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회: 6권 - 7장. 가족 -->
복잡한 심사가 진정되기도 전에 나는 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바로 유란 상단주였다.
“안녕하십니까, 카록 쿤트 남작님!”
유란은 20대 중반의 젊은 사내였다. 체격도 다부지고 땡볕 아래를 많이 다녀서인지 피부가 갈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건강하고 활동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반갑군. 앉지.”
“예, 감사합니다.”
유란은 급박한 처지 탓인지 나에게 예의가 무척 깍듯했다.
우리의 만남 장소는 오래간만에 들린 ‘맥스의 쉬어가는 집’이었다.
“어이쿠, 남작님! 안녕하셨습니까?”
맥스가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왔다.
“오랜만이야. 이제 밤새도록 술 마시며 소란 피우는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헉! 제발 술자리는 밤 12시까지만…….”
“하핫, 농담이야. 맥주랑 닭고기 스튜. 야채 듬뿍 넣어서.”
“옙! 그쪽은?”
맥스가 유란에게 물었다.
“같은 걸로 주시오.”
“예잇!”
맥스는 주문을 받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갔다. 곧장 시원한 맥주 두 잔이 나왔다.
맥주를 마시며 나는 유란과 대화를 나눴다.
“혼트 제국에서 불운한 일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예. 유목민족들에게 목숨 빼고 전부 털렸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빠르더군요. 바람처럼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포위를 한 채 활을 겨누었습니다. 고용했던 용병단도 감히 싸워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전 그 용병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항하는 순간 전멸했을 테니까요.”
“현명한 결정이었어. 혼트 제국 유목민족의 기동력은 정평이 나 있지. 한때는 베잘리우스 대공을 따라 대륙을 휘젓던 민족이니까.”
“예. 아무튼 그때 마차까지 통째로 내줘야 했고, 약간의 식량과 물, 그리고 몸뚱이만 남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운 좋은 줄 알라더군요. 하하하. 예, 저도 혼트 제국에 많이 다녀봐서 압니다. 정말 운이 좋았지요. 보통은 항복하도록 설득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죽이고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렇게 위험한 나라인데, 왜 혼트 제국으로 주로 상행을 다닌 거야?”
“아시다시피 모두가 꺼려하는 곳에 기회가 있지요. 남작님 역시 아무도 밀을 매입하지 않으려 할 때 홀로 있는 대로 매입하셨잖습니까. 결국 대흉년이 닥쳐서 남작님께서는 큰돈을 버셨지요.”
나야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까.
유란은 계속 말했다.
“제가 이번에 시도했던 상행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평소에 남작님의 놀라운 성공을 흠모했던 터라, 저 역시 곡물사업에 뛰어들었지요.”
“곡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재작년의 대흉년, 작년의 흑혈병 때문에 식량난에 크게 데인 영주들은 올해 들어 농사에 목숨을 걸었다. 그 결과, 대륙적으로 곡물이 과잉 생산되는 정 반대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걸 예상 못하고 식량을 선점하려고 미리 돈을 뿌렸던 상인들은 전부 쫄딱 망했다.
유란은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압니다. 올해 곡물은 너무 넘쳐나서 시세가 바닥으로 떨어졌지요. 하지만 전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다들 잔뜩 확보해둔 채 판매도 못하고 썩혀두는 곡물을 처분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잔뜩 사서 혼트 제국에 팔려고 계획했지요.”
“호오, 혼트 제국은 아직도 식량이 부족하니까 위험을 감수하면 크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군.”
“바로 그겁니다.”
잠시 후 맥스가 닭고기 스튜 두 개를 가져왔다. 구수한 냄새가 풍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맥스네 부인이 요리를 참 잘 한단 말이야.
“제가 보기에 혼트 제국은 정말로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치안이 엉망이라서 오히려 물가는 다른 나라보다 더 비쌉니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와 신용할 만한 거래상대만 있으면 시세차익을 쉽게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음. 나도 동의해. 다만 그 두 가지 모두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지만.”
혼트 제국에서는 거래하기로 했던 상대가 강도단으로 돌변해서 물건을 약탈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상인들이 기회의 땅이라는 걸 알면서도 혼트 제국 상행을 꺼리는 건 그 때문이었다.
용병을 고용해도 진짜 위협을 만나면 소용없다.
유목민족들!
질풍처럼 말을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는 무서운 전투 집단 앞에서 용병 나부랭이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최소한 오러 엑스퍼트가 동행하지 않으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곳을 수시로 오가며 상행을 했다니, 정말 대단하군. 네 상단의 직원들도 하나같이 배짱이 좋겠어.”
“물론입니다!”
유란은 흥분하여 말했다.
“우리 상단 직원들은 하나같이 배짱 좋고 의리 있는 친구들입니다.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도 늘 저를 따라주었으니까요. 하지만 상단주를 잘못 만난 바람에 빚쟁이들에 의해 전부 노예로 팔려가게 생겼습니다.”
무서운 빚쟁이들. 심지어는 애꿎은 상단 직원들까지 전부 볼모로 붙잡았구나.
“아깝군. 그런 배짱 좋고 의리까지 있는 직원들은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유란은 애타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남작님! 제발 저희들 좀 살려주십시오. 그 녀석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저희 상단을 인수해주신다면 성심을 다하여서 일하겠습니다. 저 역시 요번에 실패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손해를 본 적 없습니다. 기필코 남작님께 많은 이익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결코 6천 레디나가 아깝지 않으실 겁니다.”
난 이미 유란이 마음에 들었다.
상재도 있고 담력도 좋다. 그의 수완이야 전생 때 들었던 명성으로 이미 알고 있다.
“좀 더 어필해봐.”
“저는 혼트 제국에 판매처를 여럿 가지고 있습니다. 유목민족의 몇몇 부족과 친분도 있습니다. 혼트 제국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입니다.”
“호오?”
“남작님께서 제 상단에 관심을 보이신 이유는 아마도 혼트 제국 진출에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일 거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기회를 잡으신 겁니다. 장담컨대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것보다는, 저희 상단을 인수하신 후에 저희를 앞세우는 편이 훨씬 유리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유란의 주장에는 믿음이 있어 보였다.
“하나만 더 묻지. 혼트 제국에 많은 물량을 수출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필요할 것 같아?”
“최소한 오러 엑스퍼트 한 명 이상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혼트 제국은 너무 위험해졌습니다. 유목민족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뜁니다. 경험 많은 저도 몽땅 털렸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입니다.”
오러 엑스퍼트라…….
마침 잘 됐군. 패트릭 콘돌에게 좋은 경험을 시켜줄 기회야.
그렇지 않아도 나는 유목민족을 상대로 전쟁을 할 때를 대비해야 했다.
카르스 황제가 대륙 정복을 시작할 때, 그의 휘하에는 유목민족들도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유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의아해하는 유란에게 말했다.
“뭐해? 앞으로 잘 해보자는 악수야.”
“아아! 감사합니다!”
유란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꽈악 잡고는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직전에 생명줄을 잡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유란 상단을 인수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혼트 제국으로의 수출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유란 같은 경험자가 주도해준다면 나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적재적소의 인재를 얻을 수 있는데 6천 레디나가 대수이겠는가?
“이제 너를 포함한 유란 상단 직원 전원이 나의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는 카록 상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야 할 거야.”
“네! 맡겨주십시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일하면 안 돼.”
“예?”
“모두의 성공을 위해서지. 내가 돈을 벌면 너희도 돈을 번다. 성취만큼의 보답은 확실하게 해주겠어. 난 내 사람들에게는 아주 통이 큰 사람이니까 날 믿어.”
“옛! 직원들도 남작님을 보면 이제야 훌륭한 상단주를 만났다고 기뻐하겠군요.”
“하하하!”
우리는 유쾌하게 웃었다.
유란 상단의 인수가 결정되면서, 우리는 사업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혼트 제국에 수출할 계획으로 식량 및 생필품을 2만 레디나어치 확보해두었어.”
“2만 레디나어치나 말입니까?”
유란은 놀란 얼굴을 했다.
“어때? 이만한 물량을 소화할 역량이 너에게 있어?”
귀금속 같은 귀족들의 사치품이라면 모를까, 식량과 평민들의 생필품이 2만 레디나어치라면 굉장히 많은 물량이었다.
판매처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면 창고에서 썩혀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유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 두 배의 물량도 자신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더 중요한 일인데, 혼트 제국에서 말과 활을 수입해와.”
“말과 활이요?”
“그래.”
“그럼 유목민족들과 거래를 해야 하는데요.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위험합니다.”
“오러 엑스퍼트를 호위책임자로 붙여주지.”
패트릭 콘돌을 동행시킬 생각이었다.
“정말이십니까?”
“응.”
“예.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일을 진행하려면 직원들이 모두 풀려나야지? 직원들 볼모로 잡고 있는 빚쟁이가 누구야?”
“후디니 자작님입니다.”
“……엑?”
후디니 자작은 바로 아서 형님의 장인어른, 즉 레이라의 아버지다.
이 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를 다스리고 있고, 몬스터 박제 수집을 좋아하는 그 허영심 많은 양반 말이다.
이제야 생각났다.
후디니 자작가의 가훈은 ‘계산은 확실하게’였다!
확실히 돈 계산도 철저한 양반이었지. 내 장인이었을 때나 아서 형님의 장인일 때나.
“그분도 밀의 시세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재고 처리에 고심했나보군.”
“예. 그래서 제 제안에 선뜻 동의하셨지요.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만.”
난 유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걱정 마. 내가 후디니 자작님께 서신 한 통을 보내지.”
남도 아니고, 내 서신 한 통이면 곧장 유란 상단 직원들을 풀어줄 것이다.
***