 솟았다. 노움은 눈 속을 헤엄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하하, 역시 귀여워 죽겠다니까.

“어휴, 우리 귀여운 노움 거기 있었구나?”

-헤헤, 나 귀여워.

나는 노움을 번쩍 들어서 꼬옥 끌어안았다. 그런데 샐러맨더 얘는 어디 있어?

-나 여기 있다…….

어느새 내 머리 위에 둥실 떠오른 샐러맨더는 온몸을 잔뜩 움츠리며 춥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춥냐?”

-춥다…… 겨울 싫다…… 돌아갈 거다!

그러더니 샐러맨더는 화악 공중에서 흩어지며 사라져버렸다.

헐. 무슨 정령이 지 멋대로 소환해제를 하고 난리야? 다시 안 돌아와?!

나는 다시 샐러맨더를 소환했다.

다시 소환된 샐러맨더는 잔뜩 심술 난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니꼽게 째려보면 어쩔 건데?

아니지, 아니지.

원래 상단을 경영할 때도 부하 직원에게 성질을 내면 역효과만 나지. 이럴 땐 격려가 최고야.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샐러맨더를 타일렀다.

“그러지 말고 힘내서 눈을 치우자꾸나. 이렇게 눈이 쌓여서 연회에 손님이 못 오면 우리 조카딸 엘레네가 얼마나 슬퍼하겠니?”

-안 슬퍼한다!

그래. 나도 안단다.

갓난아기에게 엄마가 맘마 안 주는 것 말고 슬퍼할 일이 뭐가 있겠니?

“일 끝나면 엘레네랑 놀자, 응?”

-체엣!

샐러맨더의 유일한 약점은 엘레네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정령들 다 정령친화력을 타고났고 아기의 순진함을 가진 엘레네를 좋아했다.

“자자, 그럼 시작하자!”

-쳇!

샐러맨더는 나의 생각을 전달받은 뒤, 곧바로 집채만 한 크기의 불덩어리를 만들어냈다.

화르르륵!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거리에 놓이자, 그 주변에 쌓인 눈이 급속도로 녹아버렸다.

“좋아. 운디네. 눈 녹은 물은 얼어서 빙판길이 되지 않게 양옆으로 치워줘.”

-응.

그리고 나는 노움과 감각을 공유한 뒤 흙으로 된 흔들의자 하나를 만들었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등을 기댔다.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가 각각 팔걸이와 등받이 쪽에 자리 잡았다.

이윽고 나를 태운 흔들의자가 둥실 공중으로 떠올랐다.

“자, 가자!”

내 명령이 떨어지자 불덩어리가 데굴데굴 거리 위를 굴러가기 시작했다.

불덩어리가 지나갈 때마다 거리에 쌓였던 눈이 삽시간에 녹았고, 녹은 물은 썰물처럼 양옆으로 치워졌다. 나는 흔들의자를 타고 날며 불덩어리를 따라갔다.

“오오! 거리의 눈이 녹는다!”

“카록 도련님이야!”

“기적의 정령사가 눈을 치운다!”

눈을 치우던 영지민들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그래, 직업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눈 치우는 일은 귀찮은 법이지.

불덩어리는 호쾌하리만치 데굴데굴 빨리도 굴러다녔다.

촤아악!

쌓인 눈이 급속도로 물이 되어 흐르는 광경은 제법 볼만했다. 나는 여유롭게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채 불덩어리를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불덩어리를 따라 쿤트 성 밖으로 이동해서 마을에서도 벗어났다.

멀리서 올 손님들을 위해서는 영지로 진입하는 길목까지 모두 눈을 치워야 했다.

그렇게 한 다섯 시간쯤 지났을까?

쿤트 성에서 꽤 멀리까지 청소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문득 멀리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오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노움의 감각에 더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2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9명 정도 되는 인원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마차가 있는 탓에 속도는 느렸다.

눈이 너무 높게 쌓여 있어서 마차를 끄는 말들이 속력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연회에 참석하는 손님인가?”

그럴 것 같았다.

일행 중에 오러 엑스퍼트 상급쯤 되는 뛰어난 실력자도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체내에 품고 있는 오러의 양이 그쯤 되는 듯했다. 그만큼 강자를 일행으로 데리고 있으면 틀림없이 어딘가의 거물급 귀족일 터.

2킬로미터 밖에서 이 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다니, 역시 정령의 감각은 편리했다.

아무튼 눈 쌓인 길 탓에 오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니 한 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불덩어리가 굴러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서로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런데 그때, 상대측의 일행들 중에서 금발의 한 젊은 남자가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잉?

금발의 남자는 허리춤에서 롱 소드를 뽑고는 데굴데굴 굴러오는 불덩어리를 향해 돌진했다.

롱 소드에서 강력한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내가 감지했던 오러 엑스퍼트 상급의 실력자가 바로 저 남자였다.

아, 내 실수.

정면에서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이글거리며 다가오는데 누군들 적대감을 보이지 않겠는가?

나는 서둘러 샐러맨더에게 명령했다.

“불 좀 없애!”

-크헤헤! 숯덩이로 만들자!

“얌마! 말 안 들어? 한 달간 소환 안 한다?!”

-체엣!

샐러맨더는 몹시 아쉽다는 듯이 불덩어리를 없애버렸다.

눈앞에서 불덩어리가 휙 사라져버리자 용감하게 돌격하던 금발의 남자는 당황하여서 잠시 휘청거렸다.

나는 하늘을 나는 흔들의자를 타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금발의 남자는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귀하의 정체는 무엇인데 우리를 위협하는…… 응?”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호통을 치는 금발의 남자가 순간 내 모습을 보고 당혹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흙으로 만든 흔들의자에 앉아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내 괴이한 모습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팔걸이와 등받이에 앉아 있는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 역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이상한 생명체가 아닌가.

이야, 이것 참…….

아무튼 저렇게 대놓고 귀족 사회에서도 1%에 속하는 초특급 엘리트의 냄새가 풍기는 남자는 오랜만이었다.

갑옷도 롱 소드도 미스릴제로 보였고, 타고 있는 백마도 최소한 일급품의 전마(戰馬)였다. 거기에 언행도 품위가 있다. 적일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귀하’라고 칭하는 것을 봐라!

이마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철저한 교육으로 실력이 출중함. 키, 얼굴, 매너도 빠지지 않으니 이 정도면 완벽남.’이라고 써 붙여져 있는 듯했다.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쯤 됐을까?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라니, 릭 형님과 좋은 라이벌이 될 듯싶었다.

물론 실력은 릭 형님 쪽이 더 좋은 것 같지만, 대신 저 엘리트 친구는 릭 형님에게 없는 품위라는 게 있어 보이거든.

나는 저 금발의 엘리트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아, 저는 적이 아닙니다. 놀랐다면 죄송합니다. 보다시피 눈을 치우고 있는 중이라서 말이죠.”

“이런 식으로 눈을 치우는 건 처음 봤소. 아, 그쪽은 혹시 정령사이신 카록 쿤트 남작이시오?”

“맞습니다. 그쪽은?”

“나는 오리엔 왕국의 브리튼 공작가의 삼남인 라엘 자작이라고 하오. 현재 오리엔 왕실의 고귀하신 다섯째 공주 저하를 모시고 귀 가문의 연회에 참석하러 가고 있었소.”

“다섯째 공주님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오리엔 왕실에도 물론 초대장을 보내긴 했지만, 설마 다섯째 공주를 보낼 줄은 몰랐다.

사실 별로 기대도 안 했다. 그냥 축하 서신만 보내주고 말겠지 싶었었는데…….

오리엔 국왕, 이 터프한 척이나 하는 양반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다른 왕자들도 많을 텐데 왜 스무 살도 안 된 다섯째 공주를 보내?

“귀한 분께서 오셨군요.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 일단 거기서 내려오시오. 목이 아프군.”

“옙.”

나는 흔들의자를 지면으로 낮게 하강시키고 마차로 다가갔다.

라엘이 마차 안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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